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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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2018년  10월호폭력적인 하나님, 폭력적인 교회? 변증서가(1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폭력성을 맹비난하면서 무차별로 기독교를 공격해 오는 고교생과 씨름한 적이 있다. 그는 성경의 문맥은 배제하고 표면적인 사건과 서술들만 선정적으로 뽑아 사례로 들었다. 그중에서도 엘리사의 기도로 암곰들이 나타나 아이들을 찢었다는 이야기(왕하 2:23-25)는 구약의 하나님이 얼마나 변태적으로 폭력적인지를 비난하는 한국의 안티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골 메뉴다.

“말을 안 들어서 엽기적인 연쇄 살인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치졸한 예수쟁이들이라니. 애들 다 죽었는데 뭘 가르쳐? 어린애들에게 조차도 끗발이 안 서는 야훼구먼.”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지금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런 부류의 비난에는 구약의 하나님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폭력적인 행위를 그분의 포악한 성품과 동일시하려는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런 분위기는 교회 바깥에서만 감지되는 게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나는 수년에 걸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 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9)고 말한다.

구약 하나님은 아이들도 죽이는 과대망상적 불한당?

이 책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평판이 좋지 않다”는 데 대한 강력한 이의 제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요즘 대중이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가진 왜곡된 이미지와 부정적인 편견을 놓고 조목조목 성경의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특히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신이라고 오해하는 문제를 집중 조명하면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신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조화시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갖는 공통점들도 다루지만, 이 글에서는 교회 바깥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구약의 하나님의 폭력성과 차별적 성향에 대한 이슈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변증 전도의 방향도 함께 짚어 보고자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허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불쾌한 인물이다. 공공연하게 질투하며, 옹졸하고, 부당하고, 용서를 모르는 권위적 인물인데다, 복수심이 강하고, 피에 굶주린 종족 말살자이며, 여자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영아를 살해하고, 심지어 자식까지도 살해하는 인물이다. 그뿐 아니라 역병을 일으키며, 과대망상적이고,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자이고, 예측할 수 없는 악의적 불한당이다”(p.12).

이 책에서 저자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책 《만들어진 신》에 담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악의적 묘사를 소개하면서 이런 오해는 성경에서 자신들이 보려는 부분만 보고 전체 문맥을 무시한 탓이라고 꼬집는다(p.14). 따라서 엘리사와 암곰 사건 역시 성경의 전후 문맥과 정황 속에서 잘 들여다보면 쉽게 오해받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구약 본문에서 엘리사 선지자를 대머리라고 놀린 ‘작은 아이들’(왕하 2:23)은 원문에 보면 ‘청소년’ 또는 ‘10대 후반’을 뜻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어린아이들이 돌보는 사람 없이 들에서 떼 지어 논다는 추정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10대라면 마을을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미취학 아동들이 악의 없이 놀린 것이 아니라 10대 무리가 심각하게 조롱한 것이다”(p.115).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방어를 했고, 성경은 암곰 둘이 그들을 공격해 ‘다 죽였다’라고 명시하지 않고 많은 수의 젊은이들 중 42명만을 ‘찢었다’(왕하 2:24)라고 했다. 예언자들이 자주 조롱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엘리사의 생명을 보호하셔서 그가 긍휼 사역을 계속하길 원하신 하나님의 조처는 정당하다는 저자의 시각은 합당하다(p.118).

그러나 이 본문의 상황과 달리 성경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남녀노소 없이 여리고 사람들을 죽였다는 대목이 나온다(수 6:21). 물론 이렇게 유별난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특별 계시를 완성하기 위한 일회적 사건만으로 제한되고, 진술의 양식 또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사용되던 전쟁 스토리의 형식을 따라 수사적 과장법을 동원한 점, 곧 ‘여호와의 전쟁’에서 온전한 승전을 거두는 일의 영적 중요성을 고취시켰다는 점이 고려된다 하더라도 이 대목이 역사적 사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 변증 차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답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어린아이들이 타락한 가나안 땅의 문화에 오염되기 전에 죽임을 당한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구원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생이 전부라고 믿는 무신론자들에게나 가혹하게 느껴질 뿐, 죽음이 곧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역설은 지금도 불의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아이들의 무고한 죽음에 적용될 만한 변증적 대응 논리다.

구약 하나님의 평판이 안 좋은 6가지 이유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부당하게 행하시는 것으로 오해받는 대표적인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과연 정당한가를 추적하며 일일이 반박한다. 이 책의 주된 내용으로 보편적인 대응 논리들을 담고 있는 만큼, 변증 전도 현장에서 유용한 참고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핵심만 요약해 본다.

