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특집 2018년  07월호 비신자 전도를 위한 기독교 변증 10문 10답 소통과 공감으로 전도하는 교회

변증전도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지성·감정·의지가 조화를 이룬 전인적인 믿음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는 이 시대 무신론자들을 포함한 비신자들이 기독교 진리에 대해 갖는 지적인 의문이나 오해,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비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주 던지는 대표적인 질문들에 변증적인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부족하나마 믿는 자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벧전 3:15) 일에 작은 디딤돌 같은 대응 논리의 하나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질문 1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나?

세상을 만든 창조주 신이 없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만물이 우연히 만들어졌어야 맞다. 창조주 신이나 우연 외에 제3의 주체가 제3지대에 따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우연’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다. 무신론적인 자연주의자들이나 진화론자들이 물질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우연히 뭔가가 생겨났다”라고 말할 때 그 우연이란 말의 뜻이 이렇다.

‘비일관성’이나 ‘돌발성’을 주된 특성으로 삼는 우연은 어떤 물질적인 실체도 아니고 아무런 인격적인 능력이나 논리를 갖고 있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동전을 연속으로 아홉 번 던져 다 앞면이 나왔다 해도 그 동전을 열 번째 던져 우연히 앞면이 또 나올 확률이 더 커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여전히 50 대 50이다. 우연은 아무런 실체나 영향력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간다 해도 우연에 ‘의해서’ 뭔가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다. 

무신론자들은 흔히 “만일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께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만일 원인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주 만물도 그럴 수 있다”라고 강변한다. 이 논리는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나?”라는 물음을 낳는다.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 같지만, “만일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이라는 가정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우주 안팎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이 다 알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한 가정이다. 만약 그 ‘모든 것’에 영원 전부터 스스로 있는, 자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 가정은 정당하게 성립될 수 없다. 신이 진짜 신이 되려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신은 무신론자 한 사람보다 어마어마하게 더 큰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실은 어떤 한 사람이 신이 없다고 말하려면 신이 가진 무한한 지식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라는 무신론자들의 가정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관찰할 수 있는 이 우주와 세상 만물과 인간의 정교한 몸을 놓고 보면, 이것은 아무런 능력이나 실체도 없는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적이고 인격적이며 전능한 창조주 신의 존재라는 구체적인 ‘원인’에 의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가운데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질문 2    요즘 같은 과학주의 시대에 신을 믿는다는 건 종교적인 맹신 아닌가?

창조론은 무(nothing)에서 유(something)를 창조한 신을 전제하고, 진화론은 유에서 유가 발생하는 법칙을 연구한다. 창조와 발생은 전제가 다르다. 과학이 종교가 되려는 지점은 만물 기원의 문제마저 신을 배제하고 발생론적으로만 풀려 할 때다. 그럼에도 진화론자들은 종종 “진화는 모든 걸 설명하진 못하지만 언젠가는 사실이라는 게 완전히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 발전의 잠정성을 오용한 과학 우상화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이 과학주의의 미끼에 현혹되어 창조 신앙을 무시한다.

종교는 주관적 가치를 다루고,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다룬다는 건 이분법이다. 기독교는 합리적 지식체계로서의 과학은 인정하지만,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방법론만을 과학으로 인정하려는 것은 배격한다. 이런 과학은 과학자의 무신론적 믿음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따라서 정당한 과학과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정당한 과학의 대전제는 우주가 질서정연하다는 확신이다. 우주의 법칙들이 이미 질서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면 과학적인 탐구나 이론 정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학은 우연을 창조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무신론적 자연주의를 지지한다기보다 오히려 유신론을 지지한다.

우주 생성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없다. 기원 문제는 인간 고유의 건전한 상상이나 상식에 호소해야 한다. 우연을 창조주로 삼는 것이 인간 보편의 이성과 상식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우연을 창조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비합리적인 맹신에 가까운 믿음이 창조론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떼쓰진 말아야 한다.


질문 3    성경 속의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낭설 아닌가?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만물을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신화나 전설에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지는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라고 밝힌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나님의 존재적 뿌리인 말씀에 그분의 권위와 능력이 있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며 생각은 에너지다. 생각만 해도 에너지가 소비된다. 따라서 말씀으로 에너지의 여러 전이 형태인 만물이 지어지고 보존, 유지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창조물은 사람이 사용하는 말 자체의 특성과도 비슷하다. 말이 표현성과 논리성, 개념성을 지니듯 창조물도 그러하다. “앞으로는 잘 살았구나!”라는 말은 표현은 있지만 논리가 안 맞다. 말은 표현성과 논리성을 갖추어야 개념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말의 특성과 창조물의 특성이 동일하다.

