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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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10월호예배 헌금과 관련된 5가지 이슈 예배 갱신, 교회 회복

신앙생활을 하면서 헌금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슈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서 헌금의 정의를 살펴보고, 헌금 관련 이슈들을 몇 가지 선별하여 논의함으로써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헌금과 관련하여 조금 더 폭넓은 자유함을 주고자 한다. 먼저 분명하게 밝히고 싶은 사실은 필자는 십일조를 비롯한 주요 헌금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준행해야 하는 성경적 의무라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쳐야만 하는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심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처음 세대부터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 함을 가르치셨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만 한다는 전통은 강력하게 이어진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바치는 행위’를 강조하셨을까? 그 이유는 단순분명하다. 바로 인간의 존재 기반과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헌금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고백이다. 즉 헌금은 ‘전부를 바친다’라는 의미이자 신앙고백이다. 그렇기에 헌금은 예배에서 뺄 수 없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다(벧전 4:11). 브라이언트와 브런슨은 “사람은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사람은 예배하기 위해 구원받았다”1라고 선언했다. 또한 맥아더는 예배를 “하나님께 하나님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최고의 가치를 진술하고 주장하는 것”2이라고 했다. 이러한 의미의 예배에서 필수적 요소 중 하나가 헌금이다. 우리가 헌금을 예배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음은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바침’이고 이 바침의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헌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의 본질이 의식이나 헌금(제물)에 있지 않음은 당연하다(요 4:21-24). 아무리 풍성한 헌금을 드린다 해도, 아무리 웅장한 예식이 있다 하더라도 참여하는 이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 예배는 분명 무의미하다(말 1:7-10). 맥아더는 말하기를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소나 예배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 자세이다. 예배에 걸맞은 예배는 훌륭한 외형적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자의 심정이 간절하고 그 마음이 진리로 가득 찰 때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3라고 했다. 진실로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마음이 구체적인 바침의 행동으로 표출되어야만 하고 그 구체적인 바침의 표현이 헌금이라는 점에서,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필수적인 요소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배 헌금과 관련된 이슈들

1. 명칭과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를 바치는 데 사용된 성경 내의 용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헌금’이란 용어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오직 세 사건을 묘사할 때만 사용되었으며(민 31:50; 대하 34:9; 눅 21:1), 그 의미는 ‘선물’ 혹은 ‘바치는 물건’(gift, offering)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놀랍게도 이 용어가 오늘날과는 달리 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봉헌’ 혹은 ‘봉헌물’이란 용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만 12회 사용된 용어인데 히브리어 ‘고르반’의 번역이다. 봉헌(奉獻)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제물, 돈, 물건을) 바침”이다.

마지막으로 ‘연보’라는 용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만 8회 사용된 용어인데, 모두가 구제를 목적으로 모인 돈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연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부조’(행 11:29; 12:25) 혹은 ‘성도 섬기는 일’(고후 8:4; 9:1, 12, 13)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상의 세 표현 중에서 의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봉헌’이란 표현이 합당할 것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헌금’이라 함이 가장 손쉬운 표현이 될 것이며, 목적이나 용도를 고려한다면 ‘연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필자는 ‘봉헌’이 예배와 연관시킬 때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교회가 이 용어를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헌금’이란 용어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기에 굳이 용어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보며, 따라서 본고에서는 ‘헌금’이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할 것이다.

2. 헌금에 관한 가르침(설교)에 관련하여
오늘날 많은 목회자나 교회가 헌금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오래전 통계로 기억되지만, 미국 교회 90%의 목회자들이 헌금 설교를 회피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헌금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것이 ‘깨끗하고 바른 목회’ 혹은 ‘의식 있는 목회’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과연 성경적인가는 심각하게 짚어 보아야 한다.

