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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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02월호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비전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는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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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경’, ‘영적 지도’의 건전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솝 우화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화는 주어진 행운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면, 손에 쥔 복까지 잃어버리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것을 목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 교회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장과 부흥을 이루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가히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 속 농부는 황금 알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거위를 황금 알을 낳는 도구로 보기 시작했고, 결국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얻기 위해 거위를 잡았다. 목회자가 교인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이나 교회 부흥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농부와 다를 바가 없다. 목회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교인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잘 돌보는 데 있다. 황금 알에 관심을 두는 패러다임은 교인들을 희생시킨다. 교인들을 자신의 야망이나 교회 부흥을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면 회개해야 한다. 교회 성장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목회다. 건강한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 간의 영적이고 정서적인 건강한 관계가 중요하다. 건강한 관계의 시발점은 목회자 자신의 사람됨이다. 그 사람됨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을 갖는 것이다. 이 비전을 통해 목회자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되고, 올바른 목회관을 형성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성공과 인기와 권력은 정말 대단히 유혹적일 수 있으나, 실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라고 말했다.1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음성을 받아들여, 성공과 인기와 권력이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영적 삶의 최대 적이다. 우리는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즉, 자기 내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내실 수 있었다(마 4:1-11).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기뻐하신다.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딜레마는 큰 교회를 세우는 일, 좀 더 깊은 영향을 미칠 방도를 찾는 일로 분주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공 강박증에 빠져 너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룬 외적인 업적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기뻐하신다. 파커 팔머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지만 스스로의 삶을 사는 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왜 모세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나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비전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의 길잡이 역할, 나침반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야망과 비전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라고 시작되는 찬양이 있다. 사실 우리의 비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 삶의 본질은 하나님의 비전을 내 비전으로 품고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한 걸음에 되지 않고 여러 단계를 거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부터 주셨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언약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창 15:2)이라고 포기하거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타협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고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져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삭을 계획하셨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뜻을 품게 되는 것이다. 요셉도 비전이 조정되는 기간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제자들을 향한 분명한 비전이 있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실수했다. 비전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품는 것인 반면, 야망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전과 야망은 분명히 구분된다. 하나님 없이 꾸는 꿈은 야망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꿈은 비전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묵시는 히브리어로 ‘하존’인데 ‘하자’라는 동사, 즉 ‘눈으로 보다, 유념해서 보다, 알아차리다’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 여기에서 묵시(계시)는 ‘눈에 보여진 비전’을 말한다.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야망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비전(계시)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주일학교에서는 ‘꿈쟁이 요셉’이란 제목으로 설교가 많이 시행된다. 설교자들은 때때로 “꿈과 비전을 가집시다”라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멋진 비전을 만들어 내라고 주문하곤 하는데, 이는 본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비전과 사도들의 비전이 일치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 준다. 사도행전 초두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자기 본위적인 요청을 한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니 그 권능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현세적 영광을 빨리 맛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증인의 삶을 살길 원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예수님과 ‘같은’ 비전을 품었을 때 그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다. 비전을 갖는 것은 귀하고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전이 예수님의 비전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공든 탑이 무너지며, 다른 비극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내 비전이 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나뿐 아니라 내 주변과 이웃들까지도 다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바대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내 비전과 우리의 비전

우리가 비전을 갖게 되는 동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비전을 갖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가득한 사회에서 인종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졌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사람과 상황과 장소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고 사명감을 가질 때 생긴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소원이 만날 때 생긴다. 헬렌 켈러는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시력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소원과 열정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바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조정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비전은 머리보다는 마음의 문제다. 마음으로 상황을 다르게 보고 그 해결책을 생각할 때 비전이 탄생한다.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방랑자가 되고, 비전을 보지만 자기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자가 되고,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취자가 되고,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은 지도자가 된다. 목회자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보스는 공포감을 주지만, 지도자는 열정을 내게 한다. 보스는 ‘나’라는 말을, 지도자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하고, 지도자는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 비전’은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어 구성된다.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 자신의 비전으로 삼고, 그 비전을 지체들과 공유하고, 이 세상 가운데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의 비전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비전일 뿐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비전이어야 한다. 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이 동일한 비전을 품도록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영적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제시하고, 어떻게 비전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공과 거룩함

