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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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18년  01월호 연명의료법 시행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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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법안은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만 허락된다.


2018년 2월 4일이 되면 연명의료법이 발효된다. 소위 ‘존엄사법’(웰다잉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안은 호스피스법과 연명의료법이 합쳐진 것으로 호스피스법은 이미 2017년 8월부터 시행되었고 연명의료법은 준비를 거쳐 내년부터 시행된다. 기독교계에서는 이 법을 존엄사법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미 반대 의견을 표한 바 있는데, 존엄사는 오래전부터 안락사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기에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존엄사라고 하면 자칫 인위적인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기에 연명의료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리라 본다.

이 법의 취지는 의식이 명료할 때 내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따라 본인 스스로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지만, 가족 중심의 유교 문화가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는 법의 시행 이후 상당한 혼란이 야기될 것으로 우려된다. 과연 기독교인으로서 이 법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특히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로서 어떻게 임종을 앞둔 환우와 가족을 상담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자.

기독교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사들은 대부분의 임종 환자를 종합 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만나게 된다. 임종 환자의 죽음에 대한 판단도 대부분 노련한 전문의가 아닌 병아리 의사(인턴 또는 당직의)들이 담당하게 된다. 필자 역시 수련의 시절, 주치의를 맡고 있던 환자가 한나절 만에 여섯 명이나 임종하는 것을 지켜보며 허탈감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 의사로서 환자의 죽음 앞에서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사들은 모든 것이 기계화된 첨단 의료 장비를 조작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죽음에 대해 무뎌져 가고 임종의 깊은 의미를 망각한 채 죽음을 다분히 생물학적인 현상으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에 관해서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자’는 어떤 불문율 같은 것도 가지게 된다.

의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다분히 객체화해 대하기 쉽다. 하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 입장에서 보면 임종을 판단하는 의사는 그들이 질병과 더불어 만났던 무수한 의료인 중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의사’였을 것이다. 의사를 떠나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필자 앞에 임종을 맞이하는 한 환자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와 같고 출애굽기와도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회복될 수 없는 병마에 걸려 이리저리 시달리며 그동안 여러 의사를 거쳐 이제 마지막 의사가 될 필자에게까지 와서 이렇게 누워 있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 역시 모두 멀어져 가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신 앞에 서야 할 그 모습으로 지금 누워 있다. 필자 역시 그에 필적할 만한 우여곡절 속에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한 끝에 의대를 지망해 드디어 의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달리 이 환자를 도울 능력이 없는 초라한 한 내과 의사로서 환자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의 두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이곳에서 마주 보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신의 인도하심이며 이 만남에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땅에 수많은 의사가 있음에도 하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필자에게 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맡기신 것은 필자를 통해 이 환자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는 죽기 마련이다

내가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죽음은 찾아온다. 어느 날 잘 뛰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코 속을 들락거리던 바람이 잠잠해지면 나는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태어난 순서대로 오지 않으며 어떤 이유로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기에 신비에 싸여 있다. 그래서 위인들은 혼인집보다 상갓집을 찾는 자가 더 지혜롭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매일 죽음을 준비할 것을 가르친다.

죽음은 마치 올림픽의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 대회와 같다. 약 40km를 최선을 다해 달려 결승점에 도달하는 선수와 같은 셈이다. 조금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으며, 물을 더 마시고 뛸 수도 있고 덜 마시고 뛸 수도 있지만, 모두 머나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도심과 강변을 거쳐 주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를 열렬히 환호하며 영접한다. 어쩌면 호스피스는 인생의 경주를 다 마치고 경기장에 들어오는 선수들을 끝까지 격려하며 환호하는 것과 같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일생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테이프를 끊는 순간까지 그들을 격려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감격 가운데 일생을 마치도록 돕는 도우미들인 셈이다.

