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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18년  05월호 ‘엄마’가 되어 주세요 드라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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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나'는 엄마의 희생적 사랑안에 생명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 모든 엄마가 다 이해가 되네요. 심지어 혜나의 친엄마까지도.” 드라마 〈마더〉를 즐겨보았다는 동료의 말이다. 혜나의 친엄마 ‘자영’은 미혼모로 혜나를 낳았다. 울타리가 되어 줄 친정도 없이 혼자서 혜나와 버티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짐’이라고 여기게 된 엄마다. 유일하게 자기를 여자로 사랑해 준 ‘설악’이라는 남자와 동거하는데, 이 남자가 혜나에게 모질게 군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고 지낸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난 저 남자가 필요하니까. 시청자들이 가장 많이 분노한 ‘엄마 유형’이었지만, ‘이해가 된다’는 동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자영에게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살피고 지켜줄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힘을 길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보살핌이 주는 힘을 어려서부터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져 설악과 며칠간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면서 자영은 혼자 남겨진 혜나에게 친구로 햄스터를 사주었다. “둘이 잘 지낼 수 있지? 친구가 있으니까.” 한 번도 혜나의 의미를 묻지 않았던 엄마는 그렇게 즐거워하며 남자친구의 팔짱을 꼭 끼고 여행 가방을 달달 끌며 떠났다. 그 모습을 창문으로 보던 혜나가 햄스터에게 말했다. “우리가 저 여행 가방이었으면 좋겠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아이들은 엄마를 사랑한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 힘이 없으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혼자 힘으로 설 때까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독립까지의 기간이 긴 인간 아기는 ‘살기 위해’ 엄마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를 사랑한다. 그게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런 엄마가 만약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이에게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혜나는 엄마에 의해 어느 추운 겨울날 검은 쓰레기 봉지가 씌워진 채 버림을 당했다. 아저씨 ‘설악’이 혜나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장난치는 모습을 본 자영은, 엄마를 보자마자 살려 달라고 달려오는 혜나를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내리쳤다. “더러워.” 무엇이 더러웠을까? 아니, 무엇이 두려웠을까? 어쩌면 ‘설악이 혜나를 여자로 보나?’ 하는 놀라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가진 자기만의 남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어이없게도’ 딸을 향해 경쟁심과 경계심마저 발현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오빠,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이 추운 날씨에 저렇게 두고 가면 아이가 죽는다는 설악의 말에 자영은 앙칼지게 답했다. “상관없어. 차라리 죽어 버리면 좋겠어.”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말에, 혜나는 바스락거리던 움직임조차 멈추었다. 아, 엄마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내 세계의 전부인 엄마,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사랑해 준다고 믿고 싶었던 엄마의 이 말에, 혜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의지마저도.

그때 혜나를 구해 준 사람이 임시 담임교사인 ‘수진’이었다. 겨울 철새를 연구하는 박사인 수진은 철새 서식지에 몇 달 머무는 동안 한 초등학교 임시 교직원으로 복무했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데도 특별히 슬퍼하지 않던 아이, 늦은 밤 추운 바다를 얇은 옷차림으로 거닐던 아이, 그래서 눈에 자꾸 밟히던 혜나가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주변을 서성이다가 쓰레기 봉지에 담긴 혜나를 발견했다. 산 채로 서서히 얼어 죽어 가라고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 그 아이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니, 드라마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수진은 오죽했을까. 미친 듯이 비닐봉지를 뜯고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쳤다. 달려서 달려서 가보니 바다다. 이게 끝이다. 어쩌지? 문득 혜나를 향해 수진이 물었다. “혜나야, 잘 들어. 엄마는 널 버렸어.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엄마를 버려. 할 수 있겠니? 나를 따라 갈래?”

“그럼 이제 선생님이 내 엄마인 거예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혜나가 동의한다. 그리고 ‘윤복’이라는 이름을 택한 혜나. 도망가는 동안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면 위험할 것 같아 새 이름을 지어 주려는데, 혜나가 배달 전문 음식 홍보지를 펼쳐들며 그 이름을 원했다. “윤복이는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아서. 왠지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하하 호호 밥을 많이 먹을 것 같아서.”

어쩌면 자영보다도 수진이 더 이해가 안 가는 ‘엄마’일지도 모르겠다. 자영의 행동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끝까지 밀린 미성숙한 엄마가 보일 수 있는 양상이기는 하니까. 그런데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 스스로 도망자가 되다니. ‘혜나’의 존재를 끝내기 위해 수진은 혜나의 신발을 바닷가 바위 위에 두고 마치 사고사를 당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윤복’이와 무작정 도망쳤다. 심정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이는 법적으로는 ‘유괴’다. ‘윤복이 엄마’가 되기 위해 버린 것이 너무 많아서, 선택한 위험이 너무 커서, 그래서 갸우뚱했다. 필시 뭔가 사연이 있는 여자일 거야. 혹시 수진이도 학대 가정의 아이였나? 뭔가 접점이 있으니 저런 행동을 하겠지. 그런 추측을 해 보았는데, 이후 드러나는 수진의 사연을 들으니 이 ‘엄마’ 또한 이해가 갔다.

