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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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7년  11월호참 지혜의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 책별 성경 연구 | 누가복음 7장

본문 사역1 및 해설2

[1]그분께서는 무리가 듣도록 자신의 모든 말을 넉넉히 말씀하시고,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그리고 백부장의 한 종이 너무 아파서 숨을 거두려 하는데, 그는 그에게 매우 사랑스러웠다. [3]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관해 듣고서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그분께 보내, 오셔서 자신의 종을 살려 달라고 그분께 계속 부탁했다. [4-5]그리고 예수님께 간 사람들은 “이 일을 그에게 해 주시는 것이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그가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분께 서둘러 말하며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6]보라,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이 벌써 집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오셨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그분께, “주님, 자신을 더는 힘들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제 처마 아래로 들어오시게 하는 것이 저에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그래서 제가 당신께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만 하셔서 제 사랑스러운 종이 낫게 하십시오. [8]왜냐하면, 제가 권세 아래 있고 그러면서도 제게도 병사들이 있어 이 사람에게 ‘가라!’라고 하면 그가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라고 하면 그가 오고, 그리고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라고 하면 그가 그대로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9]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자세한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놀라 감탄하셨고, 돌아서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나는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강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10]그래서 보내진 사람들이 그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종이 다 나은 것을 확인했다. [11]그리고 곧바로 그분께서는 나인이라 불리는 고을로 가셨는데 그분의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분과 함께 가고 있었다. [12]그리고 그분께서 마을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보라, 제 어미의 외아들이며 그리고 그녀가 홀어미인 죽은 사람이 옮겨지고 있었으며,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13]그리고 주님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에게 “그만 울어라!”라고 말씀하셨다. [14]그리고 다가가셔서 들것을 만지셨더니, 옮기던 사람들이 멈추었고, 그리고 “젊은이, 내가 자네한테 말하니 ‘살아나라!’”라고 말씀하셨다. [15]그러자 죽은 사람이 앉았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분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께 돌려주셨다. [16]그런데 모든 사람은 놀라 떨며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세워졌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려고 찾아오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17]그리고 그분에 관한 이 소식이 온 유대와 모든 주변에 퍼졌다. [18]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관해 요한에게 알렸다. [19]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의 두 명을 불러 주님께 보내 “당신이 오신다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했다. [20]그 사람들은 그분께 가서 “세례(침례)자 요한이 저희를 당신께 보내 ‘당신이 오신다는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1]바로 그때 그분께서는 많은 사람을 여러 가지 병과 많은 심한 아픔 그리고 많은 더러운 영에서 치료하셨고, 또한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이 보게 하셨다. [22]그러고는 그들에게, “너희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알려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보며,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으며, 악성 피부병 사람들이 깨끗해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으며, 죽은 사람들이 살려지며,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기쁘다. [23]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대답하셨다. [24]그리고 요한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간 다음에, 그분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아니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많은 부드러운 옷감을 두른 한 사람을? 보라, 화려하며 사치스런 옷으로(두른) 사람들은 여러 궁에 있다. [26]아니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를?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언자보다 더 뛰어난 [27]이 사람은 ‘보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네 얼굴 앞에 보내는데,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28]나는 너희에게 ‘여성들의 아들들 가운데 누구도 요한보다 더 크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말한다. [29]그리고 들은 모든 백성과 세금 징수원도 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했다. [30]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은 그에게 세례(침례)를 받지 않음으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31]그러니, 내가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견주며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 [32]그들은 저잣거리에 앉아 ‘우리가 너희를 위해 불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슬피 울었어도 너희는 울지도 않았다’라는 말로 서로 불러내는 아이들과 같다. [33]마찬가지로 세례(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너희는 ‘그가 귀신들렸다’라고 말한다. [3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는 ‘보라, 먹보며 술고래이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이다’라고 말한다. [35]그러나 지혜는 그 모든 자녀에게 올바로 인정받는다.” [36]그리고 바리새인들의 한 사람이 자신과 함께 먹자고 그분께 잇따라 부탁해, 그분께서는 그 바리새인 집에 들어가셔서 기대셨다. [37]보라, 그리고 고을에 죄인인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분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기대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향유 단지를 가져와 [38]그분의 발 곁 뒤에 서서 울면서 많은 눈물로 그분의 두 발을 적시기 시작했고 그녀 머리카락으로 닦아냈고 그분의 두 발에 입 맞추고 또한 향유로 바르고 있었다. [39]그런데 그분을 부른 바리새인은 보고서 혼잣말로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그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지,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 텐데!”라고 말했다. [40]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라고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선생님, 곧바로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한다. [41]“두 명의 빚쟁이가 어느 돈놀이꾼에게 있었는데, 한 명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한 명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그들이 갚지 못해서 그는 둘에게 빚을 물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면 그들의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저는 더 많은 빚을 물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그에게 “네가 바르게 판단했다”라고 말씀하셨다. [44]그리고 그분은 그 여성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너는 이 여성을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을 위한 물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성은 내 발에 눈물을 흘렸고 그녀 머리카락으로 훔쳐냈다. [45]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멈추지도 않았다. [46]너는 내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내 발에 향유로 발랐다. [47]그러므로 나는 네게 ‘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으니, 그래서 그녀가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48]그러시고는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네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49]그러자 기대고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심지어 죄도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50]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셨다.
[1]자신의 모든 말을 넉넉히 말씀하시고 자신의 모든 말을 ‘채우다’에 대한 번역이다.

[2]그는 그에게 매우 사랑스러웠다. 백부장이 종을 재산이나 소유로 여겼으면 엔티모스를 ‘소중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만, 이 이야기에 드러난 백부장의 인품을 보면 ‘사랑스러운’이 더 좋다.3

[6-7]그래서 … “주님, 자신을 더는 힘들이지 마십시오… 제 사랑스러운 종이 낫게 하십시오. 6절의 접속사 '데'는 행동 결과를 나타내는 ‘그래서’를 뜻한다.4 수퀴루에 재귀대명사 ‘자신을’을 넣으면 더 좋고,5 문맥에서 ‘더는’을 내포하므로,6 “주님, 더는 자신을 힘들이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한다.

둘로스를 사랑스러운 말맛을 내포한 파이스7로 표현함으로, ‘사랑스러운 종’으로 번역한다(7절). 그리고 이아데토(명령법 부정과거형, ‘나아라’)가 P75vid, B, L, 1241 등에 있고 이아데세타(직설법 미래형, ‘나을 것이다’)가 대부분 필사본(¥, A, C, D, W, Q, Y, f1, 13, 33)에 있는데, 이아데세타이는 마태복음 8:8과 일치시키려는 부차적 이문으로 보인다.8 어느 이문이나 같은 의미, 곧 명령 또는 요청의 명령법9이다.

[9]“나는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강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강의 부정사 우데가 ‘기대할 수도 없다’를 함의하므로, ‘심지어 … 적이 없다’로 번역한다. 그리고 토사우텐 피스틴을 ‘그런 믿음’으로 직역하지 않고, 정도의 의미(Louw-Nida 78.52)를 반영해 ‘이런 강한 믿음’으로 번역한다.

[11-12]그리고 곧바로 … 고을로 … 마을 어귀에 … 죽은 사람이 옮겨지고 있었으며 곧바로(11절)와 관련한 주요 이문의 관사가 남성 이면 크로노를 넣어 ‘곧바로’로 이해하고, 여성이면 헤메라를 넣어 ‘다음날’로 이해한다. 내증이나 외증 모두를 고려하면 남성 이문이 거의 확실하므로{B},10 ‘곧바로’로 번역한다.