‘손’이라는 창조물을 떠올려 보면, 모든 손은 엄지와 다른 손가락들의 방향이 직각이어야(표현) 무언가를 쥘 수 있는(논리) 손이 된다(개념). 사람의 몸에 표현된 구성과 기능 하나하나가 논리적이어서 개념을 지닌다. 말이 앞뒤가 안 맞고 비논리적으로 표현되면 무개념이 되듯 창조물도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일상에서도 말에는 창조력이 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천 냥 빚을 갚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리더가 무언가를 명령하면 그렇게 말한 그대로 일이 이루어진다. 말에는 존재의 실체와 능력이 있고, 그대로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적용이 일어난다.

사실 사람의 말보다 더 신기한 것도 없다. 말의 논리성이 세상을 구성한다. 그 논리가 없으면 세상이 굴러가지 않고, 굴러가도 비논리적으로 엉망이 되어 굴러간다. 실제로 사람들이 조리 있게 말할 때마다 말씀이신 우주 경영자를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말 못하는 짐승은 절대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의 조상이 아니라고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행기는 사람을 싣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무거운 철통이다. 만일 지금보다 문명이 덜 발달된 고대 시대의 사람들에게 비행기에 대해 설명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억지라며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비행기를 발달된 지혜와 지식의 산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이 시대에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혜와 지식을 갖지 못한 고대인들은 비행기의 존재나 지금의 인류가 비행기를 만들 만큼 정교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반응은 지금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더 탁월한 문명과 지혜와 지식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쩍어하는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지신 하나님께는 현재와 같이 문명이 발달한 세계에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또한 고대인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다고도 하지만, 성경의 시편이나 잠언 등에 보면 동일한 창조 사역의 문맥에서 이 ‘말씀’이 정확히 ‘지혜’로 대체되어 있다.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하나님께서 이 지혜, 곧 지성과 논리와 질서를 가진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피조물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인 우주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창조 질서의 기초로 지혜를 세우셨다. 바로 그 지혜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관찰하는 만물의 실체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세계를 탐구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지혜를 분석하게 되는데, 그 지혜가 피조세계의 물리적 구조뿐 아니라 그것의 기능도 아주 세밀하게 결정해 놓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합리적인 질서는 하나님께서 지혜의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이 어떻게 말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나? 그러니까 신화지!”라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질문 4    진리란 무엇이고, 신이 있다면 그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나?

‘진리’라는 것은 어떤 명제가 실재(reality), 곧 실제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 더하기 1은 2다”라는 진술은 진리다. “일본은 섬나라다”라는 명제도 진리다. 실제 세계의 이치, 곧 실제 세계의 그러함에 거짓 없이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정의를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만든 창조주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실제 세계의 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되게 하는 창조 질서의 법칙인 진리 또한 만든 존재이기에 그 진리의 특성과 따로 뗄 수 없이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진리가 되려면, 그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이 이렇게 정교한 몸과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창조하실 정도의 놀라운 지성과 함께 엄청나게 구체적인 능력을 실제로 가진 인격적인 존재여야 할 것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구성 요소인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를 실제로 창조한 존재인 만큼 적어도 시공간의 역사성 속에서 그분의 흔적과 존재 증거들을 보여 주실 수 있는 분이어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종교를 신의 존재를 만나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인류의 4대 종교인 기독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에서 주장하는 신의 존재가 정말 이런 진리의 요건에 합당한지를 살펴본다면, 어느 종교에서 참된 창조주 신을 만날 수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가려질 것이다.


질문 5    불교 신자들도 부처님 믿고 천당에 간다고 믿지 않나?

