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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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2018년  07월호 믿음은 앎에서 시작해, 삶을 드리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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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수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철학신학 교수로 재직 중인 강영안 교수가 《믿는다는 것》을 펴냈다. 강영안 교수는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기윤실 공동대표, 기독교학문연구회,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등 다양한 기독교 실천 및 지성 운동을 했으며, 두레교회와 주님의보배교회 장로로 섬겼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신뢰를 상실하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온전한 믿음을 삶에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존의 많은 책들과 다르게 저자는 ‘믿음의 행위’에 주목한다. 믿음은 내적인 속삭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외적 결과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앎에서 시작해 동의하고 삶을 내맡기기까지 나아가는 통전적인 ‘믿음의 행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5월 29일 천안 자택에서 강영안 교수를 만났다.



《믿는다는 것》을 저술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 책은 2011년부터 교회와 학교에서 했던 몇 차례의 강연을 모은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믿음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 고민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몇 군데서 그에 관한 강의를 했다. 강연을 위해 작성해 둔 초안을 작년 겨울 잠깐의 여유가 생겨 정리하게 되었다. 원고를 정리하며 느낀 것은 이미 6, 7년 전에 했던 고민과 생각들임에도 여전히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고, 내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믿음’에 관한 이해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출간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믿음의 어떤 부분을 말하려 했는가?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 ‘믿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는 행위다. 믿음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책에서 다루려 했던 것은 믿음의 대상이나 내용이 아닌 ‘믿는 행위’다.

그렇다면 ‘믿는 행위’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다고 많이 말하는데, 도대체 믿는다는 게 무엇인가? 아퀴나스나 루터나 칼뱅은 ‘믿는 행위’에 세 가지를 포함한다. 우선은 ‘앎’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으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모를 때는 믿는 것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앎은 믿음의 첫 번째 요소다. 흔히 사람들이 가진 ‘앎과 믿음은 대립되고, 서로를 배제한다’라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믿는 행위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한다면 “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동의해야만 믿는 것이다. 동의하고, 승인하고, 수납해야 한다.

세 번째는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하고 맡기는 데까지 가야 믿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아퀴나스, 루터, 칼뱅 모두가 인정한 ‘믿는 행위’에 대한 정의다.

사실 교회에서 이러한 믿음의 기본적인 요소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했지,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앎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아니라 덮어놓고 믿는 믿음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수준의 믿음까지 가지 못했다. 믿음이 열매로 이어지는 구조가 망가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 신학자들은 실천적 삼단논법을 이야기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라는 전제에서 볼 때, 열매가 없다면 믿음이 없다고 해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다.


열매를 강조하는 믿음과 이신칭의 교리가 충돌하지는 않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루터가 1520년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충분히 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다음 단계가 있다. 우선 ‘칭의’가 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유일한 수단이다. 죄인임에도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다. 그래서 루터는 줄곧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의인이다.

하지만 루터는 믿음이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다. 루터와 칼뱅 모두에게 중요한 연합 교리다. 마지막으로 연합했으면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성적으로 결합했을 때 아기를 낳게 되는 것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믿음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말한 믿음은 선행과 불가분의 믿음이다.

혹자는 이신칭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었다. 루터는 이신칭의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를 통한 연합, 그것을 넘어 선한 열매를 맺는 것까지 말했다. 우리도 이신칭의를 말하려면 그 셋을 함께 말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지성 운동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IVP같은 출판 운동, IVF나 SFC 같은 학생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운동들이 자체적인 한계를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워낙 오랫동안 한국 교회를 지배해 온 반지성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그 운동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를 극복할 만큼 한국 교회가 변화를 받아본 적은 역사상 없다. 일부 청년들이 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도 교회의 틀 안에 들어가면 반지성주의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성주의를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성의 온전한 자리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생각해야 할 때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때 반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전혀 그러한 작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믿음의 시작은 앎이라고 했다. 신앙에서 지성이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중요한데, 그동안은 완전히 무시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많은 지식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지식을 위한 지식 추구는 타인을 배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지식은 ‘사랑 안에서의 지식’이고, ‘타인을 세우기 위한 지식’이지, ‘지식을 위한 지식’은 분명 아니다.

지식에도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은 정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정보를 가지는 것이 시작이다. 컵을 예로 들면 ‘컵이 둥글다’, ‘재질은 유리다’ 등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단순히 정보에 머물면 안 되고 사용하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컵을 가지고 물을 마셔야 한다. 세 번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식을 통해 알고 사랑하고 나누어야 한다. 컵에 차를 담아서 마시면서 즐기고, 좋아하는 단계까지 가야 온전한 지식이다. 객관적 차원에서 시작해서 도구적 차원과 인격적인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람에 대해선 더하다.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만 갖는 것과,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거기서 나아가 그와 서로 아끼고 관심을 가지는 데까지 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앎은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도 이것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무소부재하심을 아는 것은 정보의 차원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알았으면, 어려움에 처했거나 무슨 일을 겪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분과 사귀고 교제하는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 지식이야말로 사랑 안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에 대한 이해 자체가 너무 편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지성이 이러한 ‘진정한 앎’이다. 수많은 성경 지식을 쌓고, 역사를 이해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가는 지식이다. 