폴리스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나 고을을 뜻하는데(Louw-Nida 1.88), 나인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 것이기에11 ‘고을’로 번역한다(11a절). 그리고 개역개정과 새번역을 비롯해 한글 번역본이 '테 퓔레 테스 폴레오스'을 ‘성문’으로 번역하지만, 폴리스를 ‘고을’로 번역하기에 ‘마을 어귀’로 번역한다(12a절). 새번역, 현대인, 현대어 등이 ‘상여’라는 단어를 쓰는데, 유대의 시신 운반 도구를 표현하는 한글 번역어로 적절하지 않다(아래 14절 해설 부분 참고 하라).

[13-14]“그만 울어라!”… 들것을 만지셨더니 … “젊은이, 내가 자네한테 말하니 ‘살아나라!’” '메 클라이에이두'는 ‘부정어+명령법 현재형’ 구조로, 울고 있는 행동을 그치라는 뜻이므로, ‘그만 울어라’로 번역한다.

14절의 '소로스'는 신약성서에 단 한 차례 쓰인 단어로, ‘시신을 장지로 옮기는 데 쓰이는 들것이나 판자’이다(Louw-Nida 6.109). 수의로 감싸서 기름을 부은 시신을 놓는 열린 판자여서, 그 젊은이가 바로 앉을 수 있었다.12 따라서, ‘관’이나 ‘상여’보다 ‘들것’으로 번역이 타당하다.

14b절의 '네아이스코스'는 사춘기는 지났으나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를 뜻하며, '파이스'와 연령대가 겹친다(Louw-Nida 9.32).13 '에게르데티'(명령법 부정과거 수동태 2인칭 단수)를 직역하면 ‘(하나님에 의해) 살려지라’인데,14 ‘살아나라’로 번역한다.15

[15]그러자 예수님 명령의 결과를 이끄는 접속사(NET) '카이'의 번역이다.

[18b-19]그래서 요한은 … 주님께 보내 필사본에 '퀴리온' 다음에 '이에수운'이 있기도 한데, 필사자가 '이에수운'을 생략했을 것 같지 않으며 퀴리오스가 누가의 문체와 일치하기에 이문 퀴리온이 우선하는 C등급이므로,16 ‘주님께’로 번역한다.

[22]죽은 사람들이 살려지며,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기쁘다. '에게이론타이'가 직설법 현재형 수동형이므로 ‘살려지다’로 번역한다. 한글 번역본은 주로 ‘살아나다’와 ‘되살아나다’로 번역한다. 200주년역은 수동태를 반영해 ‘일으켜지다’로 번역하지만,17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또렷이 드러내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유앙켈리존타이'는 직설법 현재 수동형이라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참조. 개역개정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로 번역하고, 새번역은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로 번역한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다’라는 뜻의 피동성을 살려 ‘가난한 사람들은 들어 기쁘다’로 번역한다.

[28]‘여성들의 아들들 가운데 누구도 요한보다 더 크지 않다….’ '이오안누' 앞이나 뒤에 '프로페테스'가 있는 이문도 있으나, 프로페테스가 없는 짧은 이문이 초기 사본의 지지를 받으며, 다른 이문 발생을 설명한다.18

[29]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했다. 분사 '밥티스덴테스'를 이유 부사절(NET)보다는 수단 부사절로 여겨 ‘세례(침례)를 받음으로’로 번역한다.19 그리고 '에디카이오산 톤 데온'를 ‘하나님을 정당하다고 지지하고 반응했다’(NET), ‘하나님의 의로운 명령들에 순종했다’(Louw-Nida 36.22), ‘하나님을 의롭다고 선포했다’20로 설명하는데,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했다’로 번역한다.

[35]그러나 지혜는 그 모든 자녀에게 올바로 인정받는다. 이 격언은 예수님 자신과 세례(침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거부된 상황에서 수용 형태를 제안하기에, 접속사 '카이'는 ‘그러나’로 해석할 수 있다.21 피동문 행위자는 흔히 '휘포'로 표시하는데, 때로 '아포'도 드물게는 '파라'도 쓰인다.22

[40b]“선생님, 곧바로 말씀하십시오.” 명령법 부정과거형 '에이페'는 행동 개시를 다그치므로, 부사 ‘곧바로’를 덧붙여 번역한다.

[43b]“네가 바르게 판단했다.” '오르도스'는 ‘받아들인 기준에 거의 맞아떨어지다’, ‘올바로’를 뜻한다(Louw-Nida 72.13).

[47]‘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으니, 그래서 그녀가 많이 사랑했다….’ 호티절을 ‘용서의 근거’(NAS, ESV, KJV, 개역개정, 새번역, 200주년, 아가페, 현대어, KCB)나 ‘효과’(NIV, NRS, CCK, KRB, 현대인)로 번역하는데, ‘효과’가 더 타당하다(NET). 구문적으로, ‘용서됐다’(아페온타이)라는 현재완료 수동형이나 ‘사랑했다’(에가페센)는 부정과거형이다. 곧, ‘용서된 상태에서 사랑했다’는 뜻이다.23 마지막 진술도 ‘효과’로 보게 하는 근거다.24 따라서 ‘그래서’로 번역한다.

단락 구분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 전개, 곧 플롯을 간단히 분석해 보자.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6:36)을 힘주어 말씀하신 이른바 평지 설교에 이어, 숨을 거두려는 이와 숨을 거둔 이를 살린 하나님의 자비 사역을 서술한다(1-10, 11-17절).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게 하는 사역이 메시아 시대에 지혜로운 사역임을 세례(침례)자 요한이 깨우치길 바라신다고 서술한다(18-35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는 받은 은혜를 깨닫고 마땅히 적극적인 사랑, 곧 자비를 실천한다고 서술한다(36-50절). 이 정교한 플롯 의도는 위대한 예언자 예수님의 사역으로 백성을 찾아오셔서 도우시는 하나님25을 믿는 믿음26에 기초해 자비를 실천하라는 교훈을 생생하게 들려주려는 것이다.

누가복음 7장을 위의 플롯 분석에 따라 크게 세 개 단락으로 나눠 각각에 아래 제목을 단다.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비 사역(1-10, 11-17절)
2.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하는 자녀(18-35절)
3.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해 자비 실천(36-50절)27
 

본문 해설28


누가복음 7장을 플롯 전개에 따라 살펴 ‘참 지혜의 제자도’, 곧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성취 사역을 믿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제자도를 배워 보자.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비 사역(1-10, 11-17절)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 요청, 곧 죽어 가는 종을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달라는 믿음 요청의 효능을 그에게 보여 주셨고(1-10절), 나인에서 슬프게 우는 홀어미의 죽은 아들을 살려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11-17절). 죽어 가는 이를 그리고 죽은 이를 살리는 자비 사역은 마침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 그분께서는 무리가 듣도록 자신의 모든 말을 넉넉히 말씀하시고,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복된 삶(특히 6:36)을 핵심 주제로 한 설교(6:20-49)29를 넉넉히 가르치시고,30 카파르나움에 가셨다고 보고해 새로운 무대를 마련한다.

