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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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08월호 종교개혁자들은 왜 심방을 강조했는가? 심방, 영혼을 향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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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여 공생애 동안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물론, 세리 레위나 마리아의 집에서도 말씀을 전하셨다.

교회는 진리의 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곳이다. 성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교제할 때, 그분 안에서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함께 만나서 교제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를 의미할 수밖에 없고, 성도의 교제는 목회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실제로 목회를 뜻하는 라틴어 ‘쿠라 아니마룸’(cura animarum), 독일어 ‘제일조르거’(Seelsorge)는 ‘영혼의 돌봄’이라는 뜻이다. 이는 목회가 영적인 만남과 교제를 위해 성도를 돌보고 보살피는 일임을 보여 주고, 이를 위한 심방이 교회와 목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심방의 역사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여 공생애 동안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물론, 세리 레위나 마리아의 집에서도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초대 교회 사도들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당과 성도의 집에서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 이러한 심방의 전통은 사라졌다. 자발적인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탁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신자들의 집을 방문해 말씀을 전하는 전통을 이어 나갔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심방이라 볼 수 없다. 탁발 수도사들의 가정집 방문 목적은 육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구 사제들에 의한 심방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심방이었지만, 거의 수행되지 않았다. 교구 사제들이 임무를 잘 수행하는지 감독해야 하는 주교, 주교들을 관리 감독하는 대주교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목회가 아니라, 출세와 재물이었다. 그렇기에 중세 시대 목회적 활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뇌물과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되었다.
 
 

고해성사와 면별부로 대치된 심방

중세 말기 교회의 타락상은 더욱 극심했는데, 교리적이고 목회적인 타락이 심각했다. 대주교와 주교, 교구 사제는 분명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심방 목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는 ‘고해성사’ 때문이었다. 고해성사는 신자가 죄를 지었을 경우, 스스로 성직자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관습을 만들어냈다. 결국 교인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를 찾았고, 이로 인해 목회자가 교인을 찾아가는 심방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천주교의 이러한 전통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 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회개를 두려움의 ‘불완전 통회’(attritio, 하등통회)와 사랑의 ‘완전 통회’(contritio, 상등통회)로 구분한 중세 로마 교회 교리에 밀접하게 연결된 고해성사는 종교개혁 당시 ‘완전 통회’로 간주되었다. 고해성사만 하면 죄가 깨끗하게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최소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비밀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지은 죄에 대한 면벌뿐 아니라 확실한 비밀 유지까지도 보장된 길이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면벌부(면죄부)였다.

이처럼 고해성사와 면벌부는 심방 없이도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제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고해성사와 면벌부를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르틴 루터의 심방

1520년대 중반은 독일 전역이 개혁의 외침과 농민 봉기로 혼란스러웠고, 1년에 한 번씩 시찰하던 주교의 관리 감독도 중단되었기에 주교구의 무질서는 심각했다. 그래서 루터는 교구들을 시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1526년 요한 공작에게 주교구 심방을 요청했다(요한은 1525년에 죽은 작센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의 동생으로,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되었다). 여기서 개신교 심방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루터의 요청으로 인해 1527년, 4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에 의해 독일 작센 지역에 교구 심방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심방(visitatio)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심방과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 심방은 사실상 ‘시찰’이나 ‘조사’를 의미했고, 따라서 ‘심방자’(visitator)는 ‘시찰위원’이나 ‘조사관’을 의미했다. 선제후가 이 시찰단 위원을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는데, 이것은 교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세속 정부의 손에 넘긴 사건, 즉 루터교회가 국교회로 정착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루터는 교회가 세속 권력자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교회를 위한 선제후의 직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제후의 직무가 비록 가르쳐야 하고 영적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속 정부로서 백성들 사이에 분쟁과 이단과 폭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할 책임은 있다.”1

루터는 당시 로마 교회의 대주교와 주교와 교구 사제를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가 아니라 영혼의 파괴자로 여겼다. 1529년 루터가 개신교 최초의 교리문답서인 《소교리문답》과 《대교리문답》을 출간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1527년부터 시행된 시찰단의 교구 심방을 통해 파악한 작센 지역 교구 교회의 영적 상태가 교인들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조차 가르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심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실제로 주교(Bischoff)는 감독자(auff seher) 혹은 시찰관(visitator)이라 불리고 대주교(Ertzbischoff)는 그 감독자들과 시찰관들 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각 교구목사(Pfarher)는 사람들이 어떻게 가르치며 사는지 자신의 교구민들을 심방하고 돌보고 감독해야 하는 것이다.”2 루터는 심방을 맡은 시찰단의 직무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이고 필수적인 ‘사랑의 직분’(liebe ampt)으로 간주했다.3

루터에게 심방이란 영혼을 돌보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루터의 심방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심방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믿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돌보고 약한 자들을 어떻게 위로하며 야만적인 자들을 어떻게 처벌하는지 등을 조사하는 일이다.

