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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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8년  06월호 신학 교육과 삼성(三性) 형성 류호준 교수의 심중소회(6)

불편한 진실

2018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신학교도 많고 신학생도 많습니다. 숫자로 따져 대형 신학교도 있고,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군소 신학교도 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가르치는 신학 교수도 적지 않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국내에서뿐 아니라 해외의 유수한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젊은 신학자도 많습니다만, 안정적 터전이 없어 힘들어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의 경우는 더욱 암울합니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사역 자리는 포화 상태이며,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예전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최근에는 생계형 사역자도 급증합니다. 교계에도 실업률이 수직상승합니다. 신학교마다 지원 학생 수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라고 하지만, 아직도 매년 배출하는 졸업생 숫자는 엄청납니다. 수요보다 공급이 과잉인 셈입니다. 그들이 갈 곳이 있나요? 블루오션을 찾아 외국 선교지로 떠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용감무쌍하게 도전하지만 시행착오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를 놓고 볼 때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교회들은 대략 30%를 밑돌고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70%의 교회들은 미자립 교회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병폐 중 하나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한국 교회 전반에도 나타납니다. 중대형 교회는 전도라는 미명 아래 몸 불리기에 사활을 걸지만, 매달 목회자 생활비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영세한 교회는 그저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목회자 자신이나 그의 가족 구성원이 생활전선에 투입됩니다. 일용직 노동자, 편의점 알바, 택배 기사, 대리운전자, 보험설계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목사들이 상상외로 많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인근 교회들 간의 영적 연대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서로를 작은 파이를 놓고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경쟁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신학 교수들의 경우, 교회와 목회자가 직면한 실질적 어려움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대신 때론 송곳 같은 신학적 지식으로 현실 교회를 찌르고 목회자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개념 없는 정의의 투사 노릇을 하는 셈이죠. 그들은 상아탑에 안주해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신학교를 운영하는 주체들은 어떻습니까? 교단이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학교의 운영자들 역시 정직하고 정의롭게 학교를 세워 가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업하듯 하지 않고, 학생의 머릿수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 말하지 않고, 특정 이념주의에 매몰되어 학생들을 세뇌시키지 않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상당수 신학교들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단 지도급 인사들의 폼만 잡는 무책임한 태도들, 일 년짜리 교단장 자리에 목숨을 걸고 ‘사회적 명예만 거머쥐면 다’라는 속물근성, 합리성과 시민성을 상실한 폭력적인 다툼과 싸움, 권력을 쥔 자들의 무개념 갑질, 교수를 일회용 컵 정도로 생각하는 열등감 많은 권위주의자, 위험천만한 고공 줄타기와 치열한 자리다툼으로 한없이 일그러진 영혼, 영혼 없는 신학 구호 제창, 교회와 사회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주의 등이 신학교를 멍들게 합니다. 게다가 가축 본능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일부 교수나 학생들 역시 한국 교회의 앞날을 어둡게 합니다. 사회의 일반적 기준에도 못 미치는 제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학교는 신학 지식 소매업인가?