[2] 그리고 백부장의 한 종이 너무 아파서 숨을 거두려 하는데  그는 그에게 매우 사랑스러웠다. 단어 ‘백부장’을 강조 자리인 문장 첫머리에 서술함으로, 종이 아니라 이방인 백부장을 서술의 주요 인물로 소개한다.31 종이 숨을 거두려는 순간32이 백부장에게 절박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종이 숨을 거두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3]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관해 듣고서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그분께 보내, 오셔서 자신의 종을 살려 달라고 그분께 계속 부탁했다. 누가는 백부장이 아픈 사람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 부탁 활동을 보고한다. 백부장이 숨을 거두려는 사랑스러운 종을 살리려고 유대인 장로 여러 명을 보내 예수님께 계속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해, 평지 설교 핵심인 하나님의 자비 실천 모습을 두드러지게 한다. 사회 계층적으로 지위가 더 높은 이방인 백부장과 유대인 장로들이 더 낮은 신분인 종을 살리려고 수고롭게 힘을 모은다.

[4-5] 그리고 예수님께 간 사람들은 “이 일을 그에게 해 주시는 것이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그가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분께 서둘러 말하며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누가는 장로 사절단의 발화 양식으로, 주요 인물인 백부장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를 보편적이며 지속적 태도33와 과거 특정한 업적을 타당한 논거로 제시한다. 곧 이방인 백부장은 지금 유대인을 계속 사랑하며 또한 지난날에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이제 종을 살리려는 사랑을 보인다. 백부장의 사랑은 ‘자비 실천의 한 본보기’34이다. 부유했을 이방인은 유대인 후견인으로서35 그들에게 한결같이 자비했다.

[6-8] 보라,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이 벌써 집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오셨을 때 로마 군대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그분께, “ … 오히려 말씀으로만 하셔서 제 사랑스러운 종이 낫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권세 아래 있고 그러면서도 제게도 병사들이 있어 이 사람에게 ‘가라!’라고 하면 그가 가고, … ”라고 말했다. 서술자 누가는 ‘보라’라는 말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서는 백부장 종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 장로 사절단과 함께 마냥 걷고 계신다고 서술한다(6a절). 또한 이어지는 서술 부분(6b-8절)은 백부장이 이번에는 친구들로 구성한 또 다른 사절단을 이미 자신의 집 가까이 오신 주님께 보내 자기 생각을 직접 대화 양식으로 전달하며 서사 속도를 지연한다. 서술 지연은 오히려 종을 살리는 데 장애물을 놓는 듯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유대인 장로들은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의 호의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3절), 백부장 자신은 주님을 직접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6b절). 여기서 생각의 대조는 이방인 백부장의 ‘가치 없는 상태’36가 오히려 그의 겸손과 믿음을 돋보이게 한다. 그는 벗으로 구성한 사절단을 보내, 권위 체제에서 명령 전달 효험에 관한 자신의 많은 경험에 유추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사랑스러운 종을 살려주시길 간절히 바란다.37 백부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말씀으로’ 효능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를 발화해 자신의 강한 믿음,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신다는 믿음을 드러낸다.38

[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자세한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놀라 감탄하셨고, 돌아서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나는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강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탄네힐의 평가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기대하지 않은 큰 믿음이 있다는 칭찬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유대인 예수님과 이방인 사이의 사회적 장벽을 허문다. 역시 그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과 신적 권위를 믿는 믿음을 보인다.39 놓쳐서는 안 될 재밌는 점은 예수님이 무리를 넉넉히 가르치셨어도 계속 가르치심이다. “이것을 배워라!”40

[10] 그래서 보내진 사람들이 그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종이 다 나은 것을 확인했다. 서술자 누가는 종의 건강 회복에 관한 백부장의 어떤 반응도 전혀 서술하지 않는데, 이것은 이방인 백부장을 무대에 한 번도 세우지 않고도 예수님 말씀의 신적 능력을 전적으로 그리고 자기 검증적으로 믿은 주인공으로 드러내는 전략이다.41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에게 믿음 요청의 효능을 보여 주신 사건(1-10절)과 나인에서 슬프게 우는 홀어미의 죽은 아들을 살려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사건(11-17절)을 한 쌍으로 묶어 플롯을 전개한다. 이 쌍에는 생명을 살리는 자비 사역이 공통점이고, 이방인 남성과 유대인 여성이 주요 인물이다. 이렇게 묶는 의도는 예수님의 자비 사역을 요약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사역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가려 함이다.

[11-12] 그리고 곧바로 그분께서는 나인이라 불리는 고을로 가셨는데 그분의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분과 함께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마을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보라, 제 어미의 외아들이며 그리고 그녀가 홀어미인 죽은 사람이 옮겨지고 있었으며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과 큰 무리가 나인이라는 고을로 가셨다고 보고한다(11절). 하나님의 자비로운 회복 경험을 나누고 확장하는 무리와 죽음에 관련한 무리가 그 마을 어귀에서 만남을, 파토스(pathos)를 사용해 극적으로 서술한다(12절). 죽음 그 자체가 큰 슬픔인데, 죽은 자는 어머니의 외아들이며 그 어머니가 홀어미이기에 더 큰 슬픔이다. 남편을 잃은 가족, 비극을 겪은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은 두 번째 가족 비극이며, 그녀 자신의 경제적 후원이 끊기는 경제적 비극이다. 그녀는 홀어미에서 ‘홀로 남겨진 어미’(orphaned parent)가 되었다.42 이 비극 상황에 하나님의 자비 사역자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13-14] 그리고 주님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에게 “그만 울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가가셔서 들것을 만지셨더니, 옮기던 사람들이 멈추었고, 그리고 “젊은이, 내가 자네한테 말하니 ‘살아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앞 사건 상황과 비교해 더 비극적 상황에서는 누구도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를 권위 있게 실현하시는 주님께서는 죽은 아들이 아니라 슬피 우는 홀어미를 먼저 눈여겨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그만 울어라!”라고 위로하신다(13절). “누가는 예수님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강조한다.”43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우스꽝스럽게 보일 말을 주도적으로 이어가신다(14절). 시신 운반 행렬에 다가가셔서 시신을 올려놓은 들것을 만지는 부정한 돌발 행동으로, 더는 그 행렬이 진행하지 않게 길을 막아서셨다. 그러시고는 죽은 아들을 상대로 명령의 말씀을 하셨다. 주님 예수께서는 홀어미에게 ‘어떤 믿음도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불쌍히 여겨’,44 하나님의 생명 부여 능력을 다시 말씀으로 전달하신다. 예수님의 명령적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 사역의 주요한 도구며, 자비 사역을 잇는 플롯 장치이다.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앉았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분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께 돌려주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증거, 곧 “그러자 죽은 사람은 앉았고 말하기 시작했으며”를 서술한다.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젊은이라 불렀는데, 누가는 산 아들을 죽은 사람이라 서술한다. 죽은 ‘젊은이’가 산 ‘죽은 사람’이라는 역설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도적 행동으로 젊은이를 살려서 그 홀어미에게 돌려주셨다. 누가는 홀어미의 반응에 관해 침묵하지만, 예수님의 “그만 울어라!”라는 명령대로 울음을 그쳤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지금 우는 너희가 복 있는데, 너희가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6:21)라는 말씀을 성취해 하나님의 자비를 그녀에게 전달하셨다.

