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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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18년  11월호이단 성도 제보자,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요? 목회자 고민 상담소(58)

교회에서 많은 봉사와 헌신으로 귀감이 되었던 A 성도가 이단에 빠졌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A 성도에게 가서 물어보니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보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보자는 A 성도가 이단 성경공부반에 출입하는 사진을 찍어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증거를 본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두 사람을 불러 이 일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A 성도는 이단에 출입한 사실을 실토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후 제보자가 교회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A 성도에 대한 아쉬움과 허탈감이 제보자를 향한 알 수 없는 미움으로 이어지고, 사진까지 찍어 증거를 제출했던 제보자의 행동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화를 목도하며 목회자로서 제보자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그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책임을 느낍니다. 지금이라도 제보자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한 이와 비슷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요?



이단의 문제로 교회 안에서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의 악한 손길이 목사님의 사역 중심에까지 들어온 것에 많이 놀라셨을 듯합니다. 이단의 경계선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까지 넘은 것을 보면 사탄의 활동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교회도 깨어 있어야 하겠지요.  

선한 양떼를 노리는 이단의 악한 의도를 드러내고 그것을 분별해 쫓아낸 것은 목회자로서 마땅한 도리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임을 목사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 드러낸 것”에 대해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계2:2). 교회 공동체는 죄인의 공동체지만,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이단의 가르침을 가지고 거룩한 교회를 침범하는 자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다른 성도들의 경계를 삼는 것이 마땅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에베소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단을 경계하고 악한 자들을 찾아서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은 잘 하였으나, 그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계 2:4). 하여 주님은 에베소교회가 회개해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교회에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단을 대적할 때  에베소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이단을 미워하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말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공의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사랑에는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서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헌신에 귀감이 되었던 성도가 이단에 빠졌다는 제보는 담임 목회자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신앙생활을 해 오던 다른 성도들에게도 큰 상처임에 분명합니다. 그만큼 이단은 우리 성도들의 생활에, 교회 안에 가까이 들어와 있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 봉사와 헌신에 귀감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교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 이단의 경우, 전략적으로 소위 추수꾼들을 기성 교회에 장기간 보내 충성스러운 교인인 듯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게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약간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교회와 지도자에 대해 비방을 하게 하여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을 갈라놓는 이간질을 합니다.

길거리에서 대학생들을 성경 공부, 심리 상담, 연구 프로젝트 참여 등등 온갖 거짓말로 속여 유인하기도 합니다(이것을 그들은 선한 거짓말이자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의 사업처나 개인을 찾아가 성경 공부를 하자며 일반 성도들을 유혹해 넘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맞으면 교회 전체를 이단에 넘어가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회자가 이단 제보자의 적극적인 역할에 감사해하며, 그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과 제보자를 직접 만나고, 내용을 확인하고 조사해 교회에 쓴 뿌리가 없게 하려 했던 것은 목회자로서의 신실한 임무입니다. 목회자에게는 양떼를 감독하고, 나쁜 이리가 다가올 때는 경고와 출교의 조치까지 취해 순결한 양들에게 고통과 손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목사님께서 제보자의 익명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용이한 방법 즉 양자 대면을 통해 사실 확인을 시도함으로써 생긴 부작용에 대해서는 함께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단에 빠진 그 사람은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교제해 왔기 때문에 교회에 미치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그 성도가 이단에 빠졌다는 사실보다는 일을 그렇게 처리한 제보자나 그런 제보자를 통해 정체를 드러낸 목회자에 대한 원망의 후폭풍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단 판단의 위험성

교회 내 어떤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한 개인의 영적, 신앙적 정체성에 종말을 고하는 사형 선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이단이라 판단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한 조사와 확실한 증거에 의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철저한 조사와 비밀 유지가 이 과정에서 동반되어야 할 핵심적인 절차입니다. 자칫 엉뚱한 사람에게 이런 누명을 씌웠을 경우, 교회가 큰 시험과 분란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 선고가 가진 이런 위험성 때문에 때로는 이것이 잘못 오용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목회자의 성적 탈선을 고발하는 여성을 두고 교회가 그녀를 이단이라고 호도했습니다. 본질은 성추행인데도 불구하고 큰 교회의 자존심과 명예에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해 이단이라 부른 것입니다. 정확한 내용을 알지도 못한 채, 아니 파악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자기 교회 중심주의에 빠져서 오히려 피해자들을 이단이라고 말한 것은 피해자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이단 타령을 하는 것은 교회의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간과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분명한 차이와 개인의 의도적인 이단 참여 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교회가 그 모든 사실을 입증해 공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결코 이단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단을 접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단의 성경 공부 모임에 초대를 받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런 위험에 대해 목회자는 평소에 지속적으로 설교와 성경 공부를 통해 경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개개인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 빈틈을 집요하게 헤집고 들어옵니다. 중년의 한 여성은 남편과 별거하며 두 딸을 알차게 잘 키웠습니다.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 안 해 본 일이 없고, 사업 관계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다 보니 한 이단과도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이 여성과 자녀들을 성경 공부 모임으로 초대했고, 그들의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대학부와 청년부 딸들은 기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판단하고 거절했지만, 그 여성은 목회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이단에 참여했습니다. 이단 쪽에서는 사업을 미끼로 계속해서 한 가족을 통째로 빼앗아 가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영적 상태는 심각하게 위태로웠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 온 교회와 신앙보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에게 사업상 이익을 주며 ‘색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끔 교회에 들렀을 때에도 교회나 기관들이 이단만큼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성경 공부의 문제라기보다는 굳세고 강하게 살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인정 욕구의 충족 문제였습니다.