목회자가 영적으로 건강하려면 우선 기도, 성경 읽기, 경건 서적 읽기, 경건한 생활을 통해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 목회자가 바른 영성을 유지하려면 바쁜 일정, 일에 대한 압박감, 세속적 가치관을 거부해야 한다. 자신의 영성을 단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목회 사역은 개인의 영적 성장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이 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목회직에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부름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부르심 가운데 부르심’ 의식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소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소명 안에서 생명과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을 위한 달란트와 온갖 유무형의 자원을 배정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신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각자를 부르신 목적과 동일하다. 바로 거룩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거룩이 비전의 본질이어야 한다. 목회자의 사역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재능과 노동력보다 거룩을 추구하길 원하신다. 목회자들은 본질적으로 거룩을 위해 부름 받았고, 그 뒤에 구체적인 사역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거룩이 목회자의 궁극적인 비전이 되어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변화무쌍한 목회 현장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 주는 북극성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그 거룩함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사역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소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보이는 현상에 흔들리게 된다. 목회자가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면,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된다. 목회가 종교 경제학으로 바뀌고, 무자비한 경쟁 속에 빠지며, 인간관계와 마케팅으로 전락한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목회자의 비전인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다. “목회자들은 말로는 목회가 거룩한 소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성공이나 출세를 더 간절히 추구한다. 목회자들의 실제 사역은 신학의 진리나 영성의 지혜가 아닌 시장 원리와 시장의 압력에 밀려 구체화되는 것이 현실이다.”2 이런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목회직은 어떤 직종보다 위험한 직업이다. 그것은 시시각각 영적인 싸움의 연속이다. 영적 싸움의 최전선에서 사탄과 그들의 일들을 대적한다. 그만큼 많은 위험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목회자는 반드시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의 무게 중심을 잡는 세 가지로 ‘기도’, ‘성경’, ‘영적 지도’(돌봄)를 꼽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건전한 균형 가운데 설교와 교육과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의 활동을 외부적으로 평가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의 내면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충실하며, 자기 양심에 비추어 얼마나 떳떳하며, 얼마나 신자들을 사랑하는지는 자신만이 안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라는 영역처럼 쉽게 결점을 감추고 겉모습을 그럴 듯하게 꾸밀 수 있는 다른 직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3라고 했다. 목회자는 진정한 목회자가 아니면서도 목회자인양 가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인정받고 업적을 쌓으려는 모든 노력은 허망하다. 내면이 부실할수록 외면을 꾸미는 법이다. 목회가 왜 어려운가? 목회자는 거룩한 삶에 헌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성을 지닌 나약한 인간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는 기도로 배우는 것이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함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보다 기도가 우선이다. 설교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대언하는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께 신자들을 위해 말씀드리는 위대한 것이다.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의 분량을 채우고, 기도로 사역해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설교자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들어야 한다.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이 은혜받고 변화되기 위해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침묵과 고독의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메신저는 메시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메신저가 메시지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메시지 이전에 메신저의 삶이 중요하다. 설교자의 인품, 교인과의 평소 관계의 질이 설교의 신뢰도를 결정한다. 신뢰도가 높아야 의사소통도 원활하고 말씀의 신빙성도 높아진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먼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먼저 실행해 본 다음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 자신이 먼저 자기 메시지를 삶으로 구현하고 호흡해야 한다.4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도가 설교보다 중요하고, 설교가 행정보다 중요하다. 가정이 회중보다 우선한다. 성실함이 성공보다 중요하다. 사랑이 능력보다 중요하다. 올바른 목회가 성공한 목회보다 중요하다. 목회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외면(Outside in)에서 내면(Inside out)으로

신앙생활의 트렌드는 ‘행위(doing)에서 존재(being)로’, ‘소유(possess)에서 공유(access)로’, ‘성공(success)에서 의미(significance)로’, ‘속도(speed)에서 방향(direction)으로’, ‘성장(growth)에서 성숙(mature)으로’, ‘사업(business)에서 사역(ministry)으로’ 변해가고 있다. 필자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생겨날 세 가지 중대한 변화의 패러다임을 ‘삼중혁명’이라고 불렀다.5 ‘유형에서 무형으로’, ‘외면에서 내면으로’, ‘강함에서 유연함으로’가 그것이다. 이 중에 비전과 관련된 것은 ‘외면에서 내면으로’의 변화다. 