왜 목회자들이 헌금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나 강조를 회피하는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금(돈)을 이야기하지 않아야만 깨끗하고 영적인 목회자라는 편견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 목사님은 돈을 좋아한다”라는 등의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사실 바울은 이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자비량 목회자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회자 자신이 헌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목회자의 일신상의 유익함이나 편리함 때문에 헌금에 관하여 담대히 가르치지 못한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목회자의 모습은 결단코 성경적이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보다 성경에 집중해야 한다. 성경이 헌금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강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목회자가 성경의 가르침을 선포해야 하는 의무에서 제외될 명분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에게 돈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다(마 19장). 물론 목회자가 자신의 물질적 탐욕을 위해 헌금을 강조하거나 교회 재정의 규모를 확장함으로 자신의 명예와 성취욕, 혹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떳떳치 못하다. 

헌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의 사명이다. 헌금에 대한 바른 교훈을 성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유기다. 목회자가 헌금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것도 죄지만, 헌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잘못이다. 복음만 잘 전하면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헌금할 것이라는 주장은 난센스다. 분명한 가르침이 없어도 바른 헌금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곤란한 일을 회피하려는 자세일 뿐이다. 물론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헌금에 관하여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설교의 내용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 설교자는 불쌍한 설교자다”라고. “헌금은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헌금의 양(量)과 관련하여
예배 행위로서의 헌금에서 성도는 자신의 수입 중에 어느 정도의 양을 드려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구약에서는 세 종류의 십일조를 바쳐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을 합치면 23.3%에 달한다고 한다. 신약에서는 헌금의 액수와 분량에서 정해진 규정이 없다. 다만 헌금하는 자세와 마음을 강조할 뿐이다. 자발적으로(행 11:29; 고후 9:7), 수입에 따라(고전 16:2), 마음에 정한대로(고후 9:7), 힘에 지나도록(고후 8:3) 헌금하라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이다.

정리하면 헌금의 양은 ‘바치는 자의 자원에 의해, 능력에 맞게, 힘닿는 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과 자세를 당연히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원하시는 헌금의 분량은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이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형편에 맞는 제물을 바라신다. 그렇기에 구약 시대 제물의 종류가 값비싼 소부터 시작하여 값싼 참새, 그리고 밀가루 한 줌까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배자가 빈손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출 23:15; 34:20; 신 16:16).

그러면 어느 정도가 자기 힘닿는 대로 드리는 헌금의 양인가? 숫자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자기가 지닌 물질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일 뿐이다. 즉 자기 자신이 헌금의 양을 결정하는 자율적 시스템이다. 다만, 인간의 탐욕이 그러한 자율적 기준을 규정하는 데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최소한의 기준인 십일조 헌금 제도를 만드셨다고 생각된다.

어떤 이는 빚을 내거나 가불을 하여 헌금한다. 어떤 이는 자기 식솔의 호구지책도 외면한 채 과도한 헌금을 한다. 어떤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액수를 헌금으로 약정한다. 어떤 이는 국가에 납부에 해야 할 세금을 헌금한다는 명목으로 탈세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투기를 통해 얻은 수익의 상당 부분을 감사 예물로 바친다.

이러한 헌금들이 과연 바른 정신의 헌금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단연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헌금이다. 그러한 헌금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독하게 오해한 행위로서 예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이러한 헌금자들을 믿음이 좋은 성도라고, 복 받은 성도라고 치켜세운다는 것이다.

4. 헌금과 관련된 형식들에 관하여
헌금의 형식적 측면에서 많은 이슈가 예배 현장에 실재한다. 그중 4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헌금을 유기명으로 해야 하느냐 아니면 무기명으로 해야 하느냐다. 즉, 예배 중에 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호명하고, 기도 제목 혹은 감사 내용을 조목조목 밝히고, 주보에 헌금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전통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들은 원래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부작용이 부각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무명의 헌금자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금액까지 기록된 유명의 헌금자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헌금 시 예배실 입구의 헌금함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예배 도중 헌금 위원이 돌리는 헌금통을 사용하느냐다. 두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다. 부정적인 면에서만 보면, 헌금통을 사용할 경우 헌금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으며, 헌금함을 사용할 경우 인간의 탐욕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하여 헌금에 소홀할 수 있다.

