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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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8년  10월호십일조의 세가지 의미: 신명기 14장 22-29절 주제별 성경 연구 | 헌금

[22]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후략)

신명기 14장 마지막 부분에는 십일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기본적인 상식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십일조에 대해서 갖는 오해 두 가지를 언급하려고 합니다.

십일조는 전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우선 예수 믿는 사람이면 십일조에 대해 하나님 앞에 세금 내듯이 내야 한다는 기계적인 이해를 갖는 분들이 있지요? 십일조는 의무라고 여기고 마치 세금을 떼듯이 헌금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십일조는 축복의 계약금이라는 인식입니다.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고 안 내면 그 다음달 안 낸 만큼 반드시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손해를 주신다는 겁니다. 가령 자녀가 갑자기 아파서 그 달에 병원비를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 꼭 발생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일조를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 다 틀린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십일조에 관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지만, 책마다 강조하는 초점이 다릅니다.  신명기에서는 신명기적 관점으로 십일조를 조명합니다. 신명기는 십일조를 어떤 차원에서 강조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절은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토지는 땅을, 소산은 그 땅에서 얻어진 결과물인 농작물을 말합니다. 신명기가 쓰인 당시 유대의 경제 사회는 직업이 단순했기 때문에 농사가 생존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얻어지는 농작물은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십일조라는 말은 사실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십분의 일이라는 수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분의 일’을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열의 첫 것’입니다. 히브리 수 ‘일(1)’은 ‘장자, 맏물, 일, 첫 것’이라는 의미로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머지 전부를 대표한다는 의미로 대표의 수입니다. 그래서 첫 것이 죽으면 실상은 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라는 숫자에서 첫 것은 대표라는 개념과 함께 전부라는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십 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부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나머지 아홉 또한 하나님의 것이지요. 여기에는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나머지 아홉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함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토지, 소산은 원인과 결과를 함축하는 의미입니다. 
  
땅에서 열매가 납니다. 즉 땅은 원인을, 농작물은 결과를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십일조뿐만 아니라 헌금을 드리지요? 헌금을 왜 드릴까요? 우리가 헌금을 안 하면 교회 경영도 안 되고, 목회자 사례도 못 드리기 때문이라는 경영적 논리에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행위 자체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내가 사는 힘의 근거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주님이 내 삶의 원인이고 근거라는 고백이 헌금의 행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신명기 관점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일차적 교훈은 23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 속에서 첫 번째 교훈은 23절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힘의 출처와 근거가 물질에 있지 않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창세기 14장에 십일조가 처음으로 드려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조카가 잡혔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훈련을 시킨 318명의 가신을 데리고 9개 부족과 전쟁을 치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해 모든 것을 되찾고 빼앗긴 것도 되돌려 받고 전리품을 들고 돌아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아브라함을 마중 나옵니다. 한 사람은 소돔 왕이고, 또 한 명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멜기세덱입니다. 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다음의 환영 낭독을 합니다.

“…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19-20).

그러자 정신을 바짝 차린 아브라함이 최초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여기에서 멜기세덱은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7장에서는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영원한 제사장의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마중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준 십일조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내가 너에게 복을 주었으니, 너는 나에게 십일조를 떼어서 바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감사의 정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쟁취한 승리가 자신의 힘과 실력, 근거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았고, 최초의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드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면 복을 받고 안내면 저주를 받는 계약금의 성격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십일조를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이어서 소돔 왕이 환영사를 합니다. 요지는 ‘물품은 네가 갖고 사람들만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네 수고와 지략과 힘으로 이긴 것이니 물품은 네가 가지고 사람만 돌려보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그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나로 하여금 부자를 만들었다 할까 하여 내가 일절 갖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방금 멜기세덱에게서 배운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합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로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언급했습니다. 왜 십일조에 그리스도 이야기가 나올까요? 우리가 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대속과 죽음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여러분들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지 않는 인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삶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드시 전제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일조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오셨습니다. 첫 것으로 오셨습니다. 결국 십일조가 암시하는 깊은 영적 줄기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어서 우리도 그 안에 접붙여진 존재로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와 똑같은 헌신과 감사와 고백을 우리로 하여금 명령하십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아, 과부, 나그네. 이 세 종류의 인생은 구약시대에서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외부적인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 세 종류의 인생은 죄인 된 우리의 과거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또한 이 세 종류의 인생들은 과거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로마서 3장에서도 “복음에는 한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갑자기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저 이방 땅에서 흘러 들어왔던 룻이란 여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땅에 들어와 부자와 결혼합니다. 그래서 그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부자는 그리스도입니다. 룻기에서는 그 부자가 보아스라고 되어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해당하는 곤고한 자들을 구제해야 할까요? 물론 다른 종교나 정부기관이나 단체에서도 구제를 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기독교인이 하는 구제는 달라야 합니다.

첫 번째로 기독교인은 매일 구제를 통해서 내가 과거,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기 전에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 확인합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생이었는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생명을 갖고 영적으로 부자가 된 것임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움으로써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여타 종교와 사회단체에서 하는 구제와 기독교의 구제는 영적 원리가 다릅니다.

두 번째로 그 은혜를 누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와 같은 인생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복을 나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공동체들이 하는 구제가 성경의 구제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즉, 구제를 해봐야 소용없다면서 끊어버리거나 구제를 안 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구제가 필요한 곳이 그러한 곳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구제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동기가 바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와 같은 전제 조건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기대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도와봐야 보람이 없는 바로 그런 곳에 다가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속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 공동체만큼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습니다. 어줍지 않게 세상의 경영 논리를 교회에 가지고 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사고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보이지 않는 가치는 신비성입니다. 교회는 참 신비스러운 곳입니다. 저렇게 해서 될까 싶은데 신기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시선을 가게 만듭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게 만듭니다. 저도 구제나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속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철저하게 검증하면 좋겠지만 인간이 작정하고 속이려고 덤비면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 마나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속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설령 속아서 구제를 했더라도 그 중심은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이는 사람들이 나쁜 것입니다. 속더라도 구제는 해야 합니다. 도와주고 배려해 줘서 격려와 용기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내가 이러려고 저 사람을 도와주었나’ 하는 좌절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해야 합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세 가지를 십일조를 통해서 이해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도록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둘째,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우리와 방불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에게 베풀어지고 흘러가야 됩니다. 이것이 신자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삶의 명령이자 교회 공동체를 향한 역사적 과제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할아버지가 어느 고아원에 정기적으로 봉사를 하고 구제를 하다가 돌아가시면 그 봉사와 구제와 헌신은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습니다. 나는 죽고 떠나지만 이 일은 너희가 계속해야 한다는 정신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는 통장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눠 주는 일에 순종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네 손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돈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 일에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바른 순서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이 예배를 마치고 삶의 예배로 떠납니다. 그 삶의 예배 현장에서 이와 같은 순종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광으로 올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송태근 삼일교회 담임목사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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