외부에 대한 관심에서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소명이 내면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내면지향적인’ 청교도 세계에서 떠나와, 동시대의 사람이 인도자가 되어 버린 ‘외면 지향적인’ 현대 세계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레이더에 포착된 물체를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되었다. 밖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겨 다니는’ 바쁜 목사, 나쁜 목사가 되었다. 삶이나 목회를 밖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 부름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

 로리 존스는 《최고 경영자 예수》에서 예수님은 삶을 경영하실 때, ‘내면에서 외면’(Inside out)으로 경영하셨다고 했다.6 내면의 삶을 먼저 가꾸고 그런 다음 밖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에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성령’→‘권능’→‘증인’ 순으로 말씀하셨다. 더구나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원심력적인 선교, 삶의 원심력적인 경영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을 ‘파문(波紋)형 목회’라고 부른다. 작은 돌 하나가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나아가는 방식이다. 목회는 목회자 자신에게서 시작해 가족, 동역자, 교회 지도자, 훈련받은 리더, 교인들,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건실한 목회다.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외적인 변화가 진정한 변화이며,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혁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외적인 변화나 혁명은 아무 가치가 없다. 다만 주인을 바꾸는 것일 뿐,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변화다. 안에서의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찾아야 한다.” 

인간은 밖을 향한 외적 여행과 내면을 향한 내적 여행을 일생 동안 한다. 외면을 향한 여행이란 성공, 성취, 승진, 합격, 입신양명 같은 것들이고, 내적 여행은 말씀 묵상, 기도, 안식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적 여행보다는 외적 여행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외적 여행은 눈에 드러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반면, 내적 여행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손에 잡히는 성과가 없기 때문에 소홀해지기 일쑤다. 내면과 외면은 분리되고, 내면은 외면의 화려함만큼 반작용으로 깊은 어둠 속에 빠진다. 통합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할 인간이 파편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삶은 그야말로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된다.

내적 여행의 깊이가 없는 사역은 곧 고갈된다. 내면세계가 부실한 목회자는 외부 세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탈진하거나 갑자기 무너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면에 주어졌던 관심을 내면으로 이전시키는 혁명이 필요하다. 내면이 먼저 견고해지고 외면적 삶이 그에 맞게 재조정되어야 한다. 내면에서의 성장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비전을 품는 것은 곧 내면을 삶의 원동력과 준거로 삼는 일이다.

비전은 창조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비전은 북극성과 같다. 그 비전이 구만리 같은 삶의 길을 인도할 때, 우리는 좌충우돌하지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걸음도 걷지 않게 된다. 그 비전이 우리를 인도해 소망의 항구에 도달하게 해 준다.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내 자아는 완성된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우리는 그 비전에 일치되게 살아가야 한다. 비전에 일치될 때, 결과적으로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인생과 사역에 문제가 있다면, 조용히 비전의 영점(零點)을 조정하라. 그것을 통해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며 사역하라. 



1) 헨리 나우웬, 《영성수업》, 윤종석 옮김(서울: 두란노, 2007), p.51.
2) 유진 피터슨, 《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 차성구 옮김(서울: 좋은 씨앗, 2002), p.19.
3) 유진 피터슨, 《균형, 그 조용한 목회혁명》, 차성구 옮김(서울: 좋은씨앗, 2002), p.15.
4) 어윈 루처, 《목사가 목사에게》, 오현미 옮김(서울: 진흥, 2004), p.59.
5) 한기채, 《21세기 성경적 신사고: 삼중혁명의 영성》(서울: 두란노, 2009).
6) 로리 존스,《최고 경영자 예수》, 송경근 옮김(서울: 한언, 1999), p.230.

한기채 중앙성결교회 담임목사. 밴더빌트대학교(Ph.D., 기독교윤리학). 저서로 《지명을 읽으면 성경이 보인다 1, 2, 3》, 《삼중혁명의 영성》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