대개의 이단이 그러하듯 내부적으로 매우 강한 유대감을 가진 이들 공동체는 그렇지 못한 중대형 교회에서 관심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들의 모임으로 유인해 들입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굶주린 인정 욕구를 매우 그럴듯하게 만족시켜 줍니다. 아마도 앞서 말씀하신 성도 역시 그런 면에서 이단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전략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성도, 건전한 신앙을 가진 성도, 교회 안에서의 건강한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는 성도들에게는 하찮고 허술한 전략입니다. 그들이 다가와서 무슨 요구를 하든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고 그들을 떨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성처럼 삶에 지치고 피곤하며, 인정 욕구에 만족이 없을 때는 그들이 내미는 손길이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평소에 성도들의 확신과 공동체의 결속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내 이단에 빠진 성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경우, 목회자는 먼저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해 확인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이단의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교제한 사실을 확인했다면, 자기 스스로 자신이 맡은 교사나 구역장의 직책을 내려놓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들이 이단의 성경 공부에 참석해 새롭게 배우는 사상들이 학생들이나 구역원들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목회자의 감독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비난하고, 교역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빼앗아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갉아먹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하는 성경 공부에 참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면밀한 대화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발적이고 반복적으로 그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단의 교리나 교제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다면, 목회자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 사람과 접촉 중인 교회 내 여타 교인들과 가족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들의 영적인 형편이 어떤지, 혹시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앞서 말한 그 여성의 경우에는 가정의 여러 가지 변화와 함께 이단과의 관계를 끊고 다시 교회에 돌아와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는 그 회심이 진심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그녀의 이단 참여와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일부 목회자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중론을 얻기 위해 사역자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했지만, 함께 주의하면서 경계하며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큰 소동 없이 당사자를 교회에 다시 정착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밀 유지와 제보자 보호

비밀 유지는 목회 상담에서 가장 기본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이 상담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거나 그것이 누설된 정황이 나타나서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 상담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고 상담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더구나 이단 문제와 관련해 제보자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 상담자였던 목회자의 조급함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이단의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고발이 접수되었다면, 당사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부인하는 것을 보고 ‘당황 혹은 조급’하여 당사자를 제보자와 대면하게 한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발자와 피고발자가 동석한 자리에서 목사님이 직접 ‘공명정대’하게 중재해 사실을 분별해야 하는 부담스런 위치에 스스로 자신을 올려놓은 꼴이 됩니다. 한 사람씩 대면할 때와 두 사람을 함께 앉혀놓고 문제를 조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피고발자의 말을 우선 ‘믿고’ 조금 더 기다렸더라면 어땠을까요? 대면조사를 하기 전에 고발자의 신원을 숨겼더라면, 그리고 사진 자료를 받았더라도 개인적으로 다시 재확인을 하고 당회와 의논해 지혜롭게 처리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고발자와 피고발자가 서로 진실게임을 하며 다투는 모양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성도들이 편 가르기를 함으로써 교회의 분란을 자초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언젠가는 ‘누가 제보했을까?’ 하는 것이 이슈가 되고, 그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쉽게 소멸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당사자들 앞에서 참과 거짓을 가리려 한 것이나, 그들을 싸우게 방치한 것이나, 성도들로 하여금 좌우로 나뉘게 한 것이나 제보자를 미워하게 한 것은 리더십의 미숙함에서 오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목회자가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문제가 공론화되면, 교회의 내적 분열과 내홍은 목사님이 손댈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피고발자와 친분이 가까운 사람들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정의로운 일을 한 고발자를 미워하게 되고, 그 일을 크게 만든 목회자에게도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생긴 내적인 긴장을 새로운 ‘적’을 만듦으로써 풀어가려는 ‘악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을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속죄양 이론’(Scapegoat Theory)이라고 말합니다. 일정한 크기의 그룹 내에 긴장감이 생겼을 때, 내부에서 자신들과 다른 한 사람이나 한 소수 그룹의 연약한 사람들을 지목해 그들을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추방’함으로써 남아 있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이론입니다. 결국 이 제보자는 상담 과정에서 유출된 정보로 인해 공동체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하고도 설자리를 잃게 되는 모순된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확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제보는 제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급한 마음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내 목회 현장에 이리 떼가 나타났다는 위기의식에 빠지기보다는 사건을 이성적이고 실제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고발자와 피고발자, 둘 모두의 목회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중대한 일에 균형감각을 갖추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제보자의 제보 내용이 확인될 때까지는 아직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확증이 될 때까지는 피고발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거나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단 확인’이라는 절차가 끝날 때까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제보자에게도 뒤따를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해 주고, 정확한 내용이 확인될 때까지는 피고발자를 정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겠습니다.

목회자는 이야기할 기회가 많습니다. 성도들과 소통할 이야기가 필요해 때로 다급하게 진행 중인 사안들을 노출시킬 때도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유혹이 강해 그 유혹에 굴복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해결자나 구원자가 아닙니다. 성도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발생하고, 누군가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게임’과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는 언행에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수사관들처럼 사실 확인만을 위해 당사자들을 함부로 소환하거나 대면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급한 해결을 시도하기보다 절차를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이처럼 어렵고 복잡한 일들도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지키며 지혜롭고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재성 고려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 밴더빌트대학교(Ph.D.). 저서로 《우울증, 슬픔과 함께 온 하나님의 선물》, 《강박적인 그리스도인》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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