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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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05월호 가정과 교회를 살리는 헌금 가정 경제를 돌보는 목회

가족들의 생명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준비되어 있을 때는 "십분의 일"이라는 표준을 참고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하게 헌금을 드려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인간의 삶을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했다. 특별 은총과 일반 은총 영역이다. 두 영역은 통전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이며, 하나님이 두신 법에 순종해 운영할 때 견실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존립이 가능하다.

시간적인 기원의 의미에서는 일반 은총이 선행한다. 일반 은총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인 면에서도 특별 은총에 선행한다. 그러나 타락한 세계 안에서는 인간을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특별 은총이 없이는 삶의 모든 영역이 궁극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가치론적인 의미에서는 특별 은총이 선행한다.

일반 은총 영역의 형성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기관이 가정이라면, 세상을 향해 특별 은총을 공급하는 중추 기관은 교회다. 역설적인 사실은 가정과 교회가 두 영역의 핵심을 차지하는 근본인 중추적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상 가장 취약하고 해체되기 쉬운 기관이라는 점이다.

이 두 기관이 이처럼 취약한 이유는 모두 우연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형성되었고, 또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과 교회의 형성과 해체 과정에는 강제가 개입하지 않는다. 가정 형성의 시발점이 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우연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극단적인 가정 해체 방법인 이혼도 부부가 마음으로 결정하면 이루어진다. 또한 가족들 가운데 사고나 질병이 생기면 가정은 순식간에 해체될 수 있으며, 자녀들이 성장하고 독립해 별도의 가정으로 분가하면 자연스럽게 해체 과정을 겪게 된다.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크게 부흥했던 교회도 믿음과 신뢰가 깨지면 쉽게 와해된다.

이 점에서 가정이나 교회는 특정한 기능과 목적을 위해 설립된 기관인 국가, 기업, 학교와 차별된다. 국가, 기업, 학교 등은 특정한 목적과 강제 수단에 의해 조직의 안정성이 뒷받침되며 입회와 탈퇴 해체가 쉽지 않다.

가정 경제는 왜 중요한가?

재정은 기관이 견실하게 유지되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재정에서도 가정과 교회의 취약성은 그대로 반영된다. 국가는 강제로 거두는 세금에 의해 비교적 항구적이고 안정적으로 조직을 유지한다. 기업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기관이며, 학교는 학생이 납부하는 등록금에 의해 안정적으로 조직을 유지한다. 국가나 기업이나 학교가 재정 확충에 실패해 재정 위기에 몰리거나 부도가 나 문을 닫을 경우 구성원이 상당한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성원들의 생명 자체가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교회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우선 가정이나 교회는 재정의 확보 방법이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의지와 역량에 좌우된다. 가정의 경우 가장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자발적인 의지와 역량으로 재정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에게 자발적인 의지가 없거나 역량이 안 되면 가정 경제는 급격하게 취약해진다. 가정 경제가 취약해지면 가정 구조 자체가 붕괴 위기를 맞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재정은 전적으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에 의존하는데,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교회 재정은 이내 취약해진다. 교회 특성상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교회와 가정은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가정은 가정 경제가 붕괴되면 가족의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교회는 재정이 취약해져도 교인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일이 없고, 운영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 교인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데 반드시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한 가정에서 교회와 관련한 재정 계획을 세울 때 배분 비율의 주된 비중을 가정 경제의 원활한 운용에 두어야 하는 근거다.

구약의 십일조 정신

구약 시대 때 헌금의 표준으로 제시한 것이 십일조다. 십일조를 드리는 방식에 관해 구약성경이 제시한 정보들은 가정 경제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지침이다.

첫째,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활비(민 18:20-32)를 포함한 구제의 목적(신 14:22-29)과 성전 제사에 필요한 비용 충당(신 12:1-19)을 위해 드렸다. 이 말은 헌금은 교회의 운영을 위해 드린다는 뜻이다. 교회의 전임사역자들의 생활비, 교회 운영, 교회가 실시하는 선교와 구제 및 사회봉사가 헌금의 용처(用處)가 된다.