[16] 그런데 모든 사람은 놀라 떨며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세워졌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려고 찾아오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서술자 누가는 홀어미의 반응은 말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큰 무리 그리고 시신 운구를 따르는 무리의 ‘심리적 및 신앙적 반응’45을 서술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섭리로46 위대한 예언자의 임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이 백성을 돌보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참조, 1:68, 78)47라고 고백하며 찬송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바라던 대로 종말적 구속 섭리를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다.48 이 고백 찬양이 누가가 강조하려는 핵심 메시지이다.49

[17] 그리고 그분에 관한 이 소식이 온 유대와 모든 주변에 퍼졌다. 누가는 그분에 관한 이 소식, 곧 위대한 예언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와 역사가 팔레스타인 전체와 그 주변에도 퍼졌다고 요약 보고한다(17절). 이스라엘의 특정 계층에게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모든 사람과 주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임재가 은혜로운 선물로 주어졌다.50

요약하면, 누가는 예수님께서 죽어 가는 이와 죽은 이를 살리는 자비 사역으로 마침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서술한다(1-10, 11-17절). 탄네힐의 분석에 따르면, 홀어미의 죽은 외아들을 살린 기적 이야기는 백부장의 죽어 가는 종을 살린 기적 이야기와 한 쌍을 이루어 부활을 예시하여 ‘죽은 사람들이 살려지며’(22절)를 준비하는 서사 전개에 매우 적절하다.51

2.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하는 자녀(18-35절)
이제,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고 들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셨고, 세례(침례)자 요한도 이 사역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하신다고 서술한다(18-35절). 백부장의 종 치유 이야기(1-10절)와 나인에서 홀어미의 아들 살림 이야기(11-17절)는 평지 설교(6:20-49)와 함께 18-23절의 ‘서언’52이다. 곧, 위대한 예언자 예수님께서 생명을 살려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냄은, 세례(침례)자 요한이 오실 메시아를 확인하려는 바람으로 이어지는데, 이 두 인물은 언어 전달자 역할을 하는 ‘요한의 두 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난다.’53 그들의 간접 소통 과정에서 그들의 질적 차이가 드러난다.54

[18a]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관해 요한에게 알렸다. 서술자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아마 옥에 있는 스승 요한에게(참조, 3:20) ‘이 모든 일’ ― 생명을 살리는 ‘두 개의 기적’ 그리고 21절에 요약한 대로 ‘예수님의 모든 사역’ ― 을 알렸다고 보고한다.

[18b-19]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의 두 명을 불러 주님께 보내 “당신이 오신다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했다. 누가는 요한이 옥에 있어서 두 명의 제자를 증인 역할의 대리자로 ‘주님께’ 보내 자기 생각을 질문 형식으로 전해 대화한다고 서술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거나 자비 사역을 직접 본 적도 없고, 게다가 자신이 기대한 종말적 심판 사역(눅 3:7-7, 15-18)에 관해 전해 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기대한 종말적 메시아’55이신지 알아보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그들을 보냈다.56 ‘모든 사람’이 안 사실을, 예고한 요한 자신이 의구심을 갖다니.

[20] “세례(침례)자 요한이 저희를 당신께 보내 ‘당신이 오신다는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했습니다” 같은 질문의 두 차례 반복은 주요 관심사인 예수님의 정체 확신과 요한의 의구심을 강조한다.

[21] 바로 그때 그분께서는 많은 사람을 여러 가지 병과 많은 심한 아픔 그리고 많은 더러운 영에서 치료하셨고, 또한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이 보게 하셨다.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대신해 질문하려고 온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여러 가지 치유 사역을 해 보게 하셨다고 보고한다. 이 서술은 단순 부정과거 용법으로, 요한의 제자들이 증인으로서 스승에게 대답할 실제 근거이다. 자비로운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며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확실하게 입증한다.57 

[22-23] 그러고는 그들에게, “너희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알려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보며,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으며, 악성 피부병 사람들이 깨끗해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으며, 죽은 사람들이 살려지며,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기쁘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 있다”라고 대답하셨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여러 치유 기적으로 실제 증거 제시에 이어, 메시아 시대에 관해 말하는 구약성서 예언을 반영하는 말로, 요한의 질문에 암시적이나 넉넉하게 대답하신다. 열거하신 여섯 가지 기적 항목은 이사야 29:18-19; 35:5-6; 42:18; 61:1과 거의 일치한다. 이사야 전승에 포함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 곧 악성 피부 환자 치유와 죽은 사람 살려짐은 ‘엘리야 ― 엘리사 전승’58일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이 기대를 성취하는 종말적 메시아라고 에둘러 대답하신다.59

누가만이 서술하는 홀어미의 죽은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11-17절) 다음에, 특히 22절에 죽은 사람 살려짐이 이어짐, 그리고 마지막에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기쁘다’라는 강조는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 설교로 선포하신 사명이었으며(4:18), 평지 설교에서도 밝힌 것이었다(6:20). 마지막 항목이 절정인데, 하나님의 현재 간섭이 고난을 겪는 특정 집단에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집단에 열려 있다고 ‘일반화’60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곧 예수님 자신의 여러 자비 사역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 있다고 말씀하신다(23절). 이 문맥에서 ‘복 있다'(마카리오스)가 단수형으로 요한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으나,61 '호스 이안'과 결합해 반응하는 요한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다.62 누구도 자신의 자비 사역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도리어 믿고 받아들이길 바라신다.

[24-28] 그분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많은 부드러운 옷감을 두른 한 사람을? 보라, 화려하며 사치스런 옷으로 (두른) 사람들은 여러 궁에 있다. 아니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를?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언자보다 더 뛰어난 이 사람은 ‘보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네 얼굴 앞에 보내는데,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나는 너희에게 ‘여성들의 아들들 가운데 누구도 요한보다 더 크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말한다.” 서술자 누가는 요한의 반응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무리가 요한에게 보인 반응에 관한 예수의 자문자답식 대화를 서술한다(24b-28절). 누가의 예수께서는 무리가 ‘회개의 장소이며 종말적 새로운 시작’63을 뜻하는 광야로 나간 데는 뭔가를 보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세 개의 자문자답 대화를 이어가신다.

첫째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고, 둘째에서는 사치를 일삼는 사람, 아마도 ‘궁중 예언자’64를 보려는 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먼저는 사물에, 그다음에는 사람에 시선을 쏟게 한 다음에, 셋째에서는 뛰어난 예언자를 보려고 광야로 나갔다고 전략적으로 이어가신다. 첫째 질문의 답은 질문 자체에 포함되어 있고, 둘째 질문에는 답과 함께 짧은 설명을 하며, 셋째 질문에는 분명한 답과 긴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뛰어난 예언자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전략이다.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주로 말라기 3:1, 그리고 출애굽기 23:20을 인용해 요한을 뛰어난 예언자로 평가하고 인정하신다(27-28a절). 요한이 옛 시대에 메시아의 길을 준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종말적 임재와 통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65 그러나 요한을 기점으로 열린 더 큰 새로운 시대, 곧 하나님의 종말적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옛 시대의 가장 큰 사람인 요한보다 더 크다. 요한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한다는 말이라기보다 미래 참여를 함축하며, 전주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했어도 지금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그 나라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옛 시대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다는 것보다 새로운 시대에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66

[29-30] 그리고 들은 모든 백성과 세금 징수원도 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은 그에게 세례(침례)를 받지 않음으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요한의 세례(침례) 사역에 순종한 무리와 순종하지 않은 무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가하신다.67 예수님의 판결은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의 심판 사역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보폰과 쾨스터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두 가지 점이 분명하다. 하나는 그때 요한의 세례(침례) 사역(참조, 3:3)에 따르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따르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분류되는 세금 징수원과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개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요한의 세례(침례)에 대한 순종 여부로 이미 나누어졌고, 그 이래로 계속 나누어졌다.68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봐야 할 지도층은 몰라보고, 알아보지 않아도 될 보통 사람은 알아본다. 그들 정체적 역할의 반전은 ‘아이러니’하다.69

