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신학·설교 2018년  10월호용서에 관한 세 복음서의 가르침 권연경 교수의 네 개의 복음서에서 한 분 예수님 만나기(26)

용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다. 사실상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았던 바울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중심인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용서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용서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 고백문인 사도신경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사도신경 자체는 기독론에 집중된 고백문이다. 그래서 다른 주제들, 심지어 성부와 성령에 대해서도 간단한 한마디 고백으로 끝난다(“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성령을 믿사오며”). 하지만 그런 중에도 용서에 대한 고백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현대어로 된 새로운 번역에서는 “죄를 용서받는 것과” 라고 옮겼다.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의 한글 번역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에 국한해 해석했기 때문이다. 영어 번역에서 보는 것처럼, 본래 사도신경의 표현은 “죄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를 믿습니다”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가 당연히 우선이지만, 이 고백의 열린 표현 속에는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것 또한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다음에 “죄의 용서”가 나온다는 사실은 이런 해석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준다. 현실적으로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데는 서로를 향한 용서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서로를 향한 공동체적 용서는 하나님에 의한 용서만큼이나 중요한 주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담은 복음서에서도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1

“Human is to err, divine to forgive”라는 영어 속담이 말해 주듯, 본래 용서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다. 물론 이는 예수님 당시 고대 유대교의 상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통 신학의 선을 넘어 당시의 신앙적, 신학적 지도자들을 분노케 했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하나님뿐 아니라 ‘인자’인 자신 또한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셨다는 주장이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과 버금가는 존재로 내세우는,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신 것이다(막 2:7). 적어도 당시 정통 신학자들의 눈에는 그랬다. 치유의 능력에 놀랐던 대중은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능력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막 2:12), 그 행위의 신학적 함의에 민감했던 신학자들은 예수의 도발적 움직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죄 용서의 권한에 대한 예수의 주장은 메시아로서의 자기 주장을 넘어,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을 위한 행동 원리로 확장된다. 죄 용서는 하나님이 참회하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용서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백성이 서로 실천해야 할 관계의 원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의 분위기를 또 한걸음 넘어간다. 서로를 향한 용서의 필요성을 반복해 강조하셨던 사실 역시 이 가르침이 그만큼 도발적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 사람의 용서 - 마가복음(11:25)

마가복음은 용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지만, 믿음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용서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사실에 놀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우신다(11:22).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조차 가능하게 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23). 이 믿음의 기도에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든 기도하며 요청하는 것은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11:24). 믿음의 위력, 아니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이처럼 확실한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 해서, 우리가 그분을 알라딘의 ‘지니’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하고 요청할 수 있지만, 이 기도가 창조주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노래할 수 있지만, 언약 관계 속에서 우리가 지닌 책임조차 팽개칠 수는 없는 것이다. 용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25절의 첨언은 바로 이 사실을 전제한다(“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일견 문맥을 벗어나는 첨언처럼 보이지만, 참된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앞선 말씀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25절의 말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선행(先行)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서로를 향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응답된 것으로 믿을 수 있지만,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은 결코 우리 욕망의 날개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우리의 기도에 한 가지 전제를 단다. 곧 “누구에게라도 억한 마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하라”라는 것이다. 이 조건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요식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향한 용서의 여부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실질적 관건으로 작용한다. 서로를 향한 수평적 용서가 명령의 핵심이고, 여기에 “너희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위로부터의 용서는 그 선제적 용서의 필연적 결과로 제시된다. “그래야(헬, 히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11:25). 한 마디지만, 더없이 강력하다. 말수가 적다고, 생각이 희미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용서, 하나님의 용서 - 마태복음(6:12, 14-15)

마태복음은 용서에 관한 이 결정적 통찰이 보다 상세하게 제시된다. 사실 용서와 관련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 주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위에 언급한 마가복음의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3-14절과 상응한다.2 물론 이 두 구절 바로 앞에는 그 유명한 주기도문이 나온다. 용서에 관한 강력한 경고가 주기도문에 바로 이어 등장한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도 용서가 사실상 중심 주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많은 이들이 내심 불편해 하는 바로 그 기도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하나님의 용서를 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과거형 동사가 말해 주듯,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시점은 이미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난 후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처럼 우리의 죄도 용서하여 주십시오.”

바로 이 점에서 제자들의 기도는 색다르다. 하나님의 용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의도는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삶의 실천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조건이 불편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입에 쓴 말씀이 달콤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조건을 지운다. 성경 말씀을 진짜 지울 수는 없으니, 대신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물론 노래 가사에는 우리가 불편해 하는 대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은 그만큼 부풀려진다. 

