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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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18년  05월호 증가하는 교회 유급 봉사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3인 3색

교회의 일꾼들이 일정 금액의 사례를 받는 유급 봉사자들로 점점 채워져 간다. 지휘자, 솔리스트, 반주자, 오케스트라, 방송실 관리, 주방 봉사자까지 예전에는 성도들이 달란트로 섬겼던 일 대부분이 유급 사역으로 바뀌고 있다. 유급 봉사자 증가 현상은 대다수 교회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이며,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주제다. 이에 대한 목회자들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방성일  하남교회 담임목사

평생을 목회하고 그 뒤안길을 회고하면서 그때그때 만난 귀한 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안산의 모 교회 원로 목사님이 쓴 감동적인 간증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40여 년 전 신앙 생활하던 고향 교회의 한 장로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장로님은 새벽기도 때 해가 떠오를 때까지 제일 오래도록 남아 기도하시던 믿음이 깊은 분이셨다. 65세가 되던 해 장로님은 위암 말기 진단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기도하시던 장로님이 어느 날 자녀들을 불러 모으셨고 자기 수술을 위해 모은 돈을 가져 오라 이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이에 말기 암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심이다. 평생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는데, 내가 왜 천국 가기를 지체하겠느냐! 얘들아, 내 수술비로 교회 천장을 수리하도록 헌금해라.”

장로님이 임종하시던 날, 그의 집 위에 무지개가 떴다. 복음을 모르던 동네 사람들조차 그것을 보고 “아! 그 장로님이 천국에 가셨구나!” 말하면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이런 분들에게는 교회에서 일을 하고 사례를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다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순히 청지기일 뿐이라는 신앙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필자도 이런 면에서는 동의하고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초기 산업화 이전 농경시대는 비교적 시간의 여유도 있었고, 또 전문가 그룹이 많지 않았다. 중학생만 되도 주일학교 반사(교사)를 했다. 주일학교 수업을 하고, 끝나면 성가대를 하고, 낮예배와 저녁예배에 다 참여하고, 성가대 연습까지 마치면 한밤중이 되었다. 그래도 기뻤고, 감사하며 감당할 수 있었다. 필자의 경우 손으로 교회 주보를 만들기까지 했다. 등사라는 것을 할 때인데, 먹지에 철필로 긁어 글을 쓰고 롤러에 잉크를 묻혀 한 장 한 장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전문가 수준의 인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바쁘게 산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이민교회를 섬겼다. 한인교회들은 매우 열악함에도 오래전부터 전문가를 기용해 오고 있었다.
현재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만 해도 보컬 찬양 팀이 있고, 그에 따른 악기 연주자들이 여러 명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전문가를 세웠고, 그에 따른 비용을 지출한다. 찬양대는 2개가 있는데, 각각 지휘자, 피아노와 오르간 반주자, 그리고 기악 팀에 얼마의 비용을 지출하는 실정이다. 방송실은 말할 것도 없이 풀타임 사역자 4명이 있고, 파트타임 직원들이 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봉사자를 세워서 채우고 있다. 아직 주방은 풀타임 직원 없이 버티고(?) 있지만, 얼마 못 가서 유급 직원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봉사는 무급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순수한 봉사자로 세울 경우 발생하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전문성이 떨어진다. 둘째, 전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사례 없이 봉사자로 세울 경우 책임감이 결여될 우려가 있다. 그로 인해 교회가 지속적인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울 수 있다. 셋째, 사역이 갈수록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교회가 적절한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성 있어 보인다. 

이제 디지털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는 고도로 발전된 세상에 산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의 소망은 교회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청중은 사회 각층의 전문가들인데, 교회 안의 사역자가 아마추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일에도 아마추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변해서도 안 되지만, 그분을 표현하는 모든 것들은 변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섬김의 정신으로 가득 찬 교회

배창돈  평택대광교회 담임목사

어느 날 한 형제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목사님, 예수 믿지 않는 자도 성가대원이 될 수 있나요?” 사연을 들어 보니 오랫동안 전도했지만 믿음 가지길 거부한 음대에 다니는 친구가 이웃 큰 교회의 성가대 테너가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자신이 다니는 음악과 담당 교수가 그 교회 지휘자인데 친구에게 성가대에서 테너를 하면 보수가 지급되니 한번 해 보라고 해서 성가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의 모임이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 보수를 주면서 교회 사역에 참여하게 한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주님께서 이런 사람의 봉사를 받으실까? 

주님은 실력과 수준이 아닌 믿음을 보신다. 세계적인 수준의 노래보다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담긴 찬양을 받기 원하신다. 이 땅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서 섬김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하는 교회는 이 세상의 공동체와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공동체이기에 교회는 섬김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주님께 받은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드려 기쁨으로 섬기는 공동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존귀한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섬기는 자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섬기는 자들을 통해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고 그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에베소서 4:11-12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또한 성도들은 구원의 감격 때문에 섬긴다.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섬기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천국에 대한 상급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섬기는 자세로 하지 않고 보수를 받고 한다면 이는 주님의 뜻에 반한다고 할 수 있다. 돈 때문에 일하는 자는 감사가 없고 기쁨도 없다. 돈 받고 일하면서도 원망하고 불평한다.