요한이 베푸는 세례(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죄를 참으로 회개했다는 증거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고 하나님의 방법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세례(침례)를 거절한 것은 회개 메시지도, 그의 나라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의 가르침과 세례(침례)는 하나님 나라의 진입을 위한 준비의 유효한 표시이다.”70 요한과 예수님은 각자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 표시를 드러냈으나,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 표시는 적절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지혜에 열린 사람은 요한과 예수님의 진짜 의의를 꿰뚫어 본다.71

[31-32] 그러니, 내가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견주며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 그들은 저잣거리에 앉아 ‘우리가 너희를 위해 불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슬피 울었어도 너희는 울지도 않았다’라는 말로 서로 불러내는 아이들과 같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이 세대 사람을 저잣거리에서 결혼 잔치 놀이나 장례식 놀이에 걸맞게 반응하지 않는 것에 불평하는 아이들에 견준다. 탄네힐에 따르면, 그들은 요한의 세례(침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로, 예수님과 요한이 자신들의 기대에 따르지 않은 것을 불평한다.72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대가 자기 기대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활동을 저버리는 철부지 아이들이라고 책망하신 것이다.73

[33-34] 마찬가지로 세례(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너희는 ‘그가 귀신들렸다’라고 말한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는 ‘보라, 먹보며 술고래이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이다’라고 말한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자기 기대를 고집하는 철부지 같은 이 세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저버린 파렴치한 짓을 자세히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례(침례)자 요한과 인자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국면들을 깨닫지도 못했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 거부한 철부지이다. 그들이 세례(침례)자 요한이 전하는 회개에 따른 세례(침례)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라는 중요한 메시지는 듣지 않고 덜 중요한 생활 방식을 문제 삼았다는 책망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자의 메시아 축제를 부정한 무리로 해석해 거부했다. 인자의 메시아 사역이 죄인을 용서해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누리게 한다는 것에 무지하다는 책망이다.74 인자 메시아의 책망은 곧 심판 사역이다.

[35] 그러나 지혜는 그 모든 자녀에게서 올바로 인정된다. 의인화된 지혜(35절)는 하나님의 뜻(30절)과 동의어이다. 이 세대의 방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비아냥대도 지혜는 많은 자녀75를 거느리고 결국 옳다고 인정받는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은 그 성취로 정당하다고 입증된다.

요약하면, 누가는 예수님께서 인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고 들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셨고, 세례(침례)자 요한도 예언자로서 이 사역에 이바지했다고 평가한다(18-35절).

3.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해 자비 실천(36-50절)
이 단락에서 서술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죄 용서 은혜에 부응하는 자비 실천으로 지혜로운 자녀임을 입증하라고 가르치신 것을 서술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관한 대조의 원리가 자세히 예시된다.76 세례(침례)자 요한에 관한 일화 다음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식탁 대화’(심포지엄)에서 죄인 여성의 용서와 사랑에 관한 일화가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기 때문이며(34절), 또한 서사 과정이 이스라엘의 극적 분리를 예시하기 때문이다(29-30절).77

[36-37a]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한 사람이 자신과 함께 먹자고 그분께 잇따라 부탁해, 그분께서는 그 바리새인 집에 들어가셔서 기대셨다. 보라, 그리고 고을에 죄인인 여성이 있었는데, 서술자 누가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지 않은 채 새로운 사건을 서둘러 서술한다(36절). 정결을 주요 가치로 여기는 바리새인은 아마도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생각에’78 먹보며 술고래이고 세금 징수원과 죄인의 친구로 비난받은(34절) 예수님을 식탁 교제에 끈질기게 초대한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달갑지 않은 초대에 응해 그의 집에 마련된 ‘식사 자리에 기대셨다.’79 이렇게 식탁 대화 무대가 열린다. 서술자 누가는 독자의 관심을 끄는 말, 곧 ‘보라!’로 유대 고을에서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받는 익명의 여성80을 소개한다.

[37b-38] 그녀는 그분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기대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향유 단지를 가져와, 그분의 발 곁 뒤에 서서 울면서 많은 눈물로 그분의 두 발을 적시기 시작했고 그녀 머리카락으로 닦아냈고 그분의 두 발에 입 맞추고 또한 향유로 바르고 있었다. 서술자 누가는 그들이 어떤 대화도 아직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한 죄인 여성이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고 식사 자리에 불쑥 끼어들어, 정결해야 할 식사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이어간다고 보고한다. 누가는 분사 4개, 부정사 1개, 동사 3개 등으로 자세히 서술한다. 죄인 여성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 뒤에서 그분 발에 눈물을 계속 흘리고, 눈물에 적신 발을 머리카락으로 훔쳐내고, 다정하게 존경의 표시로 그 발에 입 맞추고, 그러고는 향유를 바른다. “지극한 존경과 복종, 그리고 애정의 표시이다.”81

[39] 그런데 그분을 부른 바리새인은 보고서 혼잣말로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그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지,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 텐데!”라고 말했다. 바리새인은 죄인 여성의 돌발 행동에 속상했는지 자신이 초대한 손님인 예수님을 경멸하면서 가정82의 혼잣말을 한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위대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또한 유대 정결법 사상에 기초해 죄인과 접촉을 정죄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나 독자는 위대한 예언자 예수께서 시신을 실은 들것, 곧 부정한 물건을 만지신 사실(14절)을 기억하며, 바리새인의 혼잣말에 역설적으로 반박한다. 다르는 바리새인을 요한의 세례(침례)를 경험하지 않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대표자로, 그리고 죄인 여성을 회개 세례(침례)를 경험한 죄인 대표자라고 분석한다.83

[40a]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라고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혼잣말(내적 고백)을 가로막아 식탁 대화 교제에 흐르는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여신다. 이 발화는 제시할 내용에 주의를 끄는 구술 장치이다. 바리새인의 생각까지도 알아채는 예수님은 참 예언자로서, 교정할 목적으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인의 이름을 ‘시몬’을 말하심으로 대화를 ‘개인적인 차원’84으로 전환해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며 가르치신다.

[40b] 그러자 그는 “선생님, 곧바로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관 역할을 했으면서도 겉으로는 학생인 척하는 이중적 모습으로, “선생님, 곧바로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뜻의 말을 건넨다.

[41-42] “두 명의 빚쟁이가 어느 돈놀이꾼에게 있었는데, 한 명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한 명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그들이 갚지 못해서 그는 둘에게 빚을 물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면 그들의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의 예수께서는 빚 삭침과 그 반응에 관한 비유 발화로 대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리신다. 두 사람이 진 빚은 각각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으로, 무려 10배 차이의 금액이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 정도니, 한 주에 엿새 일하는 것으로 치고 각각 두 해와 두 달 정도를 일해야 하는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두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해서, 돈놀이꾼은 둘의 빚을 삭쳤다. 곧, 자비의 은혜를 베풀었다. 비유는 10배 차이의 반응을 기대하는 수사의문문으로 마친다. “이 비유에서 사랑은 공짜로 받은 호의에 대한 반응, 실제로는 참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85 그렇다면 이 비유는 ‘새로운 각도에서 상황을 판단하게 하는 상상적 가교 장치’86이다.

