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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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8년  02월호 불의한 재정대리인과 가난한 나사로 책별 성경 연구 | 누가복음 16장

본문 사역 및 해설

[1]그리고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에게 재정대리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그 주인이 받았다. [2]그리고 주인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이런 것을 듣는다는 말이냐? 너의 재정대리인 장부를 내놓아라. 왜냐하면 이제 재정대리인을 너는 할 수 없다.” [3]그러자 재정대리인이 속으로 말했다. ‘내 주인이 내 재정대리인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구나. [4]직분을 빼앗겼을 때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지 알았다.’ [5]그러고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명씩 각각 부른 후에, 첫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얼마나 내 주인에게 빚을 지고 있느냐?” [6]그리고 그가 말했다. “기름 3310리터 정도 빚을 졌습니다.” 그러자 재정대리인이 그에게 말했다. “빚증서들을 가지고, 앉아서 빨리 1655리터라고 고쳐 써라.” [7]그러고서 다른 이에게 말했다. “너는 얼마나 빚을 졌느냐?” 그가 말했다. “밀 3만 9000리터 정도 빚을 졌습니다.” 그가 말했다. “너는 빚증서를 받아서 3만 1200리터라고 고쳐 써라.” [8]그런데 주인은 대리인이 현명하게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의한 대리인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이 세대의 자녀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9]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생명이 다할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영접할 것이다. [10]작은 것에 신실한 사람은 큰 것에서도 신실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 불의한 사람은 큰 것에 대해서도 불의하다. [11]그래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않다면, 누가 너희에게 진실된 것을 맡기겠느냐? [12]그리고 다른 것들에서 신실하지 않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 [13]어떠한 종도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명을 미워하고 다른 한 명을 사랑할 것이며, 혹은 한 명에게 헌신하고 다른 하나는 멸시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재물을 섬길 수는 없다. [14]이 모든 것을 돈을 사랑하던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비웃었다. [15]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높임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되어 모두가 그 왕국으로 들어가도록 강권적으로 권면을 받는다.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하늘과 땅이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18]그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모든 사람들은 간음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남성으로부터 버리운 여성과 결혼하는 자도 간음을 하는 것이다. [19]그리고 한 부요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같이 화려한 삶을 즐겼다. [20]그런데 나사로라는 이름의 어떤 가난한 사람이 아픈 채로 그 부자의 문 곁에 쓰러져 있었다. [21]그 부자의 탁자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 먹기를 바랐지만, 개들이 와서 그의 병창을 핥았다. [22]그리고 그 가난한 자가 죽었고,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다. 그리고 또한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다. [23]그리고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그의 눈을 들어, 멀리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24]그리고 그 자신이 부르면서 말했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할 수 있도록 나사로를 보내주소서. 왜냐하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25]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네가 살아 있을 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나사로는 바로 그때 좋지 않은 것들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지만 너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에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큰 틈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해도 할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다.” [27]그러나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구합니다. 조상이시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주소서. [28]나에게 형제가 다섯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증언해서, 이들도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주소서.” [29]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그들의 말씀을 듣게 하라.” [30]그러나 부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만일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난다 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1]그리고 또한(de. kai,데 카이) 개역개정판 성경은 ‘또한’이라고 번역한다. 한국어 성경은 접속사가 많이 나오는 것이 어색할 수 있어서(헬라어는 접속사가 많은 언어다) 많은 경우에 접속사 번역이 생략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데 카이가 앞단락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접속사이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을 살려서 번역했다.
재정대리인(oivkono,moj오이코노모스) 이 단어는 ‘청지기’보다는 ‘재정대리인’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 번역의 중요성은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영어 성경(NRSV, ESV, NIV)에서는 manager(경영인, 대리인)라고 번역했다. 
[2]재정대리인 장부(to.n lo,gon th/j oivkonomi,aj톤 로곤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개역개정은 ‘청지기 사무’로 번역한다. 그러나 여기서 ‘로고스’는 ‘사무’보다는 ‘장부’(account)를 의미한다. 이러한 용법은 고대 파피루스 자료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참조. BGU 1.4; BGU 4.1050; P.Tebt. 1.26). 영어 성경은 필자의 사역과 같이 번역했다(NRSV, ESV, NIV: account of your management).
[6-7]빚증서(gra,mma그람마) 한국어 성경에 ‘증서’로 번역되어 있는 ‘그람마’는 일반적인 증서가 아니라 '채무 계약서'를 의미한다(참조, BGU 1.326; P.Oxy. 1.37). 본 사역에서는 ‘빚증서’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NRSV, ESV, NIV)에서는 보다 일반적 의미의 ‘bill’(증서)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debt certificate’(빚증서)가 더 나은 영어 번역일 수 있다. 
[8]프로니모스(froni,mwj)를 영어 성경에서(NRSV, ESV, NIV)는 ‘재빠르게, 약삭빠르게’(shrewdly)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프로니모스는 ‘프로네마(실천지)를 잘 사용하는’이라는 의미로 ‘현명하게’ 혹은 ‘지혜롭게’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개역개정판 성경은 ‘지혜롭게’라고 번역했다. 