수진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첫 모습은 보육원 나무 밑에 자전거 줄로 꽁꽁 묶여 있던 자신이다. 필시 누군가가 그렇게 자기를 버렸던 것일 테고, 그 누군가는 엄마임에 틀림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니까 수진이도 엄마에게서 버려진 아이였다. 그러나 곧이어 유명한 배우에게 입양되어 제법 풍족한 삶을 살았다.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고, 양어머니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어머니 집에 정착할 수 없었고, 자꾸 밖으로만 돌았다. 스물다섯 살 이후로는 들어간 적 없는 집이다. 그러나 윤복이와 밀항을 하기 위해서 큰돈이 필요했던 수진은 결국, 늘 도망 나왔던 엄마의 집으로 향한다. “엄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천만 원만 주시면 안 돼요? 갚을 수는 없는 상황이에요. 그냥 주세요.” 

“그래, 현금으로 줄까? 아니면 계좌이체? 급한 거 보니 현금이겠구나.” 칼로 자른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양어머니 ‘영신’은 수진이 뿐만 아니라 이진, 현진 세 딸을 입양해 기른 엄마다. 젊은 시절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외로움에 수진이를 입양했지만 대체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세 딸을 정말 마음껏 사랑했다. 둘째 이진이는 한동안 자신이 친딸인 줄 알고 자랐더랬다. 동생이 입양 사실을 알고 자기처럼 겉돌까 봐 걱정한 수진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말에 함구하다 그리 되었다. 그런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성숙한 나이임에도 사실을 알고 나서 울고불고 좌절하는 이진이를 보며 영신은 단언했다. “네가 단 한 번도 내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내가 낳지 않았다는 이유로 갓난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안고 기른 네가 내 딸이 아니어야 하니?” 정말 자신 있었다. 세 딸에게 나는 온전히 엄마라는 것이 말이다.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다른 작은 존재한테 자기를 다 내어줄 때예요.” 이건 영신이 정의하는 엄마다. 

그랬다. 저 작은 존재들에게 영신은 자기를 다 내어주었다. 그런데 왠지 동생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은 아이가 수진이었다. 어느 정도 커서 온 이유도 있겠고, 무엇보다 수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친엄마와의 사연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영신도 막연하게나마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수진이는 결국 친엄마를 찾아 가려나 보다. “그 때까지만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 줄게.” 그래서 영신과 수진의 관계는 그렇게 늘 ‘임시적’이었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진은 늘 바닷가를 찾았고 새들을 좋아했다.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그 녀석들이 신통하고 부러웠다. 그렇게 제 집 찾아가는 새들을 따라 훨훨 날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을 꼭 닮은 혜나, 아니 윤복이를 데리고 도망치면서 점점 잃어버린 과거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억을 따라가다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동네 미용사, 그래서 사람들이 수군수군 범죄자라며 경계했던 ‘홍희’가 자신의 친어머니임을 알게 되었다. 용서할 순간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친엄마, 나를 버린 여자, 그것도 자물쇠를 꼭꼭 걸어 잠그고 가버린 여자. 그런데 떠올린 기억에서 그녀는 처참하게 멍들어 있었고 피울음을 울고 있었다.

“수진아, 기억해. 이 열쇠로 엄마가 꼭 열어주러 올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알았지?” 술만 먹으면 자기를 때리다가 이제는 어린 수진에게까지 손을 대는 동거남을 죽이고 살인죄로 복역하러 가면서 엄마가 약속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당황했던 엄마는 처음에는 수진이와 바닷가까지 도망쳤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수진아, 우리 함께 죽을까?” 자포자기한 엄마의 말에 어린 수진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싫은데? 난 살고 싶은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친엄마 홍희는 복역 후 수진이 사는 동네로 와서 조용히, 27년간을 수진의 등하굣길을 지켰다. 찾아 가려 했지만 부유한 배우의 딸이 된 수진의 모습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였다. 아, 나를 위해 기꺼이 살인자가 되었던 친어머니, 그녀를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나? 아니, 애당초 ‘용서’란 단어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야기를 수진이 앞에서 담담히 전하며 엄마 홍희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후회하는 한 가지는, 더 빨리 그 짐승을 죽이지 못한 거. 그래서 너를, 너를 너무 아프게 한 거.” 그래서 이 엄마도, 이 엄마의 선택과, 이 엄마의 삶도 또 이해가 되었더랬다.