[43] “저는 더 많은 빚을 물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네가 바르게 판단 했다” 시몬은 궁지에 몰린 채 마지못해, 더 많은 빚을 물지 않은 사람이 더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이 바르게 판단했다고 평가하신다. 바리새인 시몬에게도 희망이 없진 않다.87

[44-47] 그리고 그분은 그 여성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너는 이 여성을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을 위한 물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성은 내 발에 눈물을 흘렸고 그녀 머리카락으로 훔쳐냈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멈추지도 않았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내 발에 향유로 발랐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으니, 그래서 그녀가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시몬이 여성을 바라보게 하시고, 정결 관행에 따름으로 실수한 바리새인 시몬은 책망하시고 실수한 남성에게 죄인으로 치부된 여성은 칭찬하시는 반전의 말씀을 이어가신다(44-47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과 여인에게서 받은 대우를 세 개로 대조하신다: 물로 발 씻김, 발에 입맞춤, 머리에 기름 부음. 이 대조는 죄인 여성이 시몬이 했어야 하는 것 이상을 했다고 전략적으로 강조한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죄 용서 선물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만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곧 하나님을 아는 만큼 많이 사랑한다고 가르치신다(47절). “이 여성은 죄 용서받고 적합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죄인의 전형이다.”88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 뒤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그 방식대로 진행해 자녀를 낳는다. 죄인 여성은 죄 용서에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적극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임을 드러냈다.89 “사랑은 이전의 죄 용서를 깨달음, 받아들임, 그리고 반응을 입증한다.”90

바리새인 시몬이 의인인 척하지 않고 자신이 심각한 죄인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죄 용서에 더 감격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것이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에게 그런 반응을 기대하신다.91 그렇게 하려면 자신과 한 쌍을 이룬 ‘죄인 여성에게 죄 용서받음에서 기인한 강한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죄 용서받고, 더 성숙하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 그 사실을 입증하는 기회를 살리라고 촉구하신다.92

[48] 그러시고는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네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죄 사함의 확신을 선언하신 이유는, 이제 그녀가 바리새인 시몬처럼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들을 만나며 살아야 하고,93 그들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이다.

[49] 그러자 기대고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심지어 죄도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죄인 여성은 조용히 듣고 있는데, 다른 손님들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어 예수님의 죄 용서 선언을 두고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속으로 질문한다. 독자는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예언자적 메시아임을 잘 알기에 그들의 중얼거림이 그르다고 판단한다.

[50]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의 예수께서는 손님들의 불평스러운 혼잣말에 더는 대꾸하시지 않고 여성에게 죄 용서 근거가 믿음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친절하게 내보내시며 평강으로 축복하신다.94 죄에서 구원되었으니 평안한 삶을 살라는 축복이다. 여성은 사랑 실천이라는 가르침을 식사 대화 교제 자리에 남기고 사랑 실천의 장으로 유유히 길을 떠난다.

요약하면, 서술자 누가는 죄 용서받은 여성의 사랑 실천 본보기와 빚 삭침에 따른 반응 비유로, 하나님의 죄 용서 은혜에 부응하는 자비 실천으로 지혜로운 자녀임을 입증하며 살라고 가르친다(36-50절).

현대적 적용

서술자 누가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적 강자든 약자든 모두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성취 사역을 믿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제자도, 곧 ‘참 지혜의 제자도’를 권면한다(눅 7장). 참 지혜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관한 통찰력’으로 정의되는 하나님의 지혜95를 깨달아 알고,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하는 것, 특별히 사랑을 실천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증한다. 이 핵심 권면을 이루는 지지 권면 몇 개를 정리해 보자.

[6b-7] 주님, 자신을 더는 힘들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제 처마 아래로 들어오시게 하는 것이 저에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께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만 하셔서 제 사랑스러운 종이 낫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며 생활하는 한 원리는 자신의 상대적 가치를 정확히 알고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상대적 가치를 정확히 알기에, 귀하신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춘다. 자신의 상대적 가치 평가에 실패하면 자칫 절대적 가치를 내세우며 자만하거나 교만하기에 십상이고,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백부장은 자신의 상대적 가치를 알기에 주님의 말씀 능력을 더 강하게 믿는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사역하심을 깨달았고, ‘말씀으로만’ 치유되길 바랐다.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른바 ‘번영 신학’이나 ‘경영 신학’ 또는 ‘심리 신학’에 밀려 진지하게 연구되지도 선포되지도 않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제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한국 사회에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듯이,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성경에서 끌어낸 의미가 삶의 현장에서도 의미 있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다스림의 경험 지수를 높일 수 있다.

[16] 그런데 모든 사람은 놀라 떨며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세워졌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려고 찾아오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계속 있게 해야 할 영적 통찰력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려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선포, 교육, 치유 사역 등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다스림을 이루신다.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적은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이자 주님으로서 하신 사역이며, 그 기적 사역은 하나님의 오심과 도우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기독론을 차별화한 기독교 기원이나 삼위일체의 기독론을 더 강조하거나, 또는 지나친 기독론 중심의 성경해석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 신앙의 열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29-30, 35] 그러자 들은 모든 백성과 세금 징수원도 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은 그에게 세례(침례)를 받지 않음으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 그러나 지혜는 그 모든 자녀에게 올바로 인정받는다. 누구나 지혜로운 삶을 바라는데, 흔히 그것을 처세술에 뛰어난 삶으로 이해하고 바라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다른 차원의 지혜로운 삶을 간절히 바라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지혜를 정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지혜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참 지혜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야 할 사명이 있다. 이런 지혜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더 효과적으로 세상에 선포되고 확장된다.

[47] 그러므로 나는 네게 ‘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으니, 그래서 그녀가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는다’를 사자성어로 결초보은이라 하고, 반대로 ‘남한테 입은 은덕을 저버린다’라는 말은 배은망덕이라 했던가. 배은망덕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로 바람직하지 않다. 은혜를 입고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마음으로나 말로 감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 은혜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은 은혜의 가치를 정확하게 헤아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자주 듣는 ‘갚을 수 없는 은혜’라는 말이 놀랍고 엄청난 은혜라는 뜻이지, 갚으려 들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죄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할 수 있다면 받은 은혜에 ‘비례해’ 적극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참 지혜로운 삶의 최고점이리라.

설교: 참 지혜의 제자도(1-50절)96


누가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경험하며 평화롭고 자비로운 공동체 삶을 살게 하려고(6: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1:1-3). 누가복음 7장에서 누가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적 강자이든 약자이든 모두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성취 사역을 믿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참 지혜의 제자도’를 힘주어 권면합니다. ‘참 지혜의 제자도’를 이루는 비결을 살펴봅시다.

1.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1-10, 11-17절)
우리 삶의 영역에는 회복이 필요한 여러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지병을 앓아 힘들어 하는 가족이나 친하게 지내는 분에게는 건강 회복이 필요합니다. 병이 더 심각해 죽음을 맞아야 할 상황에 이르면 생명 회복이 더 강하게 필요합니다. 이 본문의 한 인물인 이방인 백부장에게는 생명 회복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종이 숨을 거두려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장로로 구성한 사절단을 급히 보내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서 해결하려다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벗으로 구성한 사절단을 통해 대안을 전달합니다. “굳이 힘들여 집에까지 오시지 마시고, 지금 계신 곳에서 말씀의 권위로, 말씀의 능력으로 제 사랑하는 종을 살려 주세요!”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까지도 깜짝 놀라게 했고, 이스라엘에서도 기대하지 못한 강한 믿음이라는 칭찬을 받고, 부닥친 문제도 해결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도 단지 말씀의 능력을 믿음으로만 그분의 자비 사역을 경험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 주님의 자비 사역을 경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회복을 경험하는 한 비결은 그분의 말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넋을 잃게 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는 시름에 싸여 이렇다고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멍합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그런 모습은 믿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어 보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주님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주님의 긍휼로!”

나인에 사는 여성은 남편을 잃은 홀어미였는데 외아들마저 죽어서 시신을 묻으러 가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녀의 하염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가슴을 멍들이지 않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번에도 말씀으로 해결하십니다. 홀어미의 죽은 아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젊은이, 내가 자네한테 말하니 ‘살아나라!’”