[9]생명이 다할 때에(o[tan evkli,ph호탄 에클리페) NRSV는 이를 ‘when it is gone’이라고 번역했다. 반면 ESV는 ‘when it fails’라고 번역한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없어질 때에’라고 번역한다. 이 표현은 뒤의 ‘영원한 장막’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죽음과 관련된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본 사역에서는 ‘생명이 다할 때에’라고 번역했다.
[9, 11]재물(mamwna/j맘몬) 맘몬은 ‘재물, 재산, 부’를 지칭하는 아람어 단어에서 유래한 어휘다. 본 사역에서는 ‘재물’이라고 번역했다.
[14]어떤 고대 사본에는 바리새인 앞에 접속사 ‘카이’(그리고)가 존재한다. ‘카이’가 존재한다면 14절의 해석은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들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을 비웃었다”가 된다. 그러나 ‘카이’는 원문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필자는 ‘카이’가 없는 것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에서 직접적 청중은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포된 청중은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제자들(1절을 보라)과 보다 넓은 독자들을 포함할 것이다.
[16]하나님의 왕국(hv basilei,a tou/ qeou/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 이 구문을 ‘하나님 나라’로 번역하는 한국어 성경은 원문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다. 바실레이아는 고대의 정치 체제였다. 고대의 정치 체제에는 왕정(바실레이아), 귀족정, 공화정, 혼합정체, 과두체제 등이 있었다. 그렇다면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주격적 소유격) 혹은 ‘하나님께서 왕이신 정치 체계’로 보고, ‘바실레이아’를 ‘나라’라는 일반적 명칭보다는 ‘왕국’이라는 구체적으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영어 성경은 ‘kingdom of God’이라고 번역한다.
[31]듣지 않을 것이다(peisqh,sontai페이스테손타이) 31절 말미의 페이스테손타이가 어떤 고대 사본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우데 … 피스튜수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적인 표현인 ‘믿지 않을 것이다’보다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가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 사역에서는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단락 구분

16장의 전체적인 구조는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1-13절)와 나사로의 비유(19-31절) 사이에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1-13절)
1) 이야기(1-8절)
2) 추가적 강조점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9-13절)
2.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14-18절)
3. 나사로의 비유(19-31절)
1) 부자와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의 처지 비교(19-21절)
2)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 이후의 처지 비교(22-23절)
3) 부자의 아브라함에 대한 호소와 아브라함의 반응(24-31절)


분문 해설

[1] 그리고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에게 재정대리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그 주인이 받았다. 본 비유는 가장 난해한 비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절이 접속사 ‘데 카이’(그리고 또한)로 시작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본 접속사는 16장의 비유가 15장의 탕자 비유에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15장과 16장은 재산 상속과 가정 경영(오이코노미아)의 비유로 개념적 연속성이 존재한다. 15장의 탕자 비유와 16장의 비유는 가정과 관련된 비유로서 개념적 유사성이 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했고, 재정대리인은 집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 탕자의 비유와 본 비유는 약간 상이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개념적으로 재정과 관련된 비유로 이후에 이어질 나사로의 비유를 연결해 주는 경첩(hinge)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1절의 재정대리인(오이코노모스)은 집주인(퀴리오스)의 임명을 받아서 집안의 재정과 행정을 대신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종이었다.1 오이코노모스는 일반적인 재정을 처리하는 역할, 토지 관리인으로서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관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이코노모스는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관리자 신분이다. 오이코노모스를 한국어로 ‘청지기’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본 비유에서 ‘오이코노모스’를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청지기’의 전제를 가지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청지기의 행동이 선해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으며, 청지기가 청지기답게 행동하지 않고 불법적인 행동을 함에도 왜 집주인에게서 난데없이 칭찬을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본 비유의 핵심은 청지기가 선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이 오이코노모스가 하는 행동의 어떠한 측면에 있다. 그 측면이 무엇인지는 아래에서 살필 것이다. 우리는 오이코노모스가 그레코-로만 사회의 흔한 직분인 재정대리인이며, 본 비유는 보다 일반적인 재정대리인에 대한 비유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초점은 ‘선한 청지기직’이 아닌 ‘재정’ 혹은 ‘돈’의 사용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이코노미아는 본래 ‘가정 경영’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또한 오이코노미아는 고대 철학자들의 윤리적인 주제 중 하나였다. 잘 알려진 고대 철학자들인 크세노폰, 필로데모스, 테오프라스토스 등은 ‘가정 경영에 대하여’(가정  경영론)라는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저작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대 가정의 범주가 단순히 혈연적 ‘가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종, 노예와 가정이 소유한 재산(특히 토지)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가정 경영론은 가족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것뿐 아니라 가정의 재산(특히 토지와 그 소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증식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저작 〈가정 경영에 관하여〉(peri. oivkonomi,aj)에서 철학자 필로데모스는 가정 운영에 있어서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가정 운영은 자신의 가정을 잘 관리하고, 다른 가정이 잘 운영되도록 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을 잘 유지하고 부를 잘 획득하는 것이며(column I.5-10; 참조, column IIIa 10-15), 또한 소득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재산을 증가시키는 것이다(frag. I.1-5). 이런 가정 경영에 대한 논의들은 고대인들의 가정 경영관과 그 목표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6장의 비유에서 재정대리인은 집주인의 재산을 증가시키기는커녕 낭비했기 때문에, 고대의 가정 경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고, 그렇다면 이것은 재정대리인의 직무 해고 요건에 해당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재정대리인은 집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하나님을 의미하며, 13절의 집주인(퀴리오스)도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에서 집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재산을 낭비하는 대리인은 아마도 자기 재산을 자기를 위해서 쓰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을 의미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면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2] 그리고 집주인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이런 것을 듣는다는 말이냐? 너의 재정대리인 장부를 내놓아라. 왜냐하면 너는 이제 재정대리인을 할 수 없다.” 집주인은 재정대리인을 해고하고 그의 장부를 회수하려 한다. 앞 절의 해설에서 말했듯이, 재정대리인이 집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증식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주인의 분노는 이해할 만하다.
