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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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7년  11월호해석의 기초와 사명 신국원 교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문학적 성경 읽기와 설교(4)

포스트모던은 ‘해석의 문화’입니다. 이 시리즈 첫 강의에서 역사의 흐름을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후근대(또는 포스트모던)로 나눈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고대가 신화와 고전의 문화라면 중세는 주석의 문화입니다.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근대는 이성과 과학에 의한 분석과 비판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가 해석의 문화인 이유는 텍스트 자체보다 해석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은 신탁과 계시의 정전(正典, canon)에 복종했으며 중세까지도 그 권위는 존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주석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인 근대에 들어와 권위적 텍스트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근대는 이성의 검증을 통과한 사실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니체의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전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전히 ‘삶과 교리’의 근원이 됨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제입니다.

텍스트의 확대

목회자들이 ‘해석의 문화’를 주시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설교는 물론이고 사실 목회와 신학 전반이 기록된 계시인 성경 해석에 기초한 작업입니다. 따라서 설교만이 아니라 목회 전반이 건전한 해석학 원리를 요청합니다. 사실 신학과 목회의 소명이 해석의 소양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해석학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글로 쓰인 ‘텍스트’(text)를 읽고 이해하는 일과 아주 흡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텍스트처럼 우리가 태어나 대면하는 모든 것은 의미들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해 설명하기에 앞서 그것들은 먼저 있습니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 이해를 기대하듯, 삶 자체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해석의 문화’가 대두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와 더불어 근대 학문을 지배했던 과학이 사물과 사태를 객관적이며 비인격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진리를 드러내는 데 명백한 한계를 보인 것도 해석에 관한 논의가 중요해진 이유입니다.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학에서는 연구 대상의 인격적 성격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는 단지 자료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학 작품은 작품에 대한 언어적 분석으로 그 의미가 온전히 파악될 수 없습니다. 예술품 이해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사실에 대한 일방적 설명이 아니라 삶이 인격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현대 해석이론에서 말하는 해석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현대 해석학에서의 텍스트 개념은 방대합니다. “글쓰기에 의해서 고정된 담론들”(discourse)이라는 리쾨르의 정의는 고전적입니다. 담론이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말함”(someone saying to someone something about something)을 뜻합니다. 글쓰기의 결과로 독자가 읽게 되는 글인 본문, 교과서, 소설과 시 등이 텍스트입니다. “담론으로서의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서 전유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무엇인가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해석학에서는 텍스트를 글로 쓰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그림이나 상징은 말할 것도 없고 영상과 음악, 조각, 건축, 제도나 체제 등 의미를 담은 모든 문화적 사물을 텍스트로 봅니다. 이런 텍스트의 개념은 지난번 예술 논의에서 인문학이 글씨(文)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무늬(紋)에 대한 배움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모든 문화산물(텍스트)을 고정적이고 지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무규정적, 비지시적인 언어로 보고 독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스트모던에서는 텍스트의 개념이 확대될 뿐 아니라 해석에 대한 접근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 통찰에서 목회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한 신학자는 해석학적 통찰이 목회 신학을 어떻게 심화할 수 있는지를 열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특히 과학적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근대적 태도와 달리 해석학은 인격적인 인간 이해를 갖도록 돕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해석의 다양화

‘해석의 문화’에는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앎의 양식’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의미가 너무 다양화되어 상대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앞선 강의에서 언급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들은 그 속내를 잘 드러내 줍니다(9월호 pp.130-131.). 《자기 반성을 위하여》(1848)에 나오는 이 비유들은 교조적이며 관습적 신앙에 빠져 생명력을 잃은 당시 덴마크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거울, 연애편지, 왕의 칙령을 받아 든 신하들의 비유는 놀랍게도 170년이 지난 지금의 ‘해석의 문화’에도 꼭 들어맞습니다.  

첫째, 거울의 비유는 야고보서 1:22-27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기에 키에르케고르 특유의 날카로운 비판이 더해졌습니다. 당시 해박한 신학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의 신앙에 빠진 신학을 “거울에서 본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꼰 것입니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유리 표면을 검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대신에 거울을 살피는 데 온 신경을 쓰는 오류를 꼬집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 자체를 보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레슬리 뉴비긴의 “성경은 바라볼 책이 아니라 통해서 볼 책”이라는 말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이 비유는 신학적 지식이나 방법론 자체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에 주력하는 사람을 향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연애편지의 비유는 이상한 언어로 쓰인 편지를 읽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전을 뒤지며 한 단어씩 번역 중인 사람이 거기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누릴 겨를이 없음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는 문자와 씨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성경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어의와 맥락에 주목하고 원어의 의미와 배경을 샅샅이 검토하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텍스트의 이해를 위한 언어적이며 역사적인 탐구는 아직 진짜 읽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캐빈 밴후저(Kevin Vanhoozer)는 근대 성경 비평의 위험은 여전히 거울 표면 검사에 불과한 부족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같은 부족함이 문법적이며 역사적 해석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해석자들 사이에도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편지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므로 안경의 비유가 더 적절합니다.

마지막으로 왕의 칙령을 받아 든 신하들의 비유입니다. 문제는 신하들이 칙령을 시행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다양하게 해석하기에 바쁩니다. 서로 해석이 다를 뿐 아니라 매일 새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백성들은 다양한 제안을 따라잡기 어려워 혼란에 빠집니다. 결국 아무도 왕의 조례를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은 해석일 뿐이라고 보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문화’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어두운 면입니다.