신학교를 들여다보면 한국 교회의 미래가 보입니다. 장차 한국 교회를 섬기고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운영자, 신학 교수, 신학생 모두가 정신 차려야 할 때입니다. 추잡하고 불결한 세속적 가치들을 청산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하늘나라 가치들로 신학 교육을 쇄신해야 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쇄신해야 합니까?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근본적 질문을 해야 합니다. 신학교는 왜 있어야 하는가? 신학 교수는 누구인가? 신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어찌 보면 유치한 질문 같지만 그래도 이런 기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목회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신학교들이 건강해지고, 건강한 교수들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풍토가 조성되고, 건강한 신학생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배움은 주로 학교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교수는 많이 아는 사람이고, 학생은 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수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학생의 머릿속으로 옮겨 놓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수가 박사라는 뜻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들은 모른다’는 뜻이었습니다. 과거 “박사님”이란 호칭은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학문적 정보(information)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교수요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이 획기적으로 발전된 몇 년 전부터 사람들(신학생들)은 교수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이 배움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전지’(全知)하신 분들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좌의정과 우의정인 ‘구글’과 ‘네이버’입니다. 신학적 정보를 얻기 위해서 굳이 신학교에 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정보의 정확도에 관한 한 교수보다 구글과 네이버가 월등합니다. 이제 신학교에서 교수들은 교과서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정보들을 반복해서 전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웬만한 과목들은 다 인터넷을 통해 배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앞으로 그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교육의 목표가 더 이상 신학적 ‘정보’(information) 축적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신학 교육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서구 신학교들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문구가 눈에 띕니다. 바로 “목회 사역을 위한 형성”(Formation for Ministry)입니다. 신학 교육은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형성’(formation)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물공장(鑄物工場)을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형성’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가는 것, 특정한 모습으로 빚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교가 주물공장 혹은 주조공장과 같아야 합니다. 적어도 신학 교육 3년 이상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세 가지 성품이 빚어지고 주형되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외우기 쉽게 ‘삼성공화국’입니다. 신학교 운영자, 신학 교수, 신학생 모두가 세 가지 성품을 형성하는 일에 서로 돕고 애를 써야 합니다. 아래는 제가 일전에 신학대학원 교육을 책임지고 있을 때 신학생들을 향해 권고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삼성(三性)공화국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의 목적을 이뤄드리기 위해 신학교에 적을 두고 전진하는 교수들과 신학생 여러분의 앞길 위에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신학대학원에 다니시면서 ‘삼성공화국’을 지향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삼성’(三性)이란 세 가지 성품을, ‘공화국’이란 세 가지 성품이 서로 화답하며 공존하는 나라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즉 세 가지 성품이 한 인격 안에 조화롭고 온전하게 형성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하게 될 여러분이 필수적으로 함양해야 할 삼성 형성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에 관심이 있는 신학도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영성’이란 단어를 ‘영적 성품’, ‘영적 성격’의 준말로 생각해 보십시오. 영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목소리를 깔고 쇳소리를 내며 거룩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개 석상에서 소리 높여 방언으로 기도하며 ‘할렐루야!’를 시도 때도 없이 발설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한 은사를 개인 소유물로 사용해 다른 사람을 압도하거나 위압감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을 가벼이 여기고 오로지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이런 형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딤후 3:5).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영성’이란 용어 대신 ‘경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니 너무 괘념하지는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영성 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영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두 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하는 삶입니다. 사역자들 가운데 신명(神命)에 복종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계명과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단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종로 5가를 서성거리는 목사들을 보십시오.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수치감을 상실한 창녀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참조, 렘 3:3; 겔 16:34)?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교인들을 향해 언어폭력을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들, 교회를 개인 기업으로 착각해 사적 이득을 탐하고 부와 명예를 대물리는 탐욕스런 사람들, 당신들은 정녕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나요? 둘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의존하는 기도의 삶을 가리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은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항복을 표시하며 적장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적장의 칼날이 언제 전쟁에 패한 장수의 목을 내리칠지 모르는 매우 절박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처분만을 기다리는 절박한 기도의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영성을 위해서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주야로’ ‘온종일을’ 영성 형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한 순간도 마귀에게 틈새를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선가 포복한 자세로 먹잇감을 기다리는 마귀에게 거점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참조, 눅 4:13). 당뇨병이 있는 사람이 매일 혈당을 체크하듯이, 여러분의 영성 수치를 점검하십시오. 얼마나 영성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체크하십시오. 신학생 시절부터 영성 형성에 관심을 갖는다면, 여러분의 목회와 교회는 건강할 것입니다. 영성 형성을 위해 정기적으로 고전 경건 서적들을 읽고, 훈련된 기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경건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두 번째, ‘지성 형성’(intellectual formation)에 헌신하는 신학 공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성’이라 함은 많은 양의 신학 정보 축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류의 지성은 교만에 이르는 첩경이 될 수 있습니다. 현학적이 되기 십상이며 잘난 척하거나 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드는 못된 습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신학적 지성이란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 대해, 피조 세계에 대해 일관된 인식 체계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들은 성경 신학이 다루는 세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지성을 형성하려면 첫째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성경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모토 중 하나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Tota Scriptura)에 대한 강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무시’(無視)해서도, 성경에 ‘무지’(無知)해서도 안 됩니다. 무지는 영적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죄입니다. 어쨌든 성경 전체를 통해 보이는 ‘세계’(‘하나님의 나라’)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폭식하지도 편식하지도 마십시오. 금식한다면 피골이 상접해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둘째로 지성 형성에는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지음을 받은 존재인지, 왜 질병과 죽음에 굴복하게 되었는지, 왜 그토록 돈과 명예와 성(性) 같은 것에 취약한지, 왜 교회와 사회는 갈등과 다툼과 분열이 끊임이 없는지, 국가 간의 분쟁과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등과 같은 질문들은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인식을 요구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사는 피조세계에 대한 인식을 함양하는 것이 지성 형성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속한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God’s Good Creation)가 왜 이처럼 일그러지고 깨어지고 왜곡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태계 파괴, 온난화, 개발과 환경 보존, 쓰레기 처리 문제 등과 같은 피조세계의 당면한 과제에 대해 우려하고 그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해야 합니다(참조, 롬 8:19-22). 물론 이것이 우리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후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런 문제를 하나씩 책임성 있게 풀어갈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성 형성이란 견고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신학도와 목회자들은 평생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덕성 형성’(virtue/character formation)에 예민한 신학 수련의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의 일곱 가지 악덕들을 하나씩 곱씹어보십시오. 탐색(lust), 탐식(gluttony), 탐욕(greed), 나태(sloth), 분노(wrath), 시기(envy), 교만(pride). 이 악덕들이 덕성 형성에 치명적 장애가 된다는 점을 상기하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피해야 합니다(참조, 딤후 3:1-5; 롬 1:28-32). 그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라는 착한 덕성(미덕)을 추천합니다(갈 5:22). 아니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 평화를 만드는 자,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받는 자’와 같은 ‘비움과 채움’의 덕을 쌓는 일에 관심을 두십시오(마 5:1-10). 악덕과 미덕 목록을 여러분의 책상이나 서재에 걸어두고 날마다 덕성 형성 수치의 증감을 점검해 보십시오.

이상의 권고는 단지 신학생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모든 영적 지도자와 목회자, 신학 교수, 특별히 신학교 운영자들이 심각하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신학 교육이 삼성 형성에 관심이 없다면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평판은 땅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 삼성 형성 중에 특별히 덕성(미덕)의 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경고음이 들리십니까? 누군가 잘 지적했듯이, 한국 교회의 목사나 신학교가 삼성 형성에 실패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기독론적’입니다. 달리 말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세례의 원리’를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를 떠날 때는 세 가지 성품이 여러분의 인격 안에 온전하고 견고하게 안착되기를 기원합니다. 삼성(三性)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세 가지 모두입니다. 이 길만이 신학을 공부한 후에 여러분이 ‘종교 행상인’(religious peddler)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최소치의 길입니다. 정기적으로 삼성 형성의 수치를 점검하십시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Dr.theol.). 저서로 《일상신학사전》, 《이사야서Ⅰ》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