치료할 수 있는 암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용광로이며, 치료할 수 없는 암은 하나님께 정결한 모습으로 서기 위한 신부 대기실과도 같다. 가족과 의료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신부가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가꾸고 곱게 드레스를 입혀 손잡고 신랑에게로 인도하는 길동무와 같다.

30년 가까이 내과 의사로 지내며 곁에서 지켜본 죽음만도 어느새 30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지만, 필자가 경험한 임종은 두 가지로 선명하게 구별된다. 첫 번째는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치며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임종이었다. 두 번째는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 죽음을 맞이하러 반갑게 달려 나가는 임종이었다. 죽음 이후에 그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의 반응이 이토록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나로서는 당연히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은 죽음을 지켜본 의사인들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구호처럼, 기왕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까 싶다. 머지않아 다가올 나의 죽음을 내다보며, 언제 죽음을 맞닥뜨려도 주저하지 않도록, 하루하루의 삶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며, 나의 남은 생애의 첫날이다”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그 누군가는 살지 못한 이 하루를 생명을 만끽하며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성실히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존엄사 논쟁을 불러일으킨 두 사건

1. 보라매병원 사건
1997년 12월 4일 대낮에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경막 외 혈종으로 보라매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던 환자가 있었다. 보호자인 부인이 남편의 평상시 술주정과 구타에 불만을 갖고 있던 터에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을 우려해 만류하는 주치의에게 퇴원 각서를 쓰고 자진 퇴원했으나 집에 도착한 후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검사와 판사는 시동생의 고발로 형사 입건된 신경외과 교수와 수련의, 그리고 부인에게 살인 및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유죄 선언을 했으며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이 사건의 논지는 퇴원하면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퇴원시킨 의사들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한 것이었다. 이후 한동안 중환자실에서 말기의 혼수상태 환자까지도 연명 치료를 중단하지 않아 중환자실에 정작 들어가야 할 응급 중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이 이어져 존엄사 논쟁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아울러 과연 환자의 생명에 반하는 결정을 하려는 보호자에게 환자 보호자의 권한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2. 김씨 할머니 존엄사 논쟁
서울서부지법 민사 12부는 2008년 11월 28일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며 김모(76) 씨 자녀들이 낸 소송에서 김 씨에게서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적극적 안락사를 비롯해 말기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 행위를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지만, 안락사를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이 사례에서는 본인의 서면 동의 없이 가족이 환자의 평상시 생각을 추정해 결정한 것이기에 확실한 본인의 동의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치료비를 상당 부분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언급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치료 중단의 결정은 본인이 생전에 명료한 의식으로 서면에 명시한 경우에 한해 논의되는 것이다. 어떻게 의식이 있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동의를 받아 둘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면, 그 자체가 생명의 의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반증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법원의 결정은 가족과 판사들인 제3자가 본인의 동의 없이 생명을 중단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 판결에서 치료를 중단시킨 또 다른 중요한 전제는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모호한 표현은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에 논란이 되었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회복의 가능성이 약간은 남아 있다는 뜻이며, 회복의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분명 안락사의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복 불가능하다는 기준에 대한 의학적인 분명한 해석과 이를 적용하는 분명한 지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결국 연명의료법이 제정되었다. 

연명의료법 개요

연명의료법의 원래 이름은 ‘호스피스 완화 의료의 이용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로 무려 33자에 해당되는 긴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 종합 법률이다. 원래는 호스피스법과 연명의료법이 별도로 준비되었으나, 국회 심의 과정을 거치면서 연명의료제도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우선 호스피스제도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 두 법안을 함께 묶어 통과시키는 바람에 약간은 혼란스러운 법이 제정되었다.

호스피스법의 특징은 이전의 호스피스 완화 의료의 내용을 담되, 암 환자뿐 아니라 에이즈 환자와 간경변증 환자, 그리고 만성폐쇄성기관지염 환자까지도 호스피스 치료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향후 WHO가 제안하는 12개 질환으로 호스피스 대상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아울러 육체적·정서적·영적인 전인적인 호스피스 치료의 내용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었다.