자비로운 회복 사역을 하신 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예언자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모든 회복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어떤 일에서라도 회복을 경험하셨다면, 이런 고백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주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며 영화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참 지혜의 제자도’를 이루는 한 비결은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합시다(18-35절)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그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가엾고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확장하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 소신대로 예언자의 삶을 산 사람, 여성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세례(침례)를 준 사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의롭다는 반응을 끌어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침례)자 요한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며 바라는 인물이지 않습니까? “네!”라는 대답은 잠시 미뤄 둡시다. 왜냐고요?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주님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 메시아 시대를 열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자비 사역으로 확장하고 계신데도, 그는 다만 자신이 기대하는 심판 사역을 하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를 확인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증거를 대시며 심판(판정) 사역을 하십니다. 여러 가지 자비 사역으로 자신이 메시아시라고, 구약성서를 암시적으로 인용해 세례(침례)자 요한이 뛰어난 예언자라고, 요한의 세례(침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한 것이며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라고, 인자로서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향연을 즐긴다고 판정(심판)하십니다.

세례(침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한 비결, 곧 ‘참 지혜의 제자도’를 이루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서든, 예언자이며 세례(침례)자인 요한을 통해서든, 그리고 축제 방식으로든, 예언자 방식으로든 하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정하고 입증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해 사랑(자비)을 실천합시다(36-50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하는 사랑 실천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증하는 겁니다. 그 모범의 대표자가 바로 바리새인에게 죄인으로 무시받았던 여성입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많은 사랑을 표현합니다. 관행적 정결을 추구하는 유대주의 사회에서 신분적으로 죄인인 사람이 눈물로 남자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을 풀어내려 남자의 발을 닦고, 입도 맞추고, 향유까지 바르는 행위는 죄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주의 관행적 정결 판결을 달갑게 여기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성의 활동을 죄 용서받은 것에 비례한 적극적 사랑 실천으로 평가하시고, 바리새인 시몬에게도 그것을 바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롭게 살게 되었으니, 그 은혜에 부응하는 또 다른 삶을 찾아봅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전하는 데 재산을 투자하면서까지 참여하는 겁니다. 우리도 죄인 여성, 제자들, 그리고 여러 여성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죄 용서 은혜에 부응해 사랑을 실천함으로 참 지혜의 제자도를 이룹시다.

