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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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18년  08월호 목회자를 험담하는 성도,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목회자 고민 상담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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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도가 자신의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교회 중직을 맡고 있는 한 집사님이 담임목사인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이 좋지 않다”, “중학생 아들이 신앙적으로 미성숙하다” 등의 이야기를 한다는 말에 너무 화가 나 밤잠을 설쳤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에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 집사님을 볼 때마다 자꾸만 미운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집사님의 언행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좋지 않은 것이나, 목회자 자녀의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집사님의 언행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만일 목회자 과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집사님은 거짓말로 다른 사람, 특히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며, 이 언행은 제9계명을 정면으로 범하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제9계명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금지한 계명이라기보다는 이웃에게 상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금지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과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집사님은 문제를 크게 잘못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집사님은 먼저 당사자인 목회자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고언(古言)을 했어야 합니다. “목사님, 설교 말씀을 좀 더 충실하게 준비해 주십시오.” 이처럼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고언을 하고, 회중 앞에서는 발언을 자제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관한 부정적인 말을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먼저 터뜨리는 것은 매우 비열한 행동입니다. 교회 성도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에게 이런 행동이 주는 상처는 매우 큽니다.

또한 이 집사님은 목회자의 중학생 자녀의 행실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이것도 매우 경솔한 처사입니다. 목회자의 자녀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떠나서 중학교 시절은 신체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게 되는 사춘기이기에 일탈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목회자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다른 청소년보다 좀 더 큰 반항심 등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내고 있는 목회자의 자녀를 따뜻한 시각으로 이해해 주기는커녕,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적·율법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목회자는 투명한 유리 상자에서 산다

이처럼 성도가 목회자 없는 자리에서 목회자를 비방하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지만, 목회자는 비방하는 성도에게 맞대응해 반격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어려워집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맞대응해 반격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더 이상 목회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목회자는 목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목회자가 없는 자리에서 목회자에 대해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끊임없이 평가를 하는 청중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목회에 임해야 합니다. 목회자에 대해 항상 칭찬만 하고 순종만 하는 청중은 거의 만나기 힘들고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이 목회자, 특히 담임 목회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평가를 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한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할 때 교회의 영적이고 도덕적이며 행정적인 모든 책임을 담당하는 담임목사는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고, 이 중심축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담임목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화의 중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없는 자리에서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상황을 극히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회자 앞에서 그저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고 해서 목회자가 없는 자리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중대한 오해입니다.

어차피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은 목회를 하는 동안 교인들이 언제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이를 피하려고 하면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자신이 유리 상자 안에서 살아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흔쾌하게 100% 인정하고, 이른바 ‘탈탈 털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길을 걸어갈 때 진흙탕을 피해서 걸으려면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아예 진흙을 뒤집어써 버리면 더 이상 진흙탕을 피할 필요가 없어져 마음 편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평가하고 여차하면 불만을 토로하는 ‘문제 청중’을 나에게 붙여 주셨을까?” 사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붙여 주신 청중도 동일하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청중은 모세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사역을 마무리하기까지 끊임없이 모세를 비방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안에서 일어남을 고백하며, 한결같이 선하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해로운 일을 허락하시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회자에 대해 끊임없이 비방을 가하는 청중을 붙여 주신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비방을 일삼는 청중을 목회자에게 붙여 주신 데는 정말로 목회자 자신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이 어떤 이유로 비방을 하든, 이 비방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아내 묵상하는 가운데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과실 없는 비방: 맞대응은 금물, 인내로 다스리라 

먼저 목회자에게 특별한 과실이 없는데도 성도들이 목회자를 비방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때 목회자는 시련에 부딪히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특별한 과실이 없는데도 찾아오는 시련을 다루는 대표적인 성경 본문으로는 야고보서 1:2-4이 있습니다. 2절에서 야고보는 이런 시련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시련이 찾아올 때 기뻐하라고 권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절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답변합니다.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υπομονη)는 매우 무거운 짐을 장기간 떠받들고 있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역도 선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역도 선수는 매우 무거운 바벨을 온 힘을 다해 번쩍 들어 올리지만 오랜 시간 들고 서 있지 않습니다. 약 10초 정도 들고 서 있다가 바로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휘포모네’의 사람은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린 다음 끝을 알 수 없는 긴 기간 동안 들고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한 교회를 맡아서 목양을 시작하면 무거운 목양의 짐을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떠받치고 가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휘포모네’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울화가 치민 상태에서 성급하게 맞대응하기 시작하면 한 곳에서 목양을 지속하지 못한 채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방랑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는 현실을 만났을 때, 평생에 걸쳐서 진행될 목양의 무거운 짐을 능히 지고 갈 수 있는 ‘휘포모네’의 능력을 배양시키려고 잠시 시련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휘포모네’의 능력은 목회자가 평생 동안 가르쳐야 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대원리와 직결됩니다. 인내의 성품, 곧 오래 참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아가페)의 정의의 핵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15가지 정의들의 목록을 보면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참는 것”을 거쳐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끝납니다. 다른 항목들도 참아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안더스 니그렌(Anders Nygren)의 《아가페와 에로스》는 아가페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를 진행한 끝에 아가페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는 “호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를 호감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철저하게 희생하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가페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은 나에게 호감을 받을 조건을 갖춘 대상을 좋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우에 목회자를 존중하고 선하게 평가해 주는 성도가 그런 존재이며, 목회자는 자연적인 품성에 따라서 이런 성도를 좋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목회자 주변에 목회자를 칭찬하고 선대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목회자에게는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이 없게 되고, 결국 목회자는 아가페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목회자가 아가페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실천 경험이 없다는 말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상 목양이 불가능해집니다.