[3] 그러자 재정대리인이 속으로 말했다. ‘내 집주인이 내 재정대리인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구나.’ 필자는 퀴리오스를 일반적인 주인보다는 ‘집주인’으로 번역했다. 재정대리인은 땅을 파는 노동을 피하고자 한다. 고대 세계에서 육체 노동은 하층민들이 하는 천대받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재정대리인은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 엘리트였던 바울은 회심 이후에 천막을 만드는 육체 노동(수공업)을 받아들인다.2 신약성경은 직업에 귀천이 있거나 육체 노동을 천시하던 당대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4-5] ‘직분을 빼앗겼을 때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지 알았다.’ 그러고는 집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명씩 각각 부른 후에, 첫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얼마나 내 주인에게 빚을 지고 있느냐?” 재정대리인의 새로운 목표는 자신이 해고된 후에 누군가의 집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재정대리인이 채무 관리인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주인은 은행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은 명시적으로 ‘은행가’(trapexi,thj트라페지테스)였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필자는 집주인이 은행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은 채무 관계에 나타난 고대 사회 은행의 역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재정대리인(오이코노모스)이 임의로 계약 문항을 수정할 수 있었다면 그 채무 계약은 공적인 계약이 아닌 사적인 계약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은행이 채무자들에게 돈을 대출해 준 것이 아니라, 적어도 채무 계약은 사적인 형태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집주인이 은행가가 아니었다면,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받을 빚을 가지고 있던 이 집주인은 누구일까? 우리는 먼저 고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왜 빚을 졌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인구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 특히 소작농들은 땅주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3 이러한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본 비유가 채무에 대한 비유일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청중에게는 소작농과 관련된 비유로 해석되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팔레스타인 농민들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비싼 소작료와 늑징에 대한 불만은 계속 쌓여갔으며, 이러한 사회, 경제적 원인 속에 불만과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 기원후 66년부터 발발한 유대전쟁이기 때문이다(마틴 굿맨). 많은 소작농들이 이 전쟁에 가담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도 경제적 불균등이 문제가 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부유층과 중산층은 상당히 적은 비율이었을 것이다(5-15% 가량). 약 80%의 사람들은 그날 먹을 음식만 가지고 있거나 그날 먹을 음식도 없는 상황이었다.4
우리는 고대의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얼마나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피터 간세이는 고대의 라리사와 아테네, 오데사 지역의 밀농사 실패율을 분석한다. 간세이는 오데사 지역의 농사 실패율은 46%, 라리사는 28.5%, 아테네 지역은 28%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본다.5 고대 세계는 현대와 같이 발전된 농법과 비료로 농사를 짓지 못했다. 재해, 날씨, 병충해에 당연히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한 해 농사를 실패한다면 고액의 소작료를 납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농사 실패율이 30-46%에 이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의 채무가 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소작민들은 필연적으로 지주들에게 고액의 채무를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본 비유에서 채무는 농민들이 일반적으로 지주에게 가지고 있던 채무였을 가능성이 있다(아래에서 더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6-7] 그리고 그가 말했다. “기름 3310리터 정도 빚을 졌습니다.” 그러자 재정대리인이 그에게 말했다. “빚증서들을 가지고, 앉아서 빨리 1655리터라고 고쳐 써라.” 그러고서 다른 이에게 말했다. “너는 얼마나 빚을 졌느냐?” 그가 말했다. “밀 3만 9000리터 정도 빚을 졌습니다.” 그가 말했다. “너는 빚증서를 받아서 3만 1200리터라고 고쳐 써라.” 본문에서 채무 증서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gra,mmata), 이것은 채무자가 집주인에게 한 번의 빚을 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빚을 지고 있어서 복수의 채무 계약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정대리인이 계약 문항을 변경할 수 있었는가? 일반적으로 고대의 계약서는 공증인(그라페이온)의 공증과 보증이 필요했지만, 많은 경우 공증인 없는 사적 계약도 유효했다. 공증이 필요한 계약이었다면, 채무자는 공증인의 보증이 없는 계약 수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공증인이 중간에서 보증하는 계약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재정대리인이 채무 계약을 임의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고, 채무자들이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계약 문항 수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대의 계약은 직접 계약과 간접 계약으로 나뉜다. 직접 계약은 계약 두 당사자가 직접 계약을 하고 은행의 중계 없이 직접 재정 사무를 계약하는 것이다. 간접 계약은 은행의 중계를 통해 계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비유의 그람마( gra,mma채무계약서)는 직접 계약에 해당될 것이고, 재정대리인이 모든 계약 행정을 담당하는 주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전형적인 계약서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계약서에 따라 당신으로부터 손으로 집으로부터 즉시 1120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음을 인정한다(BGU 1.272).” ‘손으로 집으로부터’(dia. ceiro.j evx oi;kou)라는 위의 형식이 바로 직접 채무 계약의 형식이며, 은행이 개입했을 경우는 ‘은행을 통해’(dia. th/j trape,xhj)라는 문구가 대신 삽입된다.