보통 불교 신자들에게 전도하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하면 그들은 “우리도 부처 믿고 극락에 간다. 다 똑같은 천국에 가는데 뭘 또 예수를 따로 믿으라고 하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부처가 가르친 교리가 아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오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후 모든 것은 공(空), 즉 무아(無我)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상과 고통과 삶과 죽음이 모두 공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가의 사상은 원래 무신론으로, 신 또는 신적 존재자에 관한 사상은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계승한 원시불교인 소승불교와 달리 사도 도마를 통해 인도에 기독교가 전해진 후인 주후 1-2세기경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대승불교에서는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중시하는 대표적인 염불인 ‘나무아미타불’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불에 의지한다’ 또는 ‘아미타불을 믿는다’란 뜻을 지니는데, 원시불교의 자력 구원론이 대승불교에서 신적 존재자에게 의탁하는 타력 구원론으로 바뀐 정황을 잘 보여 준다. 원래 부처는 석가에 대한 존칭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대일여래’라든지 ‘아미타불’이라는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되었다.

영원한 존재자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석가의 사상에 만족할 수 없었던 불교도들이 많았던 듯하다. 그로 인해 불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적인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종교심을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크게 변천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신론적으로 혼탁해진 불교에 대해 현재 불교계 내에서는 “순수했던 초대 불교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마저 터져 나온다. 따라서 정통 불교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질문 6    이슬람교도 알라를 창조의 유일신이라고 믿지 않나?

이슬람교에서 유일신으로 믿는 알라는 중동의 달신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의 알라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출처가 다르다. 이슬람 국가의 국기나 모스크의 지붕에 이슬람의 상징으로 표현된 초승달이나, 1년에 한 달씩 실행되는 라마단 금식 기간이 음력을 기준으로 불규칙하게 정해진다는 것 등이 이슬람교가 유래했다고 보는 아랍인들 고유의 달신 신앙의 흔적들이다.

이슬람교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알라가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뜻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단일신인 알라는 본질적인 속성 차원에서도 서로 같지 않다. 이 문제는 이슬람교에도 진리의 자격 요건에 합당한 창조주 신이 존재하는가를 가리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이슬람교에서는 사람은 알라 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 즉 주인에게 완전히 절대 복종하는 종으로서의 관계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우리가 실제로 이 창조 세계에서 보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창조 질서인 사랑의 관계, 공동체의 질서와 명백하게 맞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만도 여자만도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람 역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알라 신은 그 자신이 창조주 신이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단일체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본질상 상대방이 있어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관계 공동체를 표방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면서 일생을 사는 동안 그 남녀 간 사랑의 원형인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이 인류 역사라는 시공간에 친히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라는 분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도 서로 다른 신관을 가진 두 종교가 신봉하는 두 신이 동시에 둘 다 진리이거나 둘 다 진짜 신일 수는 없다.


질문 7    힌두교인들이 신봉하는 우주 최고의 신 브라만이 창조주 신일 수도 있지 않는가?

힌두교의 신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로, 태어나고 죽기도 하는 인간적 속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동물의 형상으로도 나타나는 우상적인 존재들이며, 자연세계를 초월하지 못한 채 그 자연세계 속에 존재하는 범신론적인 신들이다. 이런 신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범신론적인 신은 물리적 우주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범신론적인 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범신론적 신이 우주를 만들 수는 없다. 

이런 신들이 유래했다고 믿는 우주 최고의 신인 브라만이란 존재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 힌두교의 핵심은 브라만이라는 독특한 신의 개념 안에 들어 있다. 브라만은 한자어로 ‘범’(梵)이라고 하는데, 우주의 근본 원리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힌두교 철학에 따르면, 이 브라만은 비인격적인 존재다. 그 안에서는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고, 선과 악의 구별도 없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도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비인격적인 존재가 인격적인 존재를 만들 수는 없다. 게다가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신 자체가 악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특성을 갖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포함한 도덕은 환영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궁극적 실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이것은 이 세상에 단순한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선과 악, 사람의 본성에 존재하는 도덕관념 등에 비추어볼 때, 실제 세계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힌두교에서 믿는 비인격적인 브라만 신은 원천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 하나님일 수가 없다.
  