엄마가 길러낸 딸들, 받은 사랑으로 다시 작은 존재들을 살리다

“자꾸만 도망갔던 거 미안해요. 엄마가 늘 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던 거, 나는 왜 몰랐을까요. 엄마,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엄마는 아기처럼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내가 다 해 줄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수진을 딸로 맞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든든한 지원자였던 엄마 영신이 암으로 죽음을 앞두자, 수진은 절규했다. “엄마는 짐 다 쌌어. 너랑 했던 그 모든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갈 거야. 엄마는 준비되었어. 그러니 놔 줘. 괜찮은 인생이었어. 후회 없어.” 담담히 작별을 고하는 엄마에게 아기처럼 졸랐지만, 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수진 역시 알고 있었다. 필시 내가 본 가장 멋진 죽음이었다. 배우였던 엄마, 그 두 삶을 종합한 아름다운 마지막이었다. 영신은 침대에 누워 가슴으로 낳은 손녀딸 윤복을 안고서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나는 많은 삶을 살아서 인사할 사람도 많아. 오늘은 〈우리 읍내〉 에밀리와 인사하려 해. 난 아홉 살 때부터 연극을 했어. 춤추고 노래하고, 사람들이 나를 보게 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지. 그런데, 열아홉 살 되던 때 갑자기 무대에 서는 게 무서워졌어. 너무 춥고 무섭고 숨이 차고 쓰러질 것 같았어.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거든. 엄마 없이 하는 첫 번째 공연, 에밀리 역할이었어. 네 살짜리 아이를 두고 죽는 젊은 엄마. 에밀리는 죽어서 저승에 가는데, 죽어서도 아이를 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에밀리의 대사를 읊으며 그때 알았어. 죽은 엄마가 시시때때 내 곁으로 온다는 걸.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무서운 느낌을 가진 적이 없어.”

그리고 영신은 윤복에게 〈우리 읍내〉 대본에서 에밀리의 대사를 읽어 달라고 했다. “안녕, 세상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듯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운 그 진가를 몰랐던 세상이여. 안녕. 아… 엄마.” 마지막 호흡을 내쉬며 가장 마지막에 영신이 토해낸 단어, 엄마. 그녀도 엄마에게는 아기였던 거다. 

나는 이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엄마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부르는 ‘엄마’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외마디처럼 느껴졌다. 엄마, 나 드디어 엄마에게로 가요. 엄마, 고마웠어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곁에서 내게 힘을 주어서요. 엄마, 나 열심히 살았어요. 아, 엄마. 이제 만나네요. 이런 말들이 모두 모여 단 하나의 단어 ‘엄마’로 흘러나온 듯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크고 단단하고 강한 위로와 보호를 찬양하듯이, 품고 안고 보듬는 그 따스한 성품을 ‘엄마’라고 부른들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어차피 하나님은 ‘영’이시지 않나. 하나님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닐진대, 우리가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름들 중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만한 이름을 적절하게 부르며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다면, 영신의 마지막 순간 그녀 입에서 흘러나온 ‘엄마’는 육신의 엄마 이상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아직 아홉 살, 자기도 아가인 ‘윤복’이는 유괴범으로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엄마 수진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보육원 동생들을 보살폈다. 수진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 그게 토대요 힘이 아니었을까? 늘 엄마에게 편지를 쓰면서 헤어져 있는 시간을 견디는 윤복이는 오늘도 자신이 도와주었던 동생 이야기로 편지지를 가득 채운다.

가정 폭력으로 누나는 3개월 전에 죽고 무작정 밖으로 도망 나왔다가 보육원에 오게 되었다는 한 동생 이야기를 전하며, 윤복이는 그 동생이 겁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동생이 곧 입양을 가게 되었는데, 양부모님께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요즘에 자기가 연습을 시키고 있단다. 그런데 그 편지의 마무리가 너무나 가슴이 아렸다. “그런데 엄마, 나는 입양을 안 갈 거예요. 하지만, 만약 입양을 가게 되면 평생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엄마와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리지만 힘이 없는 어린아이라서, 만약 어른들이 강제로 다른 양부모에게 자신을 양도한다면, 그럼 ‘사랑받지 않는 선택’을 하겠다는 이 마지막 말에 어찌 나만 통곡했을까. 윤복이의 바람과는 달리 아직 미혼인 수진보다 더 나은 조건의 양부모가 나타났고 입양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며 어찌 나만 애가 탔을까. 윤복이가 양부모의 차에 타고 보육원을 나서는 순간, 모두가 ‘수진 엄마’가 되어 숨조차 쉴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윤복이 양엄마가 될 사람에게 조용히 건넨 쪽지, 그걸 읽고 입양을 포기한 모습에 그 쪽지 내용이 얼마나 궁금하던지. “저를 데리고 가지 마세요.”