 

마르틴 부처의 심방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는 1538년에 개신교 목회학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참된 목회에 관하여》(Von der waren Seelsorge)를 출간했다.4 이 책에서 부처는 루터와 달리 교회의 영적인 치리를 세속 정부의 치리와 구분했다. 그는 교회의 고유한 영적 치리권의 근거를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묶고 푸는 열쇠에서 찾았다.

부처에 따르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심방의 권리 역시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때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에는 목사뿐 아니라 장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장로는 감독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장로가 유대적인 명칭이라면, 감독은 로마적인 명칭이다. 부처에게 초대 교회의 야고보는 감독 중의 최고 감독, 장로 중의 수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부처는 루터처럼 신약 성경의 감독 제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 직분에 대한 루터와 부처 사이의 견해 차이는 분명하다. 부처에 따르면, 목사든 장로든 영혼의 목회자들을 세우는 주체는 정부가 아닌 교회다. “최상의 임직 질서에 있어서는, 위선적이고 부적격한 직분자들(Dienern)을 해임하는 일과 바르고 유능한 직분자들을 임명하는 일을 교회가 [수행하되] 기독교 정부의 도움을 받고 그리스도의 모든 양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5

부처는 정부와 교회를 상하의 종속관계로도, 분리의 대립관계로도 보지 않았다. 상호 대등하고 독립적이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관계로 보았다. 그는 이 개념을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에 적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후에 칼뱅이 오늘날 당회의 기원인 제네바 교회치리회에 적용했다. 즉 교회는 세상 정부가 가진 칼의 권세와 다른 성령의 검인 말씀의 영적 권세를 부여받았기에 세상 정부의 처벌권과 구별된 영적 처벌권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0-21)는 바울의 고백을 근거로 부처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과 권면이 교회의 공적인 모임과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성도의 가정에서도 신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백성을 집에서도, 특히 각각 개별적으로 교육하고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6

부처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결코 교회의 공적인 예배나 설교에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는 교인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심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공개적인 설교를 통해 선포된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각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지 가가호호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시험하고 감시하시기” 때문이다.7

목회자의 심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부처는 “성령께서 교회를 바르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의 참된 후견인과 교사가 되시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즉 성령의 인도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부처의 심방 개념은 칼뱅을 거쳐 장로교의 영적 치리권으로 발전했다. 부처와 칼뱅은 처벌권에 관해 교회 주도적 교황황제주의(Papocaesarism)와 동방교회의 정부 주도적 황제교황주의 사이의 중도(via media) 입장이었다. 정부와 교회를 상호 독립적이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상보관계로 보았던 이들의 관점은 상당히 독특하다.

 

존 칼뱅의 심방

칼뱅이 작성한 1541년과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을 통해 정부와 교회가 상호 긴밀한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은 시 관할에 속한 모든 지역 교회를 시찰할 대표를 정부와 목사회가 각각 2명씩 선출해 심방하도록 했는데, 1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이 시찰은 목사의 생활과 사역 모두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즉 목사의 개인적인 삶과 가정뿐 아니라, 공적인 사역인 설교와 심방 등 전반에 걸친 시찰이었다.8

이러한 심방은 “그가 근면성실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스스로 선한 모범을 보이면서 정직한 삶을 영위하는지, 즉 그와 그의 가족이 실제로 멸시받을 정도로 방탕하거나 경박한지, 혹은 그가 백성과 조화로운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16세기 제네바에서는 환자 심방이 목회의 필수 사항이었다. 그래서 제네바교회법은 조사와 시찰 및 훈계를 위한 심방 규정뿐 아니라, 환자 심방을 “목회자의 일상적인 직무”로 규정했다.9 환자 심방의 목적은 투병 중인 환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요, 그에게 구원을 위한 권면과 가르침을 제공하는 통로였다.