질문 8    타 종교들을 관용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지 않나?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삶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고, 모든 인간이 가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에게 귀의하도록 돕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종교가 참된 신을 만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는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려면, 세상의 이치에 합당한 진리의 자격 요건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격 요건에도 적용해서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가려보는 분명한 해명 없이 그저 막연하게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가 다 신에게 이르게 해주는 동등한 진리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은 자체적으로도 모순을 안고 있다. 모든 신념을 똑같이 진리라고 보는 것은, 이 주장을 부정하는 것 역시 진리라고 말할 수 있기에 즉시 모순된다. 그러므로 무조건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의 정신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보다는 각 종교들이 견지하는 신관이 실제 세계의 그러함에 부합하는가를 살펴보고, 그 바탕 위에서 그 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지녔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종교에 속한 사람이든, 그리고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누구나 다 객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주소지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고 확인하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신화나 철학 사상에서도 기독교에서 만날 수 있는 진리의 요건에 합당한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최고 신 제우스를 포함해 신화 속의 신들 역시 태어나고 죽고 분노하고 질투하는 인간과 비슷한 성정을 가진 존재들이다.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신화 속의 신들이 아닌 순수한 이론의 신을 가정한 서양 철학의 이신론 역시 급기야 현대인들의 삶에 단순한 용어의 하나로만 존재하는, 있으나마나 한 비인격적인 신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동양철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에서 공자가 윤리의 원천으로 제시하는 막연한 ‘천’(天) 개념에서도 참된 창조주 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유교에서는 왕이 하늘의 대표 역할을 맡는다.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란 윤리 사항들을 잘 지킴으로써 군자가 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삼는 윤리적 종교의 색채를 강하게 띨 뿐 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인 토속신앙인 무교 또한 하나님이라는 최고신을 인정하지만 주로 저급 신령들을 다룬다. 삶의 모든 문제가 만물, 즉 천지와 일월성신, 산천초목과 동물, 그리고 죽은 인간에 내재하는 신령과 귀신들에게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들린 무당이 살풀이굿을 통해 진노한 선한 신령을 달래거나 악한 신령을 쫓아냄으로써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이 주된 교리다. 이 또한 신화 속의 범신론적인 자연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유일신 사상, 선민 사상,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가진 민족으로 세계사에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 민족 유대인을 통해 마침내 인류사 속에 역사적인 한 실존 인물로 나타나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존재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나 신화, 사상에는 신의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포함해 어떤 신도 인간에게 사랑으로 다가온 적이 없다. 고대 신화들의 구도는 결코 신과 인간의 우정이나 화해의 관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유일하게도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친히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셨다고 말한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란 존재가 꼭 있어야 한다면, 그는 자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도 분명히 제시해 두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창조주 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일 것이다.


질문 9    선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만연한가?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이시라고도 하지만, 사랑이시라고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도 자신의 사랑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에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간에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졌다. 흔히들 죄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대등한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사람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셔야 했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만들어 에덴동산에 거주하게만 하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스스로 인격적으로 선택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심으로써 사람을 단순한 종에서 주권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국민으로 승격시키고자 하셨다. 즉, 사람의 자유의지를 발동시킬 위대한 시험에 올인하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도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끊어져 영적으로 죽게 되고 나중에는 육체적으로도 죽게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와 인격을 제대로 존중해 주시지 않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 재난이나 질병, 죽음 같은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이 인간을 진정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신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질문 10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가나?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구원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며, 지금 우리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각자에게 알게 해 주신 지식만큼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각자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복음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들었다면 어떤 동기로 거부했는지를 속속들이 다 아신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까지 말고는 이 문제를 놓고 사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 보면, 어느 시대 사람이든 그들 각자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선행이나 업적으로, 인간이 만든 특정 종교의 교리나 의식을 준수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적용되었을 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방도 역시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다 아실 것이다.

물론 성경에 그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단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완성된 구원의 복음을 이방 나라에 전파해 가기 시작하던 초대 교회 당시에 복음을 접한 한 로마인에게 사도 베드로가 복음 이전 시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남긴 말이 그 단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 35).

이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인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이 문제 역시 정답은 “우리는 모른다”이다. 비록 복음을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못한 시대에 살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별개일 수 있다.

어쩌면 의를 행하는 도덕군자는 교회보다 세상에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관계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의는 그분과의 회복된 관계로 얻는다. 하나님은 그 친밀한 관계를 기초로 그분의 이끄심 가운데 의를 행한 사람을 받으신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제사와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듯이 지금도 교회 잘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중심에 그분을 경외하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알아보신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롬 2:6-11)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복음 이전 시대 사람들의 구원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기준이 이 정도로 중시되었다면, 복음이 전해진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복음이 전해진 이후에는 어디에 있는 누구든 반드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안환균 그말씀교회 담임목사. 변증전도연구소장. 미국 풀러신학교(D.Min). 저서로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