누가복음 16장의 비유에서 채무 계약은 이러한 직접 채무 계약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재정대리인이 계약을 임의로 수정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며, 이것은 또한 집주인이 은행가가 아님을 암시할 수 있다.6 또한 채무자들이 빚을 지고 있는 것이 현금이 아닌 현물의 형태라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지지한다. 고대의 소작인들은 자신이 재배하던 곡식 혹은 현물로 소작료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7 게다가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매년 전체 소출의 약 5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8 앞서 말했듯이 농사 실패율이 높은 상황에서 전체 소출의 5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다면, 그것은 소작농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채무자들이 농민들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소출로부터 나오는 일부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지만 높은 소작료를 지불하지 못해서 현물(밀과 기름)로 채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문에 나오는 기름 3310리터는 올리브 나무 150그루에 해당하는 분량이었을 것이다. 대럴 벅은 이것이 약 10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10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약 3년치 품삯에 해당된다.9 고대에서 1모디우스(8.73리터)의 밀은 2데나리온 가량에 매매되었다. 그렇다면 채무자가 빚을 지고 있는 3만 9000리터의 밀은 100에이커의 밭에서 생산된 밀 생산량과 맞먹는다. 이것은 노동자가 약 10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급료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채무자들은 고액의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재정대리인은 그들의 고액 채무를 줄여주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청중 상당수는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고, 고액의 채무를 덜어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했을 수 있다. ‘내 빚도 저렇게 줄여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의 반응이었을 수 있다.
[8] 그런데 집주인은 재정대리인이 현명하게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의한 대리인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이 세대의 자녀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재정대리인을 칭찬하는데, 이것은 비꼬는 냉소적인 말이라기보다는 정말 칭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심지어 이것을 현명한 행동으로 보았다. 케네스 베일리는 빚을 줄여줌으로써 채무자들이 집주인을 칭찬했을 것이고, 이것이 집주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1세기 사회는 명예와 수치의 사회였다. 명예를 얻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었으며, 수치에 처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채무를 줄여주는 것이 왜 주인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었는가? 케네스 베일리는 재정대리인이 칭찬받은 것은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성품에 대한 정확한 인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베일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데, 재정대리인이 칭찬받은 것이 ‘일을 현명하게 했으므로 칭찬했다’라는 것으로 보아 본 비유의 초점은 재정대리인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재정대리인의 행동은 왜 칭찬 받았는가? J. D. M. 데렛은 고리대금의 맥락에서 본 비유를 이해하려고 한다. 집주인이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재정대리인은 이러한 불법적인 고리대금을 통해 취한 이득을 반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재정대리인의 행동은 불의한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집주인이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는 없다. 3절의 집주인(퀴리오스)은 13절에서 하나님과 맘몬을 겸해 섬길 수 없다는 진술과 연결되는데, 13절에서 집주인(퀴리오스)은 하나님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집주인이 부정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은 본문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문의 논리상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집주인이 고리대금과 같은 불법적인 행동을 했다는 암시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앞서 말했듯이 집주인은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도되어졌을 수도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농민의 소작료와 채무와 관련된 상황 속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필자는 제안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상황에서 본 비유를 읽을 필요가 있다. 곧 재정대리인이 칭찬을 받은 이유는 어찌되었건, 농민들의 소작에 대한 비용 혹은 채무를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재정대리인의 사기에 해당하는 회계 조작이 아니라, 채무를 절반으로 줄여서 농민들에게 절반의 부담을 경감해 준 행동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8절). 곧 농민들의 부담을 절반으로 줄여주었기 때문에 채무자들의 칭송을 받은 집주인이 재정대리인을 칭찬했을 수 있다. 잘못된 방식이기는 했지만, 이 세상의 아들도 농민의 채무를 상당 부분 줄여주었다.