이러한 환자 심방의 이유에 대해 칼뱅은 투병 중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 사람에게 과거 어느 때보다 구원이 절실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권면이나 가르침 없이 죽어 가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환자 심방은 ‘환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유익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환자 심방의 규정에 따르면, 환자가 침상에 3일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환자의 가족은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목사에게 심방을 요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는 어떤 위로도 무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실한 사람일지라도 병을 앓게 되면 마음만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약해진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 규정이었다.

 

감찰을 위한 심방도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목회 심방은 사실상 16세기부터 시행된 종교개혁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심방은 시찰 혹은 감찰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당시 심방은 교인뿐 아니라, 목회자도 영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수단이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그와 같은 심방 제도를 교회의 세 번째 표지인 ‘치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6세기 제네바 교회에서는 교회치리회와 심방위원뿐 아니라 목사회조차도 목사들의 삶과 사역을 관리하고 시벌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반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기관이 없다. 법적으로는 당회와 노회와 총회가 치리 기관이지만 한국적 인식과 인간관계,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제가 곪아 터진 후에야 치리권이 발동되고 전권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좋은 게 좋다’는 인식, 문제를 가능한 덮으려고 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죄인 공동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를 권면하는 일이 없다면 죄인 공동체인 교회가 성도 공동체로 변화되는 일도 없다.

 

심방은 성도의 권리요, 목회자의 의무다

사실상 관리 감독 개념이 배제된 현대적 목회 심방조차 점점 사라져 간다. 대도시 교회일수록 목회 심방을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현상이 심한데, 이것은 목회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다. ‘목회 심방’이란 매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각 가정과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수단인 동시에, 각 가정과 개인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제공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방은 성도에게는 권리요, 목회자에게는 책임과 의무다. 심방은 신자 개인과 가정을 영적으로 바르게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신자는 설교를 통해 일반적인 위로를 받지만, 또한 심방을 통해 개별적인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이때 인간적인 위로와 권면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약속의 말씀 중심적인 위로와 권면이어야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말씀과 성령에 의한 위로와 권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중심의 영적 위로와 권면이 필요하다. 이런 위로와 권면은 영적으로 건강한 신자에게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건강하지 못한 신자에게는 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심방은 교인을 영적으로 돌보는 훌륭한 목회 수단이다.

 

환자 심방을 우선하라

누구보다 심방이 필요한 사람은 환자다. 질병으로 연약해진 영혼에게는 위로와 힘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환자 심방’이란 이와 같은 하늘의 위로와 힘을 환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생명의 주님을 의지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만이 인생 최고의 위안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 이것이 환자 심방의 백미다.

하늘의 위로와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을 공급하기 위해 목사는 심방 전에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또한 환자의 심리 상태와 신앙 자세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병으로 연약해진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심방의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환자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밀하게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심방이 필요하다.




1) WA 26, 200. 28-31.
2) WA 26, 196. 5-8.
3) WA 26, 197. 20.
4) 이 책의 한글 번역은 다음 참조. 《참된 목회자》, 신현복 옮김(서울: 아침영성지도연구원, 2013);  《참된 목회학》,  최윤배 옮김(용인: 킹덤북스, 2014). 이 책을 중심으로 부처의 목회 사상을 다룬 글은 다음 참조. 황대우, “마르틴 부처와 그의 목회지론”, 〈고신신학〉 19호, 이상규 교수 은퇴기념호(부산: 고신신학회, 2017), pp.173-208.
5) BDS 7, 131. 5-8.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 직분자를 임직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다원주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는 매우 낯설고 납득하기 힘들지만 구약 시대 이스라엘처럼 16세기 온 유럽이 기독교 세계(corpus Christianorum)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6) BDS 7, 218. 12-14.
7) BDS 7, 218. 31.
8) 이하에 인용된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에 관한 내용은 다음 참조. CO 10, 91-124; 《칼뱅작품선집》VII, 박건택 옮김(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11), pp.635-680.
9) 아래 환자 심방에 관한 내용은 상당 부분 인터넷 신문 〈개혁정론〉에 기고한 필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황대우 고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네덜란드 아펠도른신학대학교(Th.D.). 저서로 《칼빈과 개혁주의》, 《종교개혁과 교리》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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