첫째, 하나님은 진노하길 좋아하시는 괴팍한 존재인가? 구약성경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진노는 주로 학대와 폭력, 불의에 대한 합리적인 진노다. 그렇게 진노하실 만큼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셔서 그 관계를 상징하는 언약궤에 무례를 범치 못하도록 웃사의 죽음으로 경고 메시지를 발하셨다(삼하 6:1-8). 하나님은 관계를 깨는 일이나 불의에 진노하시지만,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종 노릇하게 한 400년 역시 가나안 땅의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오랜 인내의 기간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남자를 편애하는 성차별주의자인가?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여자를 남자보다 나중에 창조하시거나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하신 것도 여자가 열등해서가 아니다. 돕는 자는 종속적인 조력자나 종이 아니라, 동반자이며 영혼의 벗이다. 타락 이후 남자가 여자를 다스릴 것이란 말씀도 결혼한 여자에게만 국한된다. 그 의미 또한 일방적인 억압이 아니라 복종을 뜻하며 신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복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타락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더 큰 저주와 함께 아무런 긍정적 약속도 못 받은 반면 여자는 메시아의 약속을 받았다. 롯이 딸들을 소돔 사람들이 강간하도록 내어 주려 한 대목은 성경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건이다. 지금 우리에게 성차별로 보이는 율법도 실제로는 구약 시대의 고대 근동 지역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하나님은 선민만 중시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인가? 하나님이 인종차별주의자란 오해는 19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에서 노아가 함을 저주한 본문을 노예 제도를 지지하기 위해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나 함의 모든 아들이 아니라 가나안뿐이었다(창 9:24-27). 함의 두 아들 구스와 애굽(미스라임)만 아프리카와 관련된다. 노아의 가나안 저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과 충돌할 것을 예시할 뿐 다른 어떤 맥락에서도 노예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이 노예 제도를 허용하긴 했지만, 노예 제도에 관한 성경의 입장은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구속으로 향하는 진보적인 것으로 출애굽 사건이 그 증거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종족 살해도 인종 청소가 아니라 조상의 땅을 되찾으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쫓아내려는 데 초점이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실 그 땅을 통해 열방에 구원의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관련된다. 가나안 종족의 진멸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고, 하나님은 훗날 자기 백성 이스라엘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쫓아내셨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넷째, 하나님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존재인가? 이스라엘 율법에서 살인뿐만 아니라 강간과 유괴도 사형에 처한 것은 당시 광야 생활 중이던 이스라엘에서 여자들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로써 타당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받은 대로 똑같이 돌려 주는 동해보복법 역시 복수를 제한하고 범죄에 대한 편중된 처벌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관습으로 볼 때 폭력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을 벌하시거나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한 처벌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셨을 뿐,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안에서와 이스라엘과 이웃 나라 사이에 평강을 돈독히 하셨다.

다섯째, 하나님은 까다로운 율법주의자인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린 첫 명령은 “성관계를 많이 갖고 많이 먹어라”는 것이었다(창 1:28).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의 선하심과 선물로 주신 성과 음식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를 바라시는 관대하고 율법적이지 않은 분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선하지 않다고 속여 타락하게 만들었다. 유혹과 죄는 하나님 명령의 선하심을 문제로 삼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쉬라는 명령을 포함해 인간을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시켜 복을 주시고 자신과의 더 깊은 교제의 관계로 들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선하심, 은혜로우심이 모든 율법의 토대다. 

여섯째, 하나님은 고집불통의 완고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동시에 막상 자비를 나타내셔야 할 때는 유연성이 있으시다. 변함없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구약성경 본문은 네 군데지만,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본문은 여러 곳이다. 인간의 중재에 반응해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경우처럼(왕하 20:1-6) 대체로 자기 백성에게 긍휼을 보이시는 문맥에서다. 하나님의 가변성과 불변성을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변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조직신학이 성경과 충돌할 때 수정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조직신학이다. 문맥에 주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수, 신구약 하나님의 정확한 이미지

모든 종류의 불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에 대한 의심’에서 싹튼다.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느냐가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가 핵심인, 한 사람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오해가 풀리지 않아 비신자들이 여전히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존 신자들이 끝내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심상치 않게 일어난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교회 안에서 성경을 오해하는 것도 하나님의 본래 이미지에 심각한 왜곡을 일으킬 수 있다. 노예 제도에 대한 옹호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재판, 심지어 반유대주의처럼 교회가 저질러 온 그릇된 폭력의 역사 또한 성경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지금이라도 왜곡된 교회의 역사 자체가 성경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편견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이미지를 띠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때일수록 대중의 오해나 편견들을 적극적으로 풀어가는 데 초점을 맞춘 변증 전도적 접근이 신자나 비신자 모두에게 유용하다. 포털 사이트의 기독교 관련 기사에 달리는 반기독교성 악플들에 대해 합당한 대답으로 오해를 풀어 주는 사이버 전도대와 같은 전도자의 활동도 필요한 때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이미지는 예수님이다. 이 지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구약에서 심판은 눈에 보이는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신약에서는 시간의 끝에 일어난다. 구·신약을 통틀어 인류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진리가 기독교의 유일성이다. 리처드 도킨스마저 예수님은 좋게 평가하는 분위기니, 복음 전도 과정에서 성육신의 진리를 올바로 변증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폭군 이미지나 독재자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신학적 대안 찾기 또한 이러한 변증적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환균 그말씀교회 담임목사. 변증전도연구소장. 미국 풀러신학교(D.Min). 저서로 《7문7답 전도지》,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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