 예수께서 굳이 잘못된 방식의 예를 드신 것은 이 재정대리인이 빛의 자녀의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속한 사람도 채무를 줄여주는데, 빛의 자녀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지 말고 채무를 줄이는 행동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약서를 조작한 재정대리인의 행동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니라, 고액의 채무를 줄여준 그의 행동에 대한 말씀일 것이다.
더군다나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행동은 분명히 당대 가정 경영의 목표와 이상에 대해 정반대의 행동을 한 것이다(1절에 대한 필자의 해설을 보라). 가정 경영자는 가정의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재정대리인은 채무를 줄여줌으로써 가정의 재산을 증식하기는커녕 줄어들게 했다.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집주인의 재정대리인은 당대의 가정 경영의 목표를 거스르고 정반대의 행동을 했지만, 집주인은 이것을 칭찬한 것이다. 이러한 재정대리인의 행동과 집주인의 반응의 의의는 뒤에 이어질 적용 부분에서 검토할 것이다. 
[9]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어라. 이 말은 수수께끼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논의한 관점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8절에서 이미 예수님은 재정대리인이 ‘불의하다’(아디키아)고 말한바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의한’(아디키아) 재물이란 불의하게 모은 재물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재정대리인의 행동과 관계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불의한 맘몬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불의한 재정대리인처럼 행동하라는 암시일 수 있다. 즉, 가난한 농민에게서 받을 빚이 있다면 그 채무를 줄여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물로 자신의 이득을 다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라는 의미일 수 있다.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명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바리새인의 반응이 이 해석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 모든 것을 돈을 사랑하던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비웃었다”(14절, 아래의 해설을 보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고, 예수님의 비유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돈을 사랑하는 성향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재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영원한 장막으로 들어가지 못한 예는 이후에 이어질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일 것이다.
[13] 어떠한 종도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명을 미워하고 다른 한 명을 사랑할 것이며, 혹은 한 명에게 헌신하고 다른 하나는 멸시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재물을 섬길 수는 없다. 여기서 ‘종’은 oivke,thj(오이케테스)를 번역한 것이다. 오이케테스는 본시 가정의 구성원을 뜻하는 말이지만, 종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종은 가정의 한 구성원이었으며, 소속되어 있는 가정의 주인만을 섬길 수 있었다. 특히 노예는 소속된 가정 이외의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제외된다. 노예는 주인과 그의 가정 이외에 다른 사회적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종/노예의 특징을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퀴리오스)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가정의 구성원이며, 다른 주인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 그렇다면 재물에 종 되어서 얽매어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청지기 비유는 사실 일종의 가정의 비유이다. 이 가정은 물론 현대의 가정과 형태가 다른 고대의 가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4-15] 이 모든 것을 돈을 사랑하던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비웃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높임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14절부터 18절은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적어도 중산층에 속했다. 고대의 중산층은 잉여 재산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일을 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 일을 하느라 율법을 준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날 먹을 것이 없는 하층민은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안식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죄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세기에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하층민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인이 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바리새인은 잉여 자본이 어느 정도 있는,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유지하고, 증식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자인했을 수 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 모든 율법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눈에는 혐오스럽게 보이는 것(bde,lugma브데뤼그마)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신다.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였지만, 재물을 사랑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반대하신 것이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되어 모두가 그 왕국으로 들어가도록 강권적으로 권면을 받는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동사 비아제타이(bia,xetai)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적인 의미(중간태)로 본다면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난폭하게 대하다’라는 의미일 수 있다. 긍정적인 의미(중간태)로 본다면 ‘모두가 그 왕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의 수동태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왕국으로 들어가도록 강권적으로 권면을 받는다’라는 의미일 수 있다. 이 의미가 하나님 왕국(나라)으로 지속적으로 초청하시고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에 가장 적합할 수 있다고 본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사에 전환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으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요한을 옛 시대의 마지막 사람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하늘과 땅이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까지’라면 이것은 율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씀인가?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서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의 한 획의 떨어짐’이라는 것은 히브리어의 각 글자들을 구별해 주는 하나의 획 혹은 작은 글자를 나타낼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천지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거나 창조 때 주어졌으며, 창조 이전의 율법을 이스라엘의 구분됨(선택)과 연결해 생각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희년서). 유대인의 정체성과 토라 지킴은 불가분 연결된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 땅이 율법의 질서대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율법은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이 중요한 율법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고 나타낸다. 이 구절에 대해서 대럴 벅은 다음과 같이 옳게 말한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마땅하다면, 반드시 그들은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0
