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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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18년  02월호 소확행,‘어쩌다 그리스도인’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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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은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 트렌드 사이에 놓여있다.


‘소확행’에 대한 검색이 많아졌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여 쓴 말이라고 한다.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일본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小確幸’이라고 쓸 수 있겠다. 일본에서는 음식점이나 기념품점 등에서 이미 사용 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 처음으로 쓰인 표현이기 때문일 듯싶다.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고,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입을 때의 기분”을 ‘소확행’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다.

소확행, 라이프 스타일 vs. 소비 트렌드

이 현상에 대해 여러 분석과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1970-1980년대 일본이 버블 붕괴로 경제가 침체하며 힘들게 지낸 경험에 대한 반향이라는 주장이 눈에 띈다. 굉장한 무엇을 찾기보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미래보다 현재를, 특별함보다 평범함을, 행복의 강도가 아닌 빈도를 중시하는 세계적 추세와 일치한다. 소확행의 한국 버전을 찾으라고 하면, ‘조금 비싸더라도 자신의 구매력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취향에 맞는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 ‘큰 비용이 드는 명품 쇼핑보다 자신에게 부담되지 않는 비용으로 좋은 식재료를 사서 요리하는 경우’ 등이 모두 소확행에 속한다.

영어로 옮기면, ‘What’s your small but certain happiness’ 정도가 되겠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관심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로 보아야 할 듯싶다. 미국 브루클린에서 유행하는 ‘100m 마이크로 산책’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일상 공간에서 생겨나는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소확행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휘게’, 스웨덴의 ‘라곰’, 프랑스의 ‘오캄’ 등과 궤를 같이 한다. 

다른 측면도 있다. 소비 트렌드 분석이자 마케팅이라는 주장이다. 소비트렌드연구소가 해마다 펴내는 시리즈,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 10가지 키워드 중 첫 번째로 ‘소확행’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연구소를 이끄는 저명한 교수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2018년 소비의 주요 흐름으로 ‘소확행’을 제시했다. 대중의 호응을 받아서 ‘뜨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애쓰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과 한 팀인 연구원이 어느 기업의 임원 및 팀장 대상으로 명사특강을 펼쳤다는 기사를 보면서 트렌드 분석가들과 기업이 ‘상생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트렌드 제안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도 있다. 11-1월에 부는 트렌드 북 열풍에 1년 트렌드 북 판매량의 80%가 팔리는 현상은 신년 운세를 보러 다니는 풍조와 닮아 있다는 분석이다. ‘트렌드 부추기는 트렌드 북’이 정체불명의 신조어로 기존의 진단을 포장하고 트렌드에 사람이 끌려다니는 인상을 준다.1

‘역시 마케팅 하는 사람들이 빠르네! 결국 마케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들이 ‘소확행’ 마케팅을 ‘열공’ 중이라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새해를 위한 키워드로서 ‘소확행 마케팅’에 주력하겠다는 뜻이겠다. 실제로, 쇼핑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확행 가전제품에서부터 소확행 부동산까지 ‘소확행’을 붙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연장선에서 혼밥족으로 분류되는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삼으라’, ‘가성비가 아니라 가심비에 주목해야 한다’ 등의 분석이 뒤따르는 것을 보면 ‘각자 자신이 소비할 수 있는 만큼 소비하며 현재를 즐기는’ 소비 트렌드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소확행에 대한 우려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젊은층이 소확행을 라이프 스타일로 채택하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려는 마음까지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는 경우가 그렇다. 종합하면, ‘소확행’은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 트렌드 사이에 놓인 셈이다.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묻고 싶다. 작은 행복이면 확실한 행복일까? 맞는 말 같지만, 단정 짓기는 이르다. 거창한 목표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희망고문’과 ‘열정페이’를 낳은 것도 맞다. 이것이 소확행을 말하는 명분으로 꽤나 그럴싸하게 사용되었다. 한편에서는 소확행이 큰 행복을 바라지 말라는 패배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쉽게’ 행복해지는 길을 놓치지 말자는 취지이지 ‘큰 행복’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소확행을 규정하는 수식어 중 ‘작은’을 ‘현실적인’으로 바꾸고 ‘확실한’은 ‘현재적인’으로 바꾸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행복에 대한 관심은 소확행이 아닌 곳에도 있다. 기성세대를 포함해 주부와 고등학생들까지 ‘비트코인 좀비’가 되는 현상 말이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비트코인 좀비가 된 사람이 있다. 예배 시간에도 시세를 확인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확행을 트렌드의 하나로 예측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 삶의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트렌드 가운데 하나일 수 있고, 선택에 속하는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사회의 여러 흐름들을 균형감 있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흐름을 타기도 해야 하지만, 흐름에 휩쓸려서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웰빙’에서 ‘로하스’로, 다시 ‘욜로’에 ‘미니멀 라이프’로 이어지는 바통을 ‘소확행’이 넘겨받은 것일 뿐이다. ‘인문학’의 시대 아닌가? 사회는 여전히 피로사회인 정황에서, 소확행 그 자체가 뭔가 새로운 탈출구가 될 것처럼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소확행을 말하면서 별 생각 없이 ‘따라쟁이’가 될 것이 아니라 ‘성찰’해야 할 때이다.