물론 필자는 헌금통을 사용할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헌금이 예배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헌금하는 시간이 예배에 포함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예배에는 바치는 행위나 바침을 위한 가치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있다. 할 수만 있으면 예배자들이 예배 중에 직접 헌금함에 넣는, 즉 헌금함의 의미와 헌금통의 의미를 통합하는 형식을 취하면 좋겠다. 실제로 중남미 교회들은 이러한 방식의 헌금 형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에서 교회의 규모가 큰 교회에서는 현실적으로 실행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셋째, 한국 교회의 셀 수 없이 많은 헌금의 종류에 관한 것이다. 어떤 실천신학자의 강의안을 보았더니 우리나라에는 약 85가지의 헌금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수많은 종류의 헌금에 대하여, 마치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금의 종류 개발에 전력하고 있다는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헌금의 종류와 관련하여 성경이 어떤 원리나 기준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넷째, 과연 헌금을 자동이체를 통하거나, 또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신용카드 결제 혹은 현금 대신 전자 화폐, 포인트 등으로 할 수 있느냐다. 이 질문은 교회가 조만간 직면하게 될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분명 온라인 헌금이 보편화될 수 있고, 헌금 시간에 신용카드 결제 단말기를 헌금통 대신에 들고 다니는 헌금 위원이 등장할 수 있고, 각종 포인트나 전자 화폐, 그리고 개인의 신용이 헌금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을 교회가 직면할 수 있다.

더군다나 4차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해 교회가 온라인 공동체화 될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전통적 교회 모습에 대한 많은 도전과 더불어 새로운 교회 형태들이 자리 잡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헌금의 형태도 다양화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러한 현상을 두려워하거나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대처해 가야 할 것이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바치느냐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 바치는 것들이 농산물, 짐승, 물건, 기술, 그리고 돈 등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이 시대에 통용될 헌금의 도구와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교회가 수용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헌금이 예배의 일환이고 공동체적 행위라는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모인 한 예배 장소에서 준비해 온 예물을 예배 중에 직접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논의한 몇 가지 이슈들은 실제로 사실은 헌금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형식적인 측면의 논란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문제들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라기보다는 목회자의 목회 철학과 교회의 합의에 의한 선택의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헌금의 ‘원리’를 주셨을 뿐 그 원리의 구체적인 ‘적용’이나 ‘방법’은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 놓으셨다. 따라서 교회는 그 ‘원리’ 위에서, 다만 교회가 처한 시대와 현장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한 가지 기준, 즉 ‘덕’을 고려하여 합당한 형식과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사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어 왔다. 지상 교회는 지금까지 헌금의 형식과 제도 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해 왔다. 물론 어떤 형식을 선택한다 해도 인간의 선택에는 완벽함이 없기 때문에 장점과 단점, 유익함과 무익함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헌금과 관련하여 형식을 결정할 주체는 교회다. 교회가 헌금자의 이름을 밝히든 밝히지 않든, 헌금통을 사용하든 헌금함을 사용하든, 그리고 어떤 헌금 종류를 만들어 시행하든, 그것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교회다. 그것들은 본질이라기보다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무기명 헌금을 시행하고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교회와 성경적인 교회 혹은 깨끗한 교회와는 실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회를 세상은 성경적인 교회, 신령한 교회, 의식 있는 교회, 그리고 깨끗한 교회로 여기려 한다는 오늘날을 세태를 교회는 반성의 마음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교회는 헌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

성도들이 바친 헌금을 교회는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 헌금이 예배의 본질을 드러내는 한 행위라고 한다면, 헌금의 사용 역시 계속되는 예배의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헌금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단지 “교인들에게 돈을 거두어서 교회라는 단체를 운영”하는 데 급급하게 된다. 결국 합리주의와 세속의 경영 원리에 의해서만 헌금이 집행되게 된다. 