[18] 그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모든 사람들은 간음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남성으로부터 버리운 여성과 결혼하는 자도 간음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16-17절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말씀에 이어진다고 본다면, 율법의 요구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윤리를 요구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예로 결혼을 드신다. 예수님은 함부로 이혼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다. ‘버리고’라고 번역된 아폴뤼오(avpolu,w)는 당시 결혼의 문맥에서 볼 때 의미 있는 단어일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그러므로 결혼할 때는 결혼계약서를 작성했고, 결혼한 양자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결혼 계약서의 예는 다음과 같다(헬라어 파피루스 원문을 필자가 번역함): “뤼시마코스의 아들이며, oo세이며 oo에 흉터가 있는 하뤼오테스는 그의 아내 헤라클레이아(oo세이며, oo에 흉터가 있는)의 아버지(마론의 아들 디두모스 oo세이며, oo에 흉터가 있는 디두모스와 전에 함께 살았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에게 그의 현재 후견인됨에 대해 모든 계약 조건들에 관해 동의함을 선언한다. 하뤼오테스는 그(디두모스)로부터 계약에 따라서 은화 20드라크마의 결혼 지참금과 더불어서 직접 5아루라스 상당을 선물로 받으며, 폴레몬의 이비온 에이코시펜타루론 근처에 있는 디두모스에 속한 땅을 유산으로 받는다. 그 땅의 인접 토지들은 그것들에 대한 계약서들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금화와 은화의 지참금과 별도로, 같은 디두모스의 아내이자 헤라클레이데스의 딸이자 헤라클레이아의 어머니, 로두스는 같은 헤라클레이아를 위해 그에게(하뤼오테스에게) 두 장의 다른 계약서들에 따라서 유산과 노예들을 선물로 받는다”(P. Mich. 5.340[AD 45-46]).
고대의 결혼 계약서는 결혼에 대한 계약서지만, 위와 같이 지참금에 대한 계약서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은 위와 같은 계약서를 쓰고 결혼했다(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결혼 계약서인 P. Yadin 10, 18을 보라). 위의 계약서의 예를 볼 때 계약서는 상호적인 것이며, 결혼한 당사자가 이혼할 때는 오직 상호적 계약 해지를 통해서 가능하고, 상호 계약 해지와 함께 이혼한 여성은 결혼 시에 친정에서 남편에게 주었던 결혼 지참금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 지참금은 친정에서 결혼하는 딸에게 주는 일종의 유산 분배이기 때문이다. 내보내는(avpolu,w) 행동은 상호 계약 해지가 아니라 상대편을 내쫓는 행위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요셉은 마리아가 신실하지 않다고 생각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내보내려고(avpolu/sai아폴뤼사이) 했다(마 1:19). 상호적 계약 해지가 아니라 상대편 결혼 당사자(결혼 상대자에게 신실했던)를 내쫓는(아폴리오) 행동은 명백한 계약 위반에 해당하는 행위로서 결혼 상대편에 신실하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이 말씀을 당시 사회의 약자였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하기를 제안한다(마 5:31-32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명백한 약자였고, 예수님은 결혼한 여성이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18절 하반절의 말씀은 배우자의 간음 등 합당한 이유 없이 무분별하게 이혼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을 것이다. 내쫓는 행위를 통한 이혼은 원래 무효이기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 예수님은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으며, 결혼한 남성과 여성이 결혼 계약을 준수하기를 원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본 절에서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갑자기 끼어들어온 말씀이라기보다는 계약에 대한 예수님의 앞의 말씀과 일관성이 있다. 예수님은 채무 계약에 있어서 가난한 채무자를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그리고 결혼 계약에 있어서도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것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계명일 수 있다.
[19] 그리고 한 부요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같이 화려한 삶을 즐겼다. 예수님은 19절부터 또 다른 비유를 시작하신다. 본 비유에서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있다.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자색 옷은 매우 귀하고 비싼 옷이었기 때문에 매일 자색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행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운 베옷은 최고급 속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질 좋은 면직물을 지칭한다. 오늘날에도, 비록 보여 주기 위함은 아니지만 값비싼 겉옷 속에 비싼 명품 속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부자는 비싼 겉옷과 속옷을 입었고 매일같이 화려한 삶을 즐겼다. ‘매일같이’라는 말은 그가 매일 연락하는 삶을 사느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앞서서 율법을 지켰다고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돈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14-15절).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듯하지만 사실은 죄인들이다. 이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부자를 비판한다. 다만, 예수님이 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으시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예수님이 문제 삼는 것은 돈을 사랑하고 자신이 가진 돈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의 태도다. 본 비유에서 부자는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율법조차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 그런데 나사로라는 이름의 어떤 가난한 사람이 아픈 채로 그 부자의 문 곁에 쓰러져 있었다. 부자의 대문에 천대받는 가난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원문에는 거지가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가난한 사람(프토코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 비유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는 거지가 아님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본 비유는 어느 거지의 이야기가 아닌 보다 일반적인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관찰은 중요할 수 있는데, 그날의 먹을 것도 없는 하층민들이 고대 사회에는 약 30%에 이르렀을 것이다(스티브 프리센). 앞에서 말했듯이 고대의 농사 실패율은 상당히 높았다(앞의 4-5절에 대한 해설을 보라). 고대에는 현대와 같은 농사 기술이 없었고, 자연재해, 병충해, 날씨 등으로 인해 농사를 망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당시 일반적인 상황일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고대 세계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생존 자체가 목표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본 비유는 당시 청중에게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굶주리고 있던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사로는 히브리어로 엘라자르, 즉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청중은 나사로의 이름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삶에서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병들었고 가난했고 굶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사로’라는 이름은 일종의 역설을 형성한다. 본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사로는 이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안식의 복락을 누린다. 그렇다면 본 비유는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인가를 묻는 비유일 수도 있다. 현실 속에서 부유하고 잘 나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가난하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인가? 가난한 사람은 헬라어로 프토코스(ptwco,j)이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6:20에서 “가난한 사람(프토코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에서 사용된 단어다. 그렇다면 본 비유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누가복음의 관심이 반영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인 나사로와 같은 사람의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21] 그 부자의 탁자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 먹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개들이 와서 그의 병창을 핥았다. 가난한 사람은 음식물 찌꺼기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개는 현대 사회의 개와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개는 주로 애완견으로 사람들에게 애호를 받을 수 있지만,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개는 불길하고 상스럽고 멸시받는 존재였다. 개가 가난한 사람의 병창을 핥았다는 것은 나사로가 부정한 존재인 개들과 어울리는, 개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나사로의 비참한 삶을 암시한다.