호감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대상을 호감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춘 대상으로 대우해 주고자 할 때 필요한 태도가 바로 인내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자연적인 품성을 그대로 물 흐르듯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자연적인 성향이 나타날 때 의지를 세워서 이 자연적인 성향을 거스르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입니다. 자연적인 성품과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장(僞裝)으로 본 루이스(C.S. Lewis)의 정의는 바른 정의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기 싫은 일을 마치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처럼 하니까 위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음속에 있는 자연적인 감정을 다 밖으로 풀어내 버리고 해방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적인 성품이 원하는 바를 인내로써 철저하게 통제하고 누르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통제하고 누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근거 없는 비방에 시달리면 당연히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요. 그러나 이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터뜨리고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저하게 인내로 다스리고 통제하고 누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목회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는 성도는 이웃일까요? 아니면 원수일까요? 이웃인 동시에 원수입니다. 원래 원수는 이웃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내 주위에 없으면 나와 원수가 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내 주위에 있으면서 나와 많이 교류하고 나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원수가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의어입니다.
 

과실로 인한 비방: 변명·공격 대신 인정하고 소통의 계기로 삼으라

그러면 이번에는 목회자가 범한 과실이나 죄가 교인들 사이에서 비방거리가 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빈약하다거나 목회자가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비방이 바로 그 예입니다. 이런 경우 목회자는 교인들 사이에서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서운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평가들이 나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수는 한 학기의 강의를 끝내면 반드시 강의 평가를 받습니다. 강의 평가를 하기 전이라도 교수의 강의가 몇 차례 이루어지고 나면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의 강의에 대한 어마어마한 횟수의 자체 평가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의 입장에서는 가슴 졸이는 일이지만, 교수의 강의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가를 하고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설교 내용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적·도덕적 영향을 끼치는데, 어떻게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 교인들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대화의 소재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목회자의 행실이 곧 교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되는데, 어떻게 목회자의 행실에 대해 교인들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대화의 소재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설교가 빈약하다든가, 삶이 모범적이지 않다는 소식이 목회자의 귀에 들어왔다는 말은 이 사안이 벌써 성도들 사이에서 수백 번 대화의 소재로 오고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목회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목회자 자신보다도 더 정확하게 목회자의 실력과 삶의 모습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회자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로부터 설교가 빈약하고 삶이 형편없다는 비방을 들을 경우, 우선 ‘지도자로서의 체면이 구겨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고, 비방을 하는 성도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마음 상태에 말려 들어가서 목회자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런 비방이 들려오는 것조차도 자신을 좀 더 나은 사역자로 다듬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목회자는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거나, 비방을 하는 성도들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이 기회를 자기 발전의 좋은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우선 마음속으로 흔쾌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런 진솔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면 성도들도 마침내 감동하게 될 것이고, 결국 목사님의 설교 능력이 부족한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목회자로서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냥 진솔하게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항상 자식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의 자식도 탈선할 수 있고, 공부를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어 놓고 교인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자식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도 부탁하면서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방 관련 내용을 교회 공적 모임에서 거론하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목회자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 가운데 하나는 절대로 비방과 관련된 내용을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거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 시간에 비방과 관련된 내용을 거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간혹 마음속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다 보면, 억울함을 해소한다는 목적이나 성도들에게 생활 교육을 한다는 목적으로 설교 시간에 비방과 관련된 내용을 직접 거론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 시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과 삶의 원리들을 선포하는 시간이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과 삶의 원리를 공적으로 소개하고,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 개인의 신변과 관련된 시시한 이야기나 변명으로 그 시간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을 오염시키는 행위입니다. 설교 시간 이외에 기도하는 시간이나 성도들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에서도 가능한 한 비방과 관련된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비방과 관련된 시련을 넘어서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하는 가운데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논점과 관련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드워즈는 장인이 목회하던 교회의 후임 목사로 들어가서 목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에드워즈가 처음 교회를 맡을 때는 성도들의 숫자가 100여 명 정도 되었는데, 28년 목회를 하고 난 다음에는 800명이 넘는 회중으로 부흥시켰습니다. 에드워즈는 순수한 학자적 성향을 지녀 교인들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장인은 정치적 성향이 강한 목사였는데, 장인 밑에서 훈련받은 중직자들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드워즈의 화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에드워즈가 당회에 사례금을 올려 달라는 제안을 하면서 표면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중직자들은 에드워즈를 몰아내기 위한 온갖 정치적 공작과 비방을 시작했고, 5년 후에 교회를 사임할 때까지 에드워즈는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5년 동안 에드워즈가 설교 시간을 포함한 교회 안의 어떤 모임 자리에서도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은 장엄한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삶의 원리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온 것이지, 목사의 신변잡기에 대해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가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고별 설교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 재림의 날 주님 앞에 형제로서 서야 할 자들입니다.”

 

어떤 비방에도 맞대응하지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라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목회자는 자신에 대해 가해지는 정당한 비방이든, 부당한 비방이든, 맞대응을 해서는 안 되는 직분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방에 대해 맞대응하는 순간 목회자는 성도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다투는 것이며, 이 다툼이 시작되는 순간 성도들을 영적이고 도덕적으로 지도해야 할 목회자의 고귀한 직분의 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어떤 형태의 비방이든 목회자 자신에게 찾아오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이 비방을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무거운 목양의 짐을 굳건하게 지고 나갈 인내를 배양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치기 위한 계기로 삼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아직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는 계기로 삼는 지혜로운 직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상원 총신대학교 기독교윤리학과 교수. 네덜란드 캄펜신학교(Th.D.). 저서로 《기독교 윤리학》, 《21세기 사도신경 해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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