엄마들이 만드는 세상을 기대하며, 기다리며

결국 이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이었다. 수진은 윤복이를 입양했고 진짜 모녀가 되었으니까. 1회부터 마지막까지 탄탄한 구성은 물론 모든 등장인물들이 뱉어내는 주옥같은 명대사에 감동했던 드라마다. 그런데 만족스런 엔딩으로 돌아선 뒤에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저 드라마에는 왜 ‘아버지’가 없나? 아이는 엄마 혼자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드라마 ‘마더’의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다. 아버지 비슷한 역할을 하던 남자들은 엄마도, 아이도 보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위협이 되었다. 물론 아버지가 없으니 엄마도 아이도 고생하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드라마는 아닐 것이다. 남자란 존재는 자고로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는 편향된 남성 이해를 전하는 드라마도 아니라고 본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남편’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고된 노동을 감내하며 버티는지를 잘 안다. 그러니 드라마 〈마더〉의 감동을 아버지 대 어머니의 대립 구도로 이어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럼에도, 여성 연대가 보여준 ‘살리는 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공적 제도 속에 발현되지 못했던 저 아름답고 멋진 ‘돌봄의 힘’을 세상으로 불러올 수는 없을까? 내 아이만 챙기고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심 말고, 〈마더〉의 주인공들처럼 비록 혈연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도 나보다 작은 존재를 향해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엄마’의 사랑을 사적 관계에서만 낭만화시키는 것이 안타깝고 아까웠다. 신문지상에 연일 등장하는 아동 학대와 살인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엄마들이 가진 돌봄의 힘, 손해인 줄 알고 힘든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보다 작은, 나보다 연약한, 나보다 어린 생명을 향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과 손길을 내어주는 이 힘을 안다. 본다. 산다. 바로 이 힘으로 세상의 사는 방식을 다시 상상하고 만들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혼밥, 혼술, 혼영화에, 아니 이젠 혼자 죽는 고독사까지도 ‘일상’이 되어 버린 이 개별화된 사회에서, 엄마들이 보여 준 저 ‘돌봄의 힘’을 제도로 불러온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어떤 ‘다름’을 가져올까? 

너무나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실은 이것이 성경의 오랜 비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시고 약속하시면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참조, 창 12:3). 하나님의 이 계시를 아브라함의 혈연 집단으로만 제한해 해석한다면, 이는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보지 못하는 거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주변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유리방황해야 겨우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집트 사람, 바벨론 사람, 갈대아 우르 사람, 자고로 자기 본토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은 이렇게 지역 이름으로 불리는 법이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 고대 근동의 도시 근처를 전전하며 계약 노동자로 살아갔던 ‘히브리 사람’은 지역에 토대를 둔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남의 터전을 기웃거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이건 그야말로 ‘엄마’의 마음이다. 먹고 살만한 이들에게 약자를 보듬고 환대하라는 초청이다.

아브라함은 잘나고 강해서 복의 근원이 된 것이 아니라, 약하고 힘겨워서 그의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오늘날의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혜나, 어린 수진, 그 작고 여린 존재들이 복의 근원이다. 물론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어린 생명을 챙기고 살리자는 말은 아니다. 그건 제비가 물어다주는 박씨가 탐나서 제비 다리를 고쳐 주는 행동이니. 그러나 무한경쟁에 적자생존이 제도적 법칙이 되고, 그 안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뒤처지는 존재는 외면하는 것이 문화적 습관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조차 그리 살아서야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러니 ‘엄마’가 되어 달라는 초청이다. 가뜩이나 저출산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이 마당에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야 개인의 문제요 사적 선택이니 내가 권하는 것은 월권이다. 그러나 수진이가 검은 쓰레기 봉지 안의 혜나를 보며 엄마가 되기로 결단했듯이, 영신이 자전거 목줄에 묶여 보육원에 버려진 수진을 보며 엄마가 되기로 결단했듯이, 그렇게 온 존재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어린 생명들을 품는 사회를, 제도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영신처럼, 수진처럼, 입양을 하라고요? 그도 한 방법이나 그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정 단위든, 교회 부서 차원이든, 아님 시민운동이든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해 보자는 것이다. 모든 어린 생명에게는 ‘윤복이네’ 전단지처럼 하하 호호 행복하게 웃고 배불리 먹고 단잠을 자며 무럭무럭 자랄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으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 다양한 상상력과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5월이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 교수. 보스턴대학교신학대학(Th.D.). 저서로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드라마 속 윤, 리》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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