[…]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이게 용서에 관한 노랫말의 전부다.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것처럼”이라는 불편한 조건은 아예 삭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 때는 우리들의 ‘큰’ 죄를 ‘다’ 용서해 달라고 부풀린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리고 노래를 만든 분도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노래의 가사는 예수님의 핵심 의도를 지워버린 위험한 오독을 낳고 말았다.
이런 식의 회피는 우리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도 그런 유혹은 익숙했다. 주기도문이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두 개의 날이 선 경고는 바로 그런 보편적 불편함을 전제한다(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겠지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들끼리의 용서를 전제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뒤바꾸지 않은 한, 이 결론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14절의 약속만으로 살고 싶지만, 실제 우리에게는 15절의 날선 경고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 삶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용서의 은총(마 18장)

하지만 이런 경고의 말씀을 ‘교리적 원칙’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서로를 용서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용서를 위한 ‘조건’처럼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실천하는 상호 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끌어내는 마중물이 아니라, 이미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젖어가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제적 용서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적셔야 한다는 것, 곧 우리가 받은 은총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다. 그리고 이 요구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요구이다.

마태복음 18장의 비유가 이를 잘 말해 준다(21-35절). 이 ‘살벌한’ 비유에는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한 종이 등장한다. 당시 남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정도다. 그리고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사실 한 개인이 빚을 지기에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금액이다. 만약 누군가 그런 빚을 졌다면, 그건 무슨 수를 써도 갚을 수 없다. 그게 일만 달란트의 포인트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앞에 무너진 종이 불쌍해서, 임금님은 그 엄청난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 준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임금님의 너그러운 용서를 선명하게 보여 준 후, 용서의 은총을 입은 종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 이후의 행적이 궁금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슬프게도 일만 달란트 빚의 용서라는 무한 은혜를 맛 본 이 종은 다른 동료가 자신에게 진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 한없이 낮아져 간청하는 동료의 애절한 고통에 눈을 감은 채, 돈을 갚지 못한 동료를 함부로 대하고 결국 그 빚을 갚을 때까지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동이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채권자로서 당연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종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은총은 이후 그의 삶을 규제하는 새로운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 위로부터의 용서를 경험한 이후의 삶은 그에게 주어진 그 은총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용서의 은총 속에 담긴 왕의 거룩한 뜻이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너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18:33).

하나님의 은혜 속에 담긴 뜻에 순종하지 않고서도 계속 그 은총을 누릴 묘수는 없다. 용서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총은 그냥 먹고 끝이 아니라, 그 이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새로운 행동의 준칙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너그러운 용서를 누린 것처럼, 우리 역시 너그러운 용서로 이웃을 대하라는 준엄한 요구다. 우리가 그 요구를 무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무시하는 셈이 된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심판의 ‘분노’다(18:34). 그것은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 심판이다(18:34). 애초부터 은혜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이라는 말로 다가온다. 그래서 은혜는 동시에 변화된 삶을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은 주기도문에서의 요구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어진 경고를 그대로 반복한다. “너희 각자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마태복음 18장의 이 비유는 용서의 한계에 관한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18:21). “용서하라”는 말씀은 선명하다. 하지만 그 용서의 한계는 어디일까? 우리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 

통 큰 마음으로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할까? 어쩌면 베드로는 이 ‘일곱 번’이라는 숫자로 일상의 한계를 넘는 비현실적 상황을 의도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은 베드로의 그 물음조차 우문으로 만든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18:22). 용서는 한계가 없어야 하며, 아무리 통 크게라도 울타리를 칠 수는 없다. 은혜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던 것처럼, 그 은혜가 우리의 삶에 흘러넘치는 것 역시 한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롬 5:2), 그리고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롬 5:21; 6:14-15).

용서를 가르치는 주님의 기도 - 누가복음(11:4)

용서에 관한 마태복음의 가르침은 누가복음에서도 그 나름의 방식대로 고스란히 나타난다. 우선 주기도문의 경우가 그렇다. 마태복음과 달리, 다소 간략하게 기록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예수의 선제적 가르침 속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배운 기도문을 외는 것이 부러웠던 제자들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요구했던 것이다(11:1).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비해 간략하지만, 용서에 관한 가르침은 사실상 마태복음과 동일하다.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근거로 제시된 것은 그대로다. 마태복음은 이미 용서를 하고 난 상황에서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는 반면, 누가복음은 지금도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현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 반면, 우리에게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용서할 때 나름의 조건과 제한을 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마음에 드는 일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용서하니까,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아 우리의 허물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다. 마태복음처럼 용서를 기정사실로 전제하든, 누가복음처럼 그 대상을 무한으로 설정하든, 용서에 대한 요구의 절대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용서에 대한 신적 요구의 절대성은 마태복음 18장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 17:1-10에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예수는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의 치명적 위험에 관해 경고하신 후, 죄를 대하는 기본 원칙을 간략하게 제시하신다. “만일 너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경고하라. 그리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17:3; 참고 마 18:15). 

하지만 누가복음과 달리, 용서의 한계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없이 예수의 말씀이 이어진다. 마태복음에서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하는 말로 바뀐다. 용서의 무제한성을 누가 나름의 방식으로 나타낸 셈이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합니다’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17:4). 