헌금을 사용하는 교회의 자세는 구약 시대의 ‘응식’(應食, 레 10:13-15, 개역개정에는 ‘소득’이라 번역되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응식은 화목제로 드린 예물을 하나님께서 다시 제사장들에게 주신 것으로서 제사장은 그것을 식솔이나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마찬가지로 헌금은 성도가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교회에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잔치를 벌이는 응식이다. 헌금의 사용을 응식으로 여기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창 50:24; 삼상 1:11; 벧전 5:7). 즉, 헌금의 사용 용도를 하나님께서 직접 결정하시고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가 헌금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며, 그 뜻을 알기 위해 고민하고 몸부림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사람의 꾀와 지혜로, 적은 식견으로 헌금 사용을 결정할 때 그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간다. 마가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사건은 헌금을 사용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300데나리온 가치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사건 역시 교회가 헌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원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말씀들은 헌금이 가시적 결과를 중시하는 합리성이나 세속의 경영 원리에만 의존하여 집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실제로 성경에서 헌금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구약에서는 성막과 성전을 건축하는 데(출 25장),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신 18:1-5),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신 14:28-29; 15:11; 16:11)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목회자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데(고전 9:5-8)와 구제(행 6장; 고후 9장; 약 2:15-16; 히 13:16; 갈 6:10) 및 선교 후원(빌 4:16)에 쓰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헌금이 사용되어야 할 영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지역 교회가 유지되고 보존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지하고 확장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금의 사용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하나의 이슈는 헌금을 교회에 드리지 않고 개인이 집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최근 어느 교회에서 헌금 없는 주일예배를 선포했다. 특정한 주일에 헌금을 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에 성도 각자가 헌금의 집행자가 되어 그것을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신선해 보이는 시도였고, 그래서 세상의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사건이 두 가지 면에서 불편했다. 첫째는 헌금이 예배의 필수 요소라는 점에서 헌금 없는 예배가 예배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둘째는 헌금의 집행자는 교회이어야만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4 헌금은 교회에 바치기 때문에 헌금이다. 유사 교회나 자선 단체에 개인적인 후원을 하는 것은 헌금이라 하지 않는다. 

간혹 목회 현장에서 발견되는 상황인데, 교회에서 헌금 사용이 때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반발 혹은 압력의 수단으로 헌금하는 것을 유보한다거나 교회가 아닌 자선단체나 선교단체에 보내는 자들이 있다. 즉 스스로가 자신의 헌금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헌금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집행은 교회만이 할 수 있다. 정녕 교회가 헌금에 대해서 신실한 집행을 하지 못하고 오용하고 있다는 양심적 판단이 든다면, 자신의 헌금을 스스로 집행하기보다는, 헌금하기에 합당한 다른 교회를 찾는 것이 보다 성경적이라 하겠다. 교회만이 헌금의 집행기관이 될 수 있다.   

맺는 말

다시 한번, 헌금은 예배의 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반복되는 언약 갱신을 의미한다. 언약은 쌍방이 주고받는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일부를 다시 돌려 드리는 헌금은 언약을 갱신하는 데 필수적인 예물이다. 우리가 예배를 폐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헌금을 폐기할 수 없으며, 헌금 자체의 유무를 우리의 선택 영역에 넣을 수 없다. 물론 돈이 관련되기에 인간의 탐욕을 비롯하여 많은 이슈가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혜롭게 성경적 원리와 교회의 덕을 고려하여 이 시대에 가장 합당한 헌금 제도를 창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교회가 회원에게 회비를 걷어 단체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헌금을 취급한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하나님을 팔아 돈을 모으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헌금 사용에서 투명성 확보와 공공성의 재고가 필요하다. 헌금은 예배 행위다. 



1) James W. Bryant and Mac Brunson, The New Guidebook for Pastors (Nashville: B & H Publishing Group, 2007). p.96.
2) 존 맥아더,《목회 사역의 재발견》 서원교 옮김,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1), p.365.
3) 존 맥아더, 앞의 책, p.353.
4) 지면의 제한이 있어 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논리 전개는 생략한다. Jack B. Scott의 Putting Your Money Where Your Hearts is: A study in Biblical stewardship을 참고하라. 

양현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 서던침례신학대학교(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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