마태복음 26장에는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내용이 나온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하는 것으로 여기며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분개한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칭찬하셨다.

섬길 때 물질까지 섬긴다면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물질의 유익을 전제로 섬긴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할 수 없다. 마태복음 6:24은 섬기는 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 대속물이 되어 피흘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한량없는 사랑은 우리가 생명을 드린다고 해도 다 갚을 수 없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무급으로 봉사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쁨과 감사로 섬긴다. 겸손히 섬긴다. 알아달라고 내세우는 사람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급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교회가 섬김의 정신으로 가득 차면 건강해진다. 그러나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 많은 교회는 무기력한 공동체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몸 된 교회를 섬긴 자들은 주님께 받을 상급이 있다. 그러나 대가를 받고 일한 사람은 주님을 섬겼다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은 다시 오실 주님께서 우리 섬김에 대해 상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보여 준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교회는 섬기는 공동체다. 섬기기 위해 오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는 이 땅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건강한 교회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섬김의 정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차기를 소원한다.

마르다의 손과 마리아의 마음으로

문학준  묵동교회 목사

몇 년 전, 어느 초교파 행사에서 열심히 섬기고 있던 봉사자들의 옷에 새겨진 문구를 보았다. ‘마르다의 손과 마리아의 마음으로’ 필자의 마음에 쏙 스며든 멋진 표현이었다. 어느 누가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마르다’같이 바쁘게 봉사만 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주님이 칭찬하신 ‘마리아’같이 주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은혜를 누리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눅 10:38-42).

한편 주님과 마리아의 영적인 교제 이면에는 마르다의 봉사가 뒷받침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 이외의 봉사들로 분주하기만 했던 마르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지, 마르다의 봉사 가치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사랑을 받으려면 다른 누군가 사랑을 베풀어야 하듯이, 은혜의 말씀과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 뒤편에는 현실적인 땀의 수고와 헌신을 하는 봉사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마리아(들)의 은혜로운 시간을 위해 봉사하는 마르다(들)의 수고는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교회 내 여러 봉사의 영역이 무급 봉사자들로도 충분히 감당이 되었다. 하지만 성도들은 갈수록 고령화되는 반면 사역은 전문화·다양화가 요구되다 보니 교회 안의 봉사 풍토 또한 바뀌고 있다. 교회의 미디어, 찬양, 돌봄 사역 등의 비중이 커지고, 교회 건물이 대형화되다 보니 식당, 청소, 차량 봉사도 유급 봉사자들로 채워져 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을 나누어 보려 한다.

첫 번째, 봉사에 대한 상은 주님이 주심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자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2).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 성도가 주님을 위해 감당하는 봉사는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신다.  

두 번째, 유급 봉사자를 늘릴 때 교회 재정 사용의 적절성을 잘 점검해야 한다. 교회의 재정 수입은 대부분 성도들의 헌금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려진 재정의 헌신이기에 그만큼 투명하고 귀하게 쓰여야 한다. 유급 봉사자들의 증가로 인해, 인건비 지출 비중이 높아진다면 그만큼 전도비, 선교비, 구제비 등의 지출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세 번째, 교회의 일꾼을 세워가는 과정 또한 주님의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갈수록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요구하다 보니, 자칫 봉사의 본질을 놓치고 일 중심으로 가는 위험이 생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일꾼을 세우는 일은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한 사람을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세우는 사역이라는 점이다(고전 12:12-27). 

네 번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봉사는 높고 낮음의 수준이 없이 다 귀하다는 가치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이 기피하는 봉사의 분야를 유급 봉사자로 대체하는 병폐가 사라질 수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몸의 각 부분들이 다 귀하고 긴요하듯이, 교회가 한 몸으로서 건강하고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세상의 눈으로 봉사의 수준을 재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섯 달란트를 맡았든, 한 달란트를 맡았든 주님께서 맡기신 모든 봉사에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마 25:14-30).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봉사자들은 대예배 반주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급 봉사자들이다. 반주자의 경우 공부하는 학생이기에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한 집사님은 밤새 택시 운전을 끝내고 오셔서 차량 봉사를 하신다. 토요일 교회 청소는 나이는 많으시지만 마음만큼은 젊으신 권사님·집사님들이 몸이 불편하심에도 오셔서 섬겨 주시거나 중고등부 학생들이 와서 섬긴다. 

물론 무조건적 원칙을 내세워 무급 봉사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 교회의 규모와 형편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형화된 교회 시스템이나 현대 젊은 성도들의 삶의 방식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의 유급 봉사자와 무급으로 섬기는 봉사자의 조화로운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교회는 지체들이 최선의 에너지와 신실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을 계속해서 스스로 확증해야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봉사에 임해야 한다. 교회의 운영이 목회자, 장로와 같은 당회 지도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인 나의 몫임을 자각한다면, 단순히 유급·무급을 떠나서 더 적극적인 헌신의 모습이 나올 것이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늘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고자 했던 다윗의 고백처럼, 날마다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원함으로 주를 섬기는 성숙한 한국 교회가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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