결국 지식이 이르게 되는 곳은 겸손이다. 안다고 내세울 수 없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하나님을 아는 것의 마지막 단계라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더 안다고 다른 이를 견주고 깔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온전한 믿음과 교회의 회복을 위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선 신학 교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제대로 묻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공부는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실컷 답을 주고, 그 답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에 머물기에 도대체 질문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제대로 된 공부와 신앙에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정보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삶, 개인으로서의 자신, 공동체로서의 자신, 믿음, 소망, 사랑 등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말이다.

또한 신학자들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신학적 지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성경과 교리와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과거 교회의 실패와 성공,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연구하는 성경과 신학, 그리고 실천적 관심에서 한국 교회 현실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목소리들이 나와야 한다. 

물론 한국의 현실에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신학자는 교회 교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신학이 교단을 위해 봉사하는데 머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현실적 능력을 벗어나서 해야 할 일이다. 신학 교수를 세운 목적과 이유가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인데, 만약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신학자는 그것을 지적하고 방향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접 성도들과 접촉한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목회자가 신학자들보다 훨씬 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새롭고 좋은 교회들이 많이 탄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살아가려는 그런 목회자와 성도들이 얼마나 형성되는가에 한국 교회의 사활이 걸렸다. 그동안은 예수 믿고 천당 가거나, 예수 믿고 복 받기 위해 믿음을 가졌다. 이제 예수 믿고 예수님 닮아 살아가는 믿음의 새로운 가능성을 목회자가 제시해야 한다. 그것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조언 부탁드린다.

우리가 가진 개혁신학의 전통에는 사회, 문화, 경제, 예술 등을 새롭게 할 놀라운 지적, 사상적 자산이 있다. 적어도 내가 배운 칼뱅, 카이퍼, 바빙크, 도이베르트, 월터스토프 등의 전통은 당대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신앙이었다. 그들은 복음적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보수성에서는 철저했지만 사회, 문화, 정치, 경제면에서는 급진적이었으며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카이퍼나 바빙크가 가진 정치, 사회, 경제 사상은 당시 보수주의 교회였던 경건주의에 비하면 굉장히 급진적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보수성이 곧장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보수성으로 흘러 고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신앙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한국은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의 통치를 받았고, 해방 이후에 곧장 남북이 분단되었다. 이로써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이념의 틀 속에 갇혔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노선을 채택하면서 우리가 가진 보수 신학이 정치적 보수성으로 고착되었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되었고 지구상에 이론적인 공산주의를 여전히 채택하는 국가는 없다. 공산주의는 완전히 무너졌다. 북한도 봉건주의에 가깝지 이론적인 공산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는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이 여전히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질문하고 사고하는 것에서 시작해 실천하고 길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이 믿음의 길이 막혔다.

이는 교회의 역할 또한 지엽적으로 만들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묻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가 지금 겪는 신뢰 상실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목회자들이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반성하며 본질적인 신앙을 꿈꾼다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없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보아도 문제가 되는 행동을 일삼고, 교회 공동체는 그것을 두둔하는데 누가 교회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상식 못지않게 신앙의 상식도 중요하다. 그러한 신앙의 상식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시대 못지않게 중요한 시기다.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커다란 변혁기에 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주 되심, 성령님의 오늘도 통치하심이라는 근본 기독교의 가르침을 굳세게 견지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와 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다. 그러한 책임과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그로 인해 우리 삶의 공동체가 평화롭고, 윤택하고, 좀 더 정의로워지길 바라야 한다.

젊은이들의 생각 또한 급변한다. 해방 이후 세대는 생존을 목표로 살았다. 그 이후 경제 성장기에는 경쟁해서 남들보다 더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살았다. 오늘의 세대는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자기만족을 위해 매 순간을 소비하며 산다. 엄밀히 말해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좁아졌다. 기독교 신앙에서 흘러나오는 삶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가 절실한 시기다.

여기에 삶의 의미를 주고 목적을 부여하는 기독교 신앙이 가진 큰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왔다. 너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는 예수님의 그 외침이 2000년 전의 외침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완성, 그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사이 시대의 긴장이 오늘 교회를 다시 혁신할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강영안 강영안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철학신학 교수, 송지훈 <목회와신학> 기자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