현실적인 행복? 바울의 자족(自足)을 배워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찰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앞서 살펴본 소확행의 두 측면, 즉 ‘현실적인 행복’과 ‘현재적인 행복’에 관해서다.
먼저, 현실적인 행복에 관해 성찰해 보자. 사도 바울의 고백이 소확행과 공유하는 부분, 차이 나는 부분을 살펴볼 수 있겠다. 좋아하는 성구를 물었을 때, 많이 답하는 것 중 하나인 빌립보서 4:11-13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흔히, 13절 말씀에 방점을 찍어 무엇이라도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슈퍼 영웅이 될 것처럼 생각하며 ‘할 수 있다!’라는 긍정 만능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 구절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읽어야 한다. 특히 ‘자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스토아 학파의 윤리와 연관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행복을 ‘아파테이아’라고 표현한다. ‘없음’을 뜻하는 ‘아’(a)와 ‘정념’을 말하는 ‘파토스’(영어에서 ‘패이소스’라고 읽는)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어떠한 정념이나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각한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길은 운명에 순응하거나 혹은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특히, 자족은 욕망의 자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스토아 사상과 소확행은 많이 닮았다.

자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바울의 경우는 내용이 크게 다르다. 바울의 경우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자족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복음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비천에서도, 풍부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바울의 모습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비록 자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공유되고 있지만, 소확행은 스토아 철학을 닮았고, 그렇기에 바울의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소확행이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현실을 대하는 바울의 관점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요소는 ‘복음’이다. 바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열정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그의 능력 또한 복음과 연결되는 것이며 자족하는 삶 역시 복음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뜻에서, 소확행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말을 건넨 것은 아니지만, 깨우쳐 주는 것만 같다. ‘복음을 위한 자족’을 라이프 스타일로 삼았던 바울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현재적인 행복? 영원한 행복의 순례자가 되어야

소확행이 추구하는 가치의 특징을 보여 주는 또 하나는 행복의 현재성, 즉 현재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현재적인 행복을 추구한다고 나쁠 것은 없지만, 성찰해야 할 것도 있다. 혹시라도 현재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시간의 영역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았던 시절, 중국에 진출하면서 홍콩, 마카오, 상하이를 점령하고 ‘조차’(租借) 형식으로 99년의 기간을 정했다. 100년이라고 정하기에는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아서, ‘영원’에 가까운 99년으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그 기간이 경과했고 다시 중국에 환원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시간의 영역에 살면서 영원할 것처럼 큰소리치며 소유를 자랑하고 숭배하는 모습 말이다.

소확행과 관련해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성숙시키기 위해 또 한 사람의 권면을 들을 필요가 있다. 행복론의 기독교 버전을 가장 잘 보여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의 관점은 철학자들의 프레임을 빌려 쓰는 정도의 제안이 아니다. 복음에 기초한 행복의 전환 혹은 개혁이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넘어 영원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나쁠 것은 없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완성된다.2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은 이러한 생각들을 담아낸 방대한 저술이다.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다루는 주제 또한 다양하고 심층적이다. 로마의 재난을 기독교 탓으로 돌리는 터무니없는 정황에서 집필하기 시작한 《신국론》에는 기독교 변증 외에 기독교의 역사관, 가치관, 그리고 행복론 등이 망라되어 있다. 그 기저에는 시간과 영원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 안에 살지만 시간의 영역에서 행복을 찾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은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에서 ‘하나님을 뵈옵는’(visio Dei) 행복을 누릴 존재들이다.3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자로 인식된다. 비록 지상의 도성(civitas terena)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교훈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깨우쳐 준 바울의 관점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계승된 셈이다.