이에 반해 연명의료법은 논쟁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연명의료 결정의 대상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 한정된다. ‘임종 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해도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아울러 담당 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에게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자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충족해도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의학적 시술에 한한다. 또한 법은 연명의료를 중단하더라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의학적 행위를 기술하는데 ‘산소 공급’, ‘물 공급’, ‘영양 공급’, ‘통증 조절’이 그것이다. 이는 마지막 자연적 임종의 순간까지 소극적 또는 수동적 안락사의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제한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연명의료법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환자 본인의 결정권에 관한 것이다. 이번 법안의 취지 자체가 말기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에 평상시 의식이 명료하고 건강할 때 미리 연명의료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기록해 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권장되고, 입원한 이후에도 미리 담당 의사와 함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것을 권한다. 문제는 의식이 명료할 때 의사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를 어떻게 추정하는가와 가족의 의사를 어느 정도 선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생명윤리위원회에서는 사회적 합의체를 활용해 이를 최대한 엄격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연명의료법이 시범 운영 중인데, 너무도 엄격하게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의료 현장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정도다.
달라지는 죽음 문화

이러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는 기존의 유교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죽음 문화의 변화를 요구한다. 과거에는 부모님과 어르신들 앞에서 감히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문화였다. 하지만 이제는 미리 연명의료 여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며, 미리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서와 유산 상속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문화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아무리 불행한 자라도 살고 싶은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노년의 할머니가 죽고 싶다고 자주 말은 하지만, 막상 죽음 앞에서 마주하는 생에 대한 집착은 젊은이 못지않은 것이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욕망 중 우리는 당연히 삶에 대한 의지를 소중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명제가 부정되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생명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단지 의학적으로 더 이상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 본인의 생전 뜻에 따라 자신의 장기를 타인에게 기증하기도 하고, 기계적인 장치 속에 고독하게 죽지 않고 가족과 함께 고요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은 소극적 안락사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는 인위적 삶의 중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이며, 기계에 의한 죽음의 연장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신중해야 하기에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2명 이상의 의사가 동시에 내려야 하며, 아울러 본인 생전의 동의가 필수적인 것이다.

이번 연명의료법 시행을 계기로 향후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기준이 의학적·법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은 일회적이며 돌이킬 수 없기에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행여 회복될 수 있는 환자가, 또는 살고 싶은 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환자가 죽음으로 내몰려서는 결코 안 된다. 다잉윌을 존중함에서 리빙윌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자세

이제 곧 발효되는 연명의료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이번 법안은 안락사를 합법화시키는 법률이 아니다.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가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가족과 괴리된 채 중환자실에서 단지 기계에 의해 죽음의 괴로움만 연장시켜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는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허용하는 행위인 만큼 기독교적인 윤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법안에서 규정하는 연명의료 중단 대상을 확대한다거나, 환자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족의 의사를 우선한다거나, 향후 법안을 자칫 안락사가 가능한 법안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는 염려된다. 특히 식물인간이나 혼수상태, 그리고 중증 치매 환자와 같이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환자에게 이를 확대 적용하려는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 법안을 규정대로 잘 준수하는지 기독교계의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또한 법의 시행을 통해 문제점이 발견되면 이를 바로잡는 부분에도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산하는 일에 기독교가 앞장서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각 교단별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기관을 만들고, 이를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의식이 명료할 때 자신의 연명의료 여부도 결정하고, 유서와 유산도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죽음 너머의 천국을 이야기하며 미리 죽음을 준비하도록 안내하는 일이야말로 기독교가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울러 교회와 기독교 병원이 호스피스를 많이 마련해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진정한 임종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할 것이다.  

박상은 샘병원 대표 원장, 국가생명윤리위원장. 저서로 《생명의료윤리》, 《인간배아복제, 과학의 승리인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