이제, 설교를 정리하며 마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참 지혜의 제자도’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 사명을 이루는 비결, 곧 참 지혜의 제자도를 이루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1-10, 11-17절). 둘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의로운 지혜를 입증합시다(18-35절). 셋째,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해 사랑을 실천합시다(36-50절). 참 지혜의 제자도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1) 본문 사역은 헬라어 신약성경 UBS 5판을 모판으로 했으며, 누가복음서 서사(dih,ghsij디에게시스, 눅 1:1) 서술 양식도 고려해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다. 출처 표기는 주로 미주로 하지만, 지면 제한 이유로 사전이나 성서 번역본은 본문 약주로도 표기한다. 같은 이유로 참고 자료는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2) 헬라어 신약성서 본문 석의와 사역 원리는 대럴 L. 박, 뷔스트 M. 패닝 편, 《신약성서 해석학: 석의의 예술과 과학》, 김광모 옮김 (이천: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17)을 참고하라.
3) Darrell L. Bock, Luke: 1:1-9:50, vol. 1,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1994), Logos Bible Software, p. 636.
4) The New English Translation Bible(약어. NET), Logos Bible Software.
5) Johannes E. Louw and Eugene A.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2 vols., 2nd ed.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89), BibleWorks, v.10, 22.16.
6) J. Reiling and J. L.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Logos Bible Software, p. 294.
7) Louw-Nida 87.77;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ed. D. A. Carso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Nottingham, England: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Apollos, 2015), Logos Bible Software, p. 209.
8) NET; Bruce Manning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4), Logos Bible Software, p. 118.
9)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 296
10)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Testament, p. 119.
11) Albert Barnes, Notes on the New Testament: Luke & John, ed. Robert Frew (London: Blackie & Son, 1884-1885), Logos Bible Software, p. 49.
12) Bock, Luke: 1:1-9:50, p. 652.
13) 참고. R. L. Overstreet, “The Greek Concept of the ‘Seven Stages of Life’ and Its New Testament Significance.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19, no. 4 (2009): p. 563.
14)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15.
15) 참고. John Nolland, Luke 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Books, 1989), Logos Bible Software, p. 323은 자동사 능동형 의미라고 설명한다.
16)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p. 119.
17) 《루가 복음서》, 정양모 역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3 (왜관: 분도출판사, 1983), p. 77.
18)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pp. 119-120.
19)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 310는 결과 부사절로도 본다.
20) Joseph Thay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bridged and Revised Thayer Lexicon (Ontario, Canada: Online Bible Foundation, 1997), BibleWorks, v.10. p. 1417.
21)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 315.
22)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Logos Bible Software, p. 433.
23) Kenneth E. Bailey, Poet & Peasant and Through Peasant Eyes: A Literary-Cultural Approach to the Parables in Luke, Combined Edition., vol. 2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3), Logos Bible Software, pp. 17-18.
24) Bock, Luke 1:1-9:50, pp. 703-705; C. H. Talbert, Reading Luke: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Third Gospel, rev. ed. (Macon, GA: Smyth & Helwys Publishing, 2002), p. 90은 효과로 이해가 언어학적으로 가능하며 또한 문맥적으로 사랑이 죄 용서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25) John Nolland, Luke 1: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Incorporated, 2002), Logos Bible Software, pp. 313, 318은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종말적 방문’으로 표현한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심방 모티프는 중요하다(7:16; 1:68, 78).
26) 참고. Bock, L
uke 1:1-9:50, p. 629; Trent C. Bulter, 《Main Idea로 푸는 누가복음》, 메인 아이디어 시리즈 3, 장미숙 옮김 (서울: 디모데, 2003), pp. 153-172.
27) 하나님 나라 선포와 확장에 이바지하는 여러 여성 이야기(8:1-3)도 자비 실천 단락(7:18-8:3)에 포함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vol. 28,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Logos Bible Software, 648). Bock, Luke 1:1-9:50, p. 629는 ‘여성의 믿음’으로 묶는다.
28) 필자는 언어학적 석의로 사역한 본문을 서사로 읽으며 해설한다. 서사로 복음서 읽기는 필자의 졸저인 《마가의 서사적 기독론》 (서울: 한들출판사, 2005)과 《마가 내러티브 설교의 제자도》 (대전: 에이레네 글빛, 2014)를 참고하라.
29) 평지 설교는 세 부분, 곧 복과 화의 예언적 부름(20-26절), 사랑과 심판에 관한 권면(27-38절), 의로운 삶을 촉구하는 권면(39-49절)으로 구성한다.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축복, 공의, 성품의 실재 앞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Bock, Luke 1:1-9:50, p. 548).
30) Franois Bovon, Luke 1: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1:1?9:50, tr. Christine M. Thomas,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2), Logos Bible Software, p. 260.
31) 이방인 백부장은 헤롯 안티파스 군대 소속 일원으로서, 갈릴리 지역에 물건을 들이고 내는 통관 업무를 담당했을 것이고(George R. Blis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Philadelphia: American Baptist Publication Society, 1884], Logos Bible Software, p. 126; Nolland, Luke 1:1-9:20, p. 318), 유대 민족을 사랑해 회당 건축을 지원한 것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할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Bock, Luke 1:1-9:50, pp. 636, 638).
32) ‘미완료 h;mellen(에멜론) + 부정사 현재형 teleuta/n(텔류탄)’이 절박한 상황을 드러낸다(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p. 389).
33)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 293.
34) 참고. Bovon, Luke 1, p. 260; 윤철원, 《누가복음》 (부천: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pp. 201-202.
35) 참고. 후견인-의뢰인 관계에서 후견인은 이익을 본 의뢰인에게 지지를 요구하면서 관계를 지속한다(Robert C. Tannehill, Luke [Nashville: Abington Press, 1996], p. 124).
36) 참고. ‘가치 있는’과 ‘가치 없는’의 아이러니한 대조가 두드러지는데(Edwards, Luke, p. 211), 이방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해 무가치함을 잘 알고(Bovon, Luke 1, p. 262), 그래서 예수님의 인격도 알았을 것이다(Nolland, Luke 1:1-9:20, p. 319).
37) Nolland, Luke 1:1-9:20, p. 319.
38) Bock, Luke 1:1-9:50, p. 640.
39) Tannehill, Luke, p. 125. “이방인 믿음이 위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유대인 믿음보다 더 위대하다.”(Craig A. Evans, Luke, Understanding the Bible Commentary Ser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0], Logos Bible Software, p. 114).
40) Bock, Luke 1:1-9:50, p. 642.
41) Tannehill, Luke, p. 123; Bovon, Luke 1, p. 261.
42) Bock, Luke 1:1-9:50, pp. 649-650; Bovon, Luke 1, p. 271; Bruce J. Malina and Richard L. Rohrbaugh, Social 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Minneapolis: Fortress, 1995), pp. 329-330.
43) Bovon, Luke 1, p. 271-272.
44) N.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The English Text with Introduction, Exposition and Note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52), Logos Bible Software, p. 223
45) Bovon, Luke 1, p. 273.
46) 위대한 예언자가 ‘세워졌다’에 쓰인 동사는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에게 ‘살아나라’라고 명령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 evrei,rw(에게이로)의 신적 수동형이다.
47) Bock, Luke 1:1-9:50, p. 653. 하나님의 심방 모티프가 요한 출생 이야기(1:68)에서 예고 국면이면 예수님의 사역 이야기에서는 성취 국면이다(Edwin D. Freed, The New Testament: A Critical Introduction [London: Wadsworth, Inc., 1986], p. 157; Tannehill, Luke, p. 128).
48)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16.
49)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p. 648.
50)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16.
51) Tannehill, Luke, p. 127; Nolland, Luke 1:1-9:20, p. 313.
52) Talbert, Reading Luke, p. 81.
53) John A. Martin, 《누가복음》, BKC 강해주석 시리즈 21, 이명준 옮김 (서울: 두란노, 1989), p. 70.
54)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19.
55) Bock, Luke: 1:1-9:50, p. 666; Tannehill, Luke, p. 130.
56) John A. Darr, On Character Building: the Reader and the Rhetoric of Characterization in Luke-Act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p. 76.
57) Bovon, Luke 1, p. 278; Tannehill, Luke, p. 131.
58) Talbert, Reading Luke, p. 81.
59) Tannehill, Luke, p. 131; Darr, On Character Building, p. 76; Bock, Luke: 1:1-9:50, pp. 668-669.
60) Nolland, Luke 1:1-9:20, pp. 318, 332.
61)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21은 세례(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걸려 넘어졌다고 설명한다.
62) Bock, Luke: 1:1-9:50, p. 669.
63) Bovon, Luke 1, p. 283.
64) Blis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p. 134.
65) Tannehill, Luke, p. 133; Nolland, Luke 1:1-9:20, p. 339.
66) Bock, Luke: 1:1-9:50, pp. 675-676; Martin, 《누가복음》, p. 72; Butler, 《누가복음》, pp. 159-160.
67) Blis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p. 135;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 310. 그러나 Bock, Luke: 1:1-9:50, p. 676; Steven M. Sheeley, Narrative Asides in Luke-Acts, JSNTSup 72 (Sheffield: JSOT Press, 1992), p. 114는 서술자의 삽입적 언급, 구체적으로 내적 견해를 알려주는 방백으로 여긴다.
68) Bovon, Luke 1, p. 279.
69) Sheeley, Narrative Asides in Luke-Acts, p. 142.
70)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23.
71) Nolland, Luke 1:1-9:20, p. 341.
72) Tannehill, Luke, p. 133.
73) Bock, Luke: 1:1-9:50, pp. 680-681; NET. 정양모 역주, 《루가 복음서》, p. 79의 ㉠에 따르면, “이 비유의 뜻이 … 당대인들은 세례자도 예수님도 외면했다 한다.”
74) Bock, Luke: 1:1-9:50, p. 683.
75) 참고. 정양모 역주, 《루가 복음서》, p. 79의 ㉣에 따르면, 세례(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지혜로 이뤄졌다고 인정하는 ‘지혜의 자녀’가 있는데, 31-35절을 고려하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으나, 29-30절까지 고려하면 모든 백성과 세금 징수원을 가리킨다.
76) Talbert, Reading Luke, p. 88; Bailey, Poet & Peasant and Through Peasant Eyes II, p. 1.
77) Bovon, Luke 1, p. 291.
78) Martin, 《누가복음》, p. 73.
79) 1세기 중동에서 식사는 식탁에 앉아서 하지 않고, 바닥에서 머리는 낮은 탁자에 가장 가까이에 그리고 다리는 가장 멀리해 비스듬히 기대서 했다(NET; Louw-Nida 17.23)
80) 참고. Bovon, Luke 1, p. 293은 그녀가 성 매매하는 여성이었다고 생각하고, Bock, Luke: 1:1-9:50, p. 689는 좋지 않은 직업을 가진 남성의 아내였을 가능성도 덧붙여 말한다.
81) Martin, 《누가복음》, p. 74; Bock, Luke: 1:1-9:50, p. 697. Bailey, Poet & Peasant and Through Peasant Eyes II, p. 9는 여자가 다른 남자 앞에서 머리를 풀어 내리면 이혼 사유였다는 탈무드 기록을 설명한다.
82) 사실에 대한 반대를 가정하는 2조건문이다(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p. 695).
83) Darr, On Character Building, p. 101.
84) Tannehill, Luke, p. 136.
85) Bailey, Poet & Peasant and Through Peasant Eyes II, p. 13.
86) Tannehill, Luke, p. 136.
87)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 231.
88) Darr, On Character Building, p. 34.
89) Nolland, Luke 1:1-9:20, p. 360.
90) Bock, Luke: 1:1-9:50, p. 704.
91) 참고. Craig L. Blomberg, 《비유해석학》, 김기찬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p. 236; Bailey, Poet & Peasant and Through Peasant Eyes II, p. 18.
92) Tannehill, Luke, pp. 136-137.
93) Tannehill, Luke, p. 137.
94) Bovon, Luke I, p. 291.
95) Reiling & Swellengrebel, A Handbook on the Gospel of Luke, pp. 144, 315
96) 성서의 서사 본문을 설교할 때는 이야기 층위의 한 사건만을 다루기보다 “서술 층위에서 내포독자가 반응으로 보일 인식이나 행동의 결단”으로 정의되는 서사적 사건을 본문으로 잡아야 저자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잘 파악해 설교할 수 있다(김광모, “마태 내러티브의 플롯: 내포독자의 내러티브 사건 인식을 중심으로(1)”, <성침논단> 3집, 2005, p. 211).


 

김광모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침레신학대학교 대학원(Ph.D.). 저서로 《마가 내러티브 설교의 제자도》, 《마가의 서사적 기독론》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