[22] 그리고 그 가난한 자가 죽었고,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다. 그리고 또한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다. 그 가난한 자가 죽었다.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지만(evta,fh), 가난한 자는 장사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비참하게 죽어서 일반적인 애도의 절차에 따라 장사되지도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에 옮겨진다. 사람들은 가난한 자를 제대로 장사하지 않았지만, 그를 장사하고 천상으로 옮겨준 이들은 하나님께 명령을 받는 천사들이다. 현실 속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시라는 누가복음의 주제가 이 구절에서 반복된다.
[24] “조상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할 수 있도록 나사로를 보내주소서. 왜냐하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의 등장이다. 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고 언급하는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창시자(founder)로 이해하고 있었다(예를 들어, Philo, Abr 276; Heres 279).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해 있다고 믿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은 나사로가 아브라함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나사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가족’ 혹은 ‘이스라엘’의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주제다. 즉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해서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답한다. 누가의 대답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영이며, 교회에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책임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 비유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언급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에 아브라함이 있더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본 비유가 ‘누가 진정한 하나님 백성이냐?’라는 질문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신가? 현실에서 많은 재정을 소유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현실에서 수많은 ‘복’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그가 하나님 백성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 백성됨은 현실에서 일이 잘되고 복 받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 비유에 등장한 이유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가족’이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세의 복이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 사람 편이시라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참 하나님 백성일 수 있다. 현세에서의 성공이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25-26]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네가 살아 있을 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 우리와 너희 사이에 큰 틈이 있다.…” 본문은 나사로와 부자의 지위가 역전되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현세에서 받는 축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얘야’(te,knon)라고 부자에게 말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테크논은 ‘자녀’ 혹은 ‘후손’에 대한 호칭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가난한 자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음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복음 15:31에서 아버지가 탕자의 형을 같은 호칭(테크논)으로 불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그 혈통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본인이 목사 혹은 장로의 자녀라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본인이 현세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큰 틈’(스키마)은 사후에 사람들의 운명이 둘로 나뉠 것을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품에, 어떤 이들은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렸지만, 결국에는 음부에 거할 것이다. 
[27-28] “…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주소서. 나에게 형제가 다섯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증언해서, 이들도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주소서.” 유대인의 가족은 ‘아버지의 집’(베트 아브) 혹은 ‘조상들의 집’(베트 아보트)이라고 불렸다. 특히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의 가족은 주로 대가족 구조일 가능성이 있다. 고대 유대 가족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구조였지만, 아버지가 부재할 경우 형제 중심 구조(fratriarchy)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는 큰 형(로쉬 혹은 프레스뷔타토스)이 리더십을 가진다(예를 들어, Philo, Spec. Leg. 2.133-134; Josephus, Ant. 1.248). 아버지의 집(즉, 유대인의 가족)에 형제가 다섯이 있다는 것은 가부장인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형제들이 모여서 살던 대가족 구조와 관련될 수 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주소서”라는 간청은 부활과 관련된다. 즉,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관련해 부활의 메시지를 어떤 이들이 거절할 것이라는 함축이 있을 수 있다.