둘째, 십일조는 강제로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데서 시작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창 14:17-24)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했을 때(창 28:10-22) 철저하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기로 서약한 것이다.
모세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적인 의무로서 십일조를 드리도록 규정했는데(레 27:30 이하), 이 규정을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규모가 가족 혹은 부족(지파) 단위로 유지하다가 모세 시대에 이르러 국가 공동체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의 성격 변화에 따라서 관련된 제도들도 변화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현대의 국가와는 달리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 사회였다. 따라서 종교적 공동체를 위한 헌금과 국가를 위한 세금이 나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십일조는 성전 봉사를 위한 종교적 헌금과 국가를 위한 세금의 성격을 동시에 지녔고, 강제 의무 조항으로 부과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현대 사회에서 세금은 강제 부과 항목이지만, 교회 헌금은 강제 부과를 부여할 수 없다.

셋째, 획득한 소득의 10분의 1을 헌금으로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10분의 9는 가정 경제 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전제한다. 성경은 십일조를 하나님의 성물(레 27:30)로 선언한다. 이스라엘 제사 의식에서 10분의 1은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로 십일조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물이다. 그리고 이는 10분의 9를 가정 경제를 위해 운용하는 것이 소득을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임을 승인해 주신다는 뜻을 지닌다.

넷째, 레위기 27:32은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릴 때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라고 규정한다. 이 말의 의미는 9번째 통과하는 것까지는 헌물로 드려야 할 의무가 없음을 뜻한다. 이는 생계를 유지하기 버거운 빈곤 계층의 경우 십일조를 드리는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는 뜻이다. 현대 국가가 일정한 소득 수준을 넘지 못하는 빈곤한 가정이 세금 부과를 면제해 주고 오히려 국가가 생계비 지원을 해주는 것처럼, 교회도 생계유지가 어려운 빈곤한 가정에 대해서는 무리하게 헌금을 하지 않도록 여지를 마련해 주고 오히려 교회가 구제의 차원에서 돕는 것이 바른 헌금 정책의 방향임을 시사한다.

바울의 헌금관

신약 시대로 눈을 돌려볼 때 가정 경제와 교회 헌금 관계에 관해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헌금에 대한 바울의 태도다. 헌금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살피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관점은 고린도전서 10:31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모든 일’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대상이 된다고 말하며 특별히 “먹든지 마시든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가정 경제 운용에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따라서 바울은 가정 경제를 운용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헌금에 대한 바울의 관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바울이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된 선교 사역 기간 동안 사역하는 교회로부터 일체의 사례금을 받지 않고 사역에 임했다는 점이다. 바울은 자신의 생활비와 활동비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들의 생활비까지도 천막을 만드는 고된 노동을 시행해 벌어들인 돈으로 충당했다.

교역자의 생활비는 교회에 드리는 헌금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다. 바울이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의 생활비 및 활동비를 교회 헌금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울이 성도들에게 교회에 내는 헌금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헌금에 대해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바울이 사역한 교회들이 모두 바울이 설립했거나 설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생 교회들이어서 성도들의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에게 무리하게 헌금을 요구하거나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성도들을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서다. 바울이 헌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교회의 부유한 성도들의 재정 지원에 의지하게 하는데, 이렇게 되면 바울의 관심이 부유한 성도로 편향될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헌금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은 고린도후서 9:7에 요약되어 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헌금을 한다는 말은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서” 한다는 뜻이다. “억지로”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는데 외부의 압력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태도를 뜻한다. 헌금은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에 아픔을 느끼면서 해서는 안 된다. 헌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또 고린도후서 9:5은 ‘준비하는’ 연보가 참된 연보라고 말한다. ‘준비한다’는 말은 즉흥적인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하게 계산해 보고, 마음을 전부 담을 수 있는가, 드리고 난 후 후회함이나 주저함이 없는가를 모두 따져 보라는 뜻이다.
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억지로,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에 아픔을 느끼면서, 후회함이나 주저함이 있는 상태에서 헌금을 드릴 수도 있겠지만,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정당한 이유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가정 경제의 어려움이다. 가정 경제는 가족들의 생계와 직결된다. 생계가 위협받을 만큼 재정 상황이 어려우면 헌금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이유로 마음을 전부 담을 수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헌금을 드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적 경제 운용법