소확행이 현재적인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그 현재적 시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라는 시간까지도 창조하신 영원의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소확행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은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다 그리스도인’, ‘번영의 복음’을 넘어서라!

소확행 현상을 통해 체크해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일 수 있겠다.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 혹은 ‘번영신학’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필자를 포함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서부터 축복과 번영에 길들여져 왔다. 우리가 이제까지 들어온 설교는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할 수 있느니라’를 강조하면서 굉장한 번영을 약속하는 ‘축원합니다’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좋은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유명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을 싫어한다면, 솔직하지 않은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에는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일종의 에스컬레이팅이 적용된다. 좋은 것을 바라다가 더 좋을 것을 바라게 되고, 최고의 것만 바라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왜 내게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하거나 우울해한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위험천만한 것도 없다.

좋은 것을 원하고 번영을 기대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처한 역사적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저소득으로 인한 빈곤과 질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이 한몫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금수저’와 ‘갑질’의 구조가 지배해 온 사회에서 번영에 대한 기대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유일한 진리인 듯 가르쳤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에 길들여져 왔다는 점에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응용하고 싶은 표현이 있다. 어느 종편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코너가 있다.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기획 의도에는 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 사이에 가장이 된 세대를 힐링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어떨까? 그리스도인 역시 ‘어쩌다 어른’인 동시에,  ‘어쩌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패러디를 하면 무리일까?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서, 친구 따라 교회 다니다가, ‘어쩌다 보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는 없을까? 특히 번영의 복음을 들으며 성장해 온 탓에 ‘어쩌다 보니’ 번영의 복음에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축복, 능력, 그리고 번영에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굉장한 것, 기적적인 일, 심지어 위기 속에서 자신만은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 보험 같은 은혜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주신 은혜의 소중함을 놓치고 보다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구하다가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는 자화상을 자성해야 할 듯싶다.

바울이 보여 준 자족의 가치관을 멀리한 채 번영의 복음에 젖어서 번영하지 못할 때 좌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본질의 왜곡일 듯싶다. 소확행 시대에 구원의 확신에서부터 복음 안에서 자족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영원의 가치와 순례자의 삶에 대한 통찰 역시 놓쳐서는 안 될 가치다.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놓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소확행의 의미는 빛바랜 것이 될 듯싶다. 라이프 스타일 혹은 가치관으로서의 소확행은 사라지고, 마케팅을 위한 소확행이 번영의 복음과 만날 우려가 크다. ‘어쩌다 그리스도인’이기보다 복음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기도와 신앙, 그리고 소망이 복음에 충실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번영의 복음에 있지 않다. 복음 안에서 개혁된 행복이어야 한다. 번영 자체를 회피하라는 뜻이 아니다. 번영을 숭배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영원한 행복을 소홀히 하거나 시간의 영역에 얽매여 영원을 상실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공하고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복음 앞에서 깊이 자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것이란 성공 만능, 번영 만능 그 이상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신 하나님,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좋은 것을 바라다가 더 좋은 것을 바라게 되고 그 와중에 내게 이미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어리석음이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했다. “재산을 늘려가는 데서 쾌락을 누리는 사람이 나중에는 재산이 늘어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다.” 흔히들 “가진 것 없어 보이는 것은 진짜 가진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그것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한다. 만일, 소확행의 정신이 번영 신학에 익숙해진 ‘어쩌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침을 가해 복음을 향하게 한다면, 긍정적일 수 있겠다. 

몇 가지 질문으로 맺음을 대신하고 싶다. 주일마다 예배할 수 있음을, 매일 성경을 읽을 수 있음을,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행복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 탓에 굉장한 기적을 기도하고 기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을 복음 안에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꾼다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미 지닌 행복을 행복으로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넘어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시영 남서울대 기독교윤리 교수,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장. 숭실대학교(윤리학, Ph.D.). 저서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덕 윤리》, 《교회의 윤리 개혁을 향하여》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