[29-30]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그들의 말씀을 듣게 하라.” 그러나 부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만일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앞서 논의했듯이 죽었다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나도 어떤 이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회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는 말씀이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의 말씀과 합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히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이 전한 말씀을 재서술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부활이 이스라엘 즉 참 하나님 백성을 위한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의 모델이며, 창시자로 등장했다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에스겔 37장에서 보듯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입고 살아나는 사건이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은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참 하나님 백성이 경험할 사건이다. 누군가 죽었다 살아나도 이것에 관심이 없는 자는 현세의 일들에 집중할 뿐 하나님 백성에게 약속된 사건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비유는 14-18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들은 부활을 믿었고, 부활은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본 비유는 어떤 이들에게는 누군가 부활하는 사건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중요하다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그렇다면 본 비유는 누가복음의 독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과연 자신이 가진 재산을 자기만을 위해서 쓰면서 살 수 있느냐는 역설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하나님 백성에게 약속된 부활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사건이다. 31절에는 두 가지 조건절이 존재한다. 첫 번째 조건절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에이 조건절)이고, 두 번째 조건절은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해도’(에안 조건절)이다. 두 번째 조건절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미래에 가능한 일로 가정한다. 반면, 첫 번째 조건절은 조건절의 내용이 사실임을 가정한다. 미래에 누군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현실임을 가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비유에서 불신앙은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이 아닌 현재의 일임을 가정한다.  

현대적 적용

[1-9]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비유의 의미는 명확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재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1-9절)에서 불의한 재정대리인은 당대(현대도 마찬가지다)의 재산 관리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집주인(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재정대리인인 것이다. 비유에서 재정대리인은 채무를 경감해 주었고, 집주인은 그것을 기뻐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돈을 통해 억압받고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들이 해방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19-31] 나사로의 비유(19-31절)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다. 자색 옷을 입는 것은 비싼 고급 옷을 입는 과시적인 심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현대에 명품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즐겨 구입하거나, 고급 스포츠카를 거리에서 과시하면서 운전하는 사람과 비슷한 심리일 수 있다. 부자는 또한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속옷조차 명품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가난한 나사로는 역설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전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것 같지 않다. 그는 가난하고 비참하고 병들어 쓰러져 있다. 현대어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김행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김행복’이 사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이야기에서 ‘김행복’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의 역설이 형성된다. 나사로의 이름에도 비슷한 아이러니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편인가? 부자이고 많은 것을 현실 속에서 과시하며 살았던 부자의 편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가? 그러나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것은 나사로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 부활의 메시지를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재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누가가 말하는 제자도의 한 측면이다.


설교: 참된 제자와 재물(1-8절)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의 난해한 비유와 마주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을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1. 재산 증식을 생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목표이고 그들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세상 사람들의 목표와 다릅니까? 비유에서 재정대리인은 당대인들의 가정 경영 목표였던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하는 것과 정반대의 일을 했지만 집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안정된 삶과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 곳을 돌아보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2. 재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구제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경제적으로 곤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은 특히 재물과 제자도의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자훈련은 모여서 성경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받아야 하는 훈련은 또한 우리가 가진 재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전도와 구제는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비유에서 재정대리인은 채무자들의 채무를 줄여 주었고, 집주인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행동을 기뻐하십니다.
3.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더 많은 소유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더 큰 교회당, 더 넓은 주차장과 같은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양적 성장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는 물질을 공유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지고 있는 재정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고지론이라는 미명하에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높은 공직에 진출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물질 축복과 같은 개념이 나오지 않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신약 저자들은 기복 신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신약 저자들이 관심이 있던 것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의한 재정대리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돈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제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정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1) 오이코노모스의 이러한 용례는 존 류만이 상세하게 분석했다. John H. Reumann, “The Use of ‘Oikonomia’ and Related Terms in Greek Sources to About AD 100 as a Background for Patristic Applications”, (Ph. D. Diss.,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57)을 보라.
2) 고대 세계에서 육체 노동에 대한 관점과 바울의 텐트메이킹에 대해서 Ronald Hock, “Paul’s Tentmaking and the Problem of his Social Class”, JBL 97 (1978), pp. 555-564을 보라.
3) Martin Goodman, “The First Jewish Revolt: Social Conflict and the Problem of Debt”, Journal of Jewish Studies 33 (1982), pp. 418-419.
4) 고대 로마 사회의 소득에 따른 비율에 관해서는 〈그말씀〉 2018년 1월호에 기고한 졸고 “초대 교회에 나타난 성찬”을 참고하라.
5) Peter Garnsey, Famine and Food Supply in the Graeco-Roman World: Responses to Risk and Crisis (Cambridge: Cambridge, 1988), p. 17.
6) 고대의 직접 계약 형식의 의미와 패턴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The Meaning of ceiro,grafon in Colossians 2:14 Revisited,” TynBul 68.2 (2017), pp. 227-229를 보라.
7) Jane Rowlandson, Landowners and Tenants in Roman Egypt: The Social Relations of Agriculture in the Oxyrhynchite Nome (Oxford: Clarendon, 1996), p. 249.
8) Ze'ev Safrai, The Economy of Roman Palestine (London: Routledge, 1994), p. 187.
9) 대럴 벅, 《누가복음 2》 신지철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p. 558.
10) 앞의 책, p. 593.
11) 참고, 앞의 책, p. 626.
 

김규섭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애버딘대학교(신약학, 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