지금까지 간략하게 서술한 구약의 십일조 정신과 바울의 헌금관을 가정 경제와 관련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가족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준비되어 있을 때는 ‘10분의 1’이라는 표준을 참고해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하게 헌금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가족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만큼 빈곤한 경우에는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기보다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우선적으로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성도가 교회에 헌금하기보다는 교회가 성도를 구제의 대상으로 선정해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고아원에 후원금이 들어온 경우 이 중에서 십일조를 떼어 교회에 헌금을 하거나 예배당 건축 헌금을 해서는 안 되고 후원금 전액을 고아들을 따뜻하게 입히고 먹이는 데 쓰는 것이 바른 경제 운용법이다.

믿음의 도전

위에 제시한 통상적인 상태에서의 표준적인 가정 경제와 헌금 운용 방법 외에 믿음이 강한 자들이 비상한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헌금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신자들과 함께하시며, 신자들의 모든 삶의 순간을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살피시며,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우실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 방식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가정 경제가 극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실 것을 믿고 헌신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다.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이 길에 도전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믿음의 도전을 감행한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사르밧의 과부의 결단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수년 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던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과부에게는 자신과 아들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분량의 가루와 기름밖에 없었다. 엘리야는 그것으로 자기가 먹을 음식을 우선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냉정하게 요구했는데, 사르밧 과부는 이 요구에 순종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과부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먹을 것이 끊이지 않게 해 주셨다(왕상 17:9-14).

신약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헌신을 하는 성도의 사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오면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가난한 상황에서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하셨다(눅 21:1-4). 근근이 생계유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고린도후서 8:1-3에 기록되어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 성도들의 헌금 태도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으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해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케도니아 교회들, 특히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여러 차례 선교 후원금을 보냈다. 그런데 본문은 이 교회의 경제적 상황을 “극심한 가난”이라고 묘사한다. “극심한 가난”은 바닥에 완전히 떨어져서 더 떨어질 곳조차도 없는 가난의 상태, 곧 생계유지 자체가 어려운 빈곤을 뜻한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이런 곤경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 교회는 성도들이 비상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에 근거하여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결단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자발적 헌금

그런데 이와 같은 신앙의 결단은 전적으로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깊이 그리고 충분히 생각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가정 경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헌금을 하는 성도가 가정 경제를 중시하면서 적절한 원리에 따라 헌금을 하는 성도를 정죄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헌금의 방식 가운데 어느 방식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성도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한다.

특히 교회는 가정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헌금하는 방법을 성도들에게 강제해서는 안 된다. 엘리야가 매정한 태도로 사르밧 과부에게 가족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먹거리까지도 자기 자신을 위해 헌납할 것을 제공한 행위는 오늘날의 교역자들이나 교회가 본받아야 할 일반적인 모범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의 뜻으로 그런 요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한 후 요구한 것이다(왕상 17:8, 9).

간혹 예배당 건축을 하면서 장로들에게는 천만 원 단위의 헌금을, 권사들에게는 백만 원 단위의 헌금을 의무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독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장로가 되었거나 권사가 되었어도 거액의 헌금이 가정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데, 이 경우에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또한 많은 교회들에서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로 취임할 때, 감사 표시로 거액의 헌금을 하도록 직간접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도 잘못된 헌금 관행이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가정 경제를 건강하게 운영하는 것과 헌금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운영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가정 경제가 정말로 어려워서 생명 유지가 위협받을 정도의 상황에서는 헌금을 하지 않으면서 가정 경제 운용에 집중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오히려 교회가 성도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야 한다.

성도들이 일용할 양식에 어려움이 없다면 10분의 1을 적절한 표준으로 참고하면서 정성을 다해 헌금해야 하며, 일용할 양식 이상의 넉넉한 재정을 운용하는 가정이라면 더 풍성하게 연보를 해야 한다. 성도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가정 경제가 어렵다 하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생계를 책임져 주신다는 강한 믿음에 근거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도록 헌금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성장해 가야 한다. 

이상원 총신대학교 기독교윤리학과 교수. 네덜란드 캄펜신학교(Th.D.). 저서로 《기독교 윤리학》, 《21세기 사도신경 해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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