하루에 일곱 번이라면 범죄자의 의도가 뻔히 엿보인다. 어차피 용서할 걸 알고 계획적으로 ‘해 먹는’ 상황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독심술은 제자들의 몫이 아니다. 아무리 자주 죄를 지었든, 다시 돌아와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순간 제자들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는 제자들(“사도들”)의 요청은 바로 그런 용서의 힘겨움을 파악한 결과일 것이다(17:5).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믿음이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겨자씨 한 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진다(17:6). 오히려 믿음의 핵심은 용서를 명령하는 분이 우리들의 주인님(주님)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주님과 우리 사이는 무조건적 복종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관계임을 명심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용서받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도, 용서의 한계에 대한 계산도,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명령하셨고, 우리는 매 순간 그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드러내는 행동을 그대로 본받아 우리에게 되갚아 주신다.

이처럼 가르침의 내용상 별 차이가 없지만, 용서를 강조하는 어조는 사뭇 다르다. 마태복음이 엄중한 경고로 기운다면, 누가복음의 어조는 긍정적인 격려와 권고의 분위기가 보다 강하다. 마태복음 6:14의 긍정적 말씀은 누가복음에도 그대로 나오지만, 6:15과 같은 살벌한 경고는 누가복음에서 찾을 수 없다. 물론 이는 두 복음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흥미로운 본문이 심판하지 말라는 누가복음 6:37-42의 말씀이다. 이 구절과 병행되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는 경고의 어조가 지배적이다. 제자들이 서로를 심판하면 하나님도 심판하실 것이다. 이 경고의 엄중함은 ‘계량’ 이미지를 통해 보다 강력해진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바로 그 되로 너희들에게 되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의 분위기는 사뭇 긍정적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핵심 논점은 동일하지만, 그 다음 말씀은 시종일관 긍정적 상황에 국한된다.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절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정죄하지 말아라. 그러면 절대 정죄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3

누가는 이 말씀을 용서에 관한 말씀과 연결한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직역하면 (채무에서) “놓아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놓여날 것이다” 하는 말이 되겠지만, 실제 채무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 상황에서는 사실상 “용서하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누가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심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의 책임에서 놓아 준다는 것, 결국 용서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 역시 죄의 책임에서 놓여날 것이다. 바로 이 긍정적 약속을 확실하게 하는 차원에서 ‘계량’의 그림이 등장한다. “너희가 되어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과 동일하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이 경고였다면, 누가복음에서는 힘을 북돋아 주는 격려의 수단이다. 그래서 그림도 사뭇 달라진다. 실제 하나님의 보상은 우리의 서툰 순종과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순종보다 훨씬 더 큰 보상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되로 우리에게 되어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 되를 사용하시는 방식은 남다르다. 곡식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담기도록 “꼭꼭 누르고, 흔들어” 담으실 것이고, 그렇게 하고서도 곡식이 “흘러넘치는 상태로” 돌려 주실 것이다. 그것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품속에” 직접 갖다 안겨 주실 것이다(6:38). 하나님이 엄하심 만큼이나 그 분의 너그러우심을 강조하는, 누가복음 특유의 움직임인 셈이다.

각자의 서술 방식에 따라 표현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개의 공관복음서들은 용서에 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낸다. 마가의 간단하지만 선명한 가르침이 마태복음에서는 보다 긴 설명으로 보충된다. 그 보충의 어조는 대개 엄중한 경고다. 누가복음은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동일한 가르침을 풀어간다. 

어느 경우든, 용서의 무게는 분명하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마땅한 열매이자, 용서의 은총 속에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개신교적 정서에서는 더없이 불편한 대목이겠지만,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자신의 삶은 바로 그게 정답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우리 신앙이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시려는, 그리하여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목회적 논리’인 셈이다. 



1) 거의 전적으로 기독론적 주제에 집중하는 요한복음에는 제자들 상호간의 용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용서에 관한 유일한 말씀이 부활 후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주어지지만, 이는 서로 간의 용서에 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떠나시는 예수의 뒤를 이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도들의 권위에 관한 말씀에 해당한다(요 20:21-23; 참고 마 18:18-20). 고별강화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형제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죄 용서라는 구체적 상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2)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의 14절 부분이 없다. 어떤 사본에는 마태복음의 14절과 같은 말씀이 마가복음의 26절로 들어가 있지만, 이는 마가복음을 마태복음과 조화시키려 했던 후대 필사자의 손길임이 거의 확실하다. 장절을 처음 나눌 때 사용했던 사본에는 26절이 있지만, 이후 원문이 아닌 것이 확실해 그 절을 삭제했다. 하지만 이미 정착된 절 번호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대로 26절은 “없음”하고 영구 결번으로 남겨두었다. 우리 성경에 “없음” 하고 나오는 구절들이 다 그런 사례들이다.
3) 두 개의 부정어와 가정법 동사가 결합된, 매우 강한 선언이다.

권연경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신약학). 런던 킹스칼리지(Ph.D.). 저서로 《로마서 산책》,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목회와 신학

10월의 주요기사

추천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