이런 상황은 해석에 관한 생각이 급변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현대 해석이론은 텍스트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비교적 근래까지도 의미는 텍스트 속과 저자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의미가 “[성경] 텍스트 안에는 독자의 해석 활동과 별개로 독립되어 있는 어떤 실재를 반영하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면 [성경] 텍스트는 오로지 독자의 실재를 반영할 뿐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현대 해석이론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의미의 서곡

물론 근래에 개발된 해석학에는 해체이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보다 훨씬 깊이 있게 텍스트에 접근하는 해석학적 통찰들은 성경 이해를 도와 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 다양한 텍스트 해석의 모습에 대한 세 비유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계약서의 비유입니다. 요즘의 보험 계약서나 신용카드 서류들은 작은 글씨까지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말씀을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인 신구약(新舊約)으로 부르는 것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약을 새롭게 개정하는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데 흐라프(De Graaf)의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과 성취(Promise and Deliverance)의 구조를 갖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처럼 새로운 약속을 지키실 것을 소망하게 하는 증언(witness and testimony)이기도 합니다.

계약서가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요청한다는 점은 어쩌면 부정적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약과 언약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계약은 서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약서의 본질은 만약 상대방이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배상을 받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언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 그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복음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훌륭한 해석학 책을 쓴 미국의 신학자 캐빈 밴후저도 이와 흡사한 주장을 합니다. 그는 텍스트 해석을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는 텍스트를 ‘선물’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의미는 텍스트 안에 담겨 이를 주목하고 존중하며 접근해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줄 채비를 하고 있는 선물 꾸러미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텍스트는 독자 편에서의 책임 있는 반응을 초청한다고도 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해석자는 텍스트라는 낯선 객을 맞아서 그를 이해하고 대접하는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근동 지역의 관습적 의무에 비유하기까지 했습니다. 해석이 포스트모던에서처럼 해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해체는 텍스트의 초대를 거절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는 텍스트를 나름대로 이용하는 것도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설교를 위해 이용하는 태도도 그의 비판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밴후저가 두 번째로 든 예가 계약서 비유에 근접합니다. 그는 텍스트를 “저자의 담론을 문자로 구현한 몸”, 즉 저자의 체현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일종의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그는 성경을 접하는 독자를 텍스트와 더불어 언약을 체결한 조인자에 비유합니다. 그는 이를 ‘담론의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언약에는 다른 언약과 같이 환대가 필요합니다. 환대는 ‘예배, 경외와 감사, 찬양, 헌신, 거룩한 산제사’를 수반합니다. 담론의 언약이라는 비유는 “해석에 있어 텍스트 내용에 대한 언약적 신실성은 언약의 축복인 이해를 받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는 “이해는 다양한 종류(장르)의 텍스트의 규칙 지배성에 대한 적절한 능력을 갖춘 저자들과 적절한 능력을 갖춘 독자들 사이의 언약적 동의를 따를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로 텍스트를 ‘악보’에 비유합니다. 악보가 분석되고 연주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악보나 텍스트의 읽기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가능성을 실현하고 시행하는” 점에서 같습니다. 사실 악보는 음악이 아닙니다. 그것이 실제로 연주되고 들려질 때에 비로소 음악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텍스트를 ‘의미의 서곡’이라고 했습니다. 악보는 “연주하도록 결정된 어떤 것을 제시하지만 어떤 선택을 연주자에게 남겨”둡니다. 악보는 자유로운 연주의 안내 지침인 셈입니다. 하지만 연주는 무제한적 자유를 구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텍스트의 지시를 따라갑니다.

밴후저는 이 비유의 핵심은 해석에 있어서 텍스트는 ‘규범’이며 해석은 ‘실연’(實演’)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악보가 그렇듯이 텍스트에는 해석자가 따라야 할 규칙이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연주가 악보에 종속되어야 하듯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해석은 성경이 제시하는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밴후저가 제시한 예처럼 복음서를 당시 기후 패턴을 파악할 목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일대기를 세세히 알려 주기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존 스토트의 말처럼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His Person/Works)를 알려 주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판단입니다.

해석과 연주

밴후저가 다시 텍스트를 ‘지도’에 비유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지도의 목적은 그것을 바로 읽고,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 마찬가지로 해석의 바른 태도는 텍스트가 “우리의 동행이 되어 우리가 갈 방향을 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텍스트에는 해석자가 따라야 할 규범이 담겨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해석학적 정언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명령에 대해 “텍스트를 목적으로 보지 말고 내 말이 바로 이해되기를 바라듯 해석하라”라고 부연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텍스트는 그 자체의 제약들을 가지고 있는 ‘변주의 공간’입니다. 해석은 변주의 공간이므로 많은 자유를 누릴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해석의 자유는 결코 무제한적이지 않습니다. 악보나 지도가 연주자와 여행객에게 부과하는 제약처럼, 해석자는 텍스트가 부과하는 제약을 배척하기보다 존중해야 합니다. 해석자가 텍스트의 규범에 순종하는 것은 자유에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자유를 진정하게 누리는 방법 중 하나는 기꺼이 텍스트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해의 본질은 바로 그렇게 텍스트 아래 서는 것(under-standing)입니다.

포스트모던은 이런 이해 개념을 매우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특히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참된 자유는 말씀을 따라 그 아래 서는 자유입니다. 해석의 자유에는 방법론적 제약 외에도 내용적이며 영적 제약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해석은 텍스트의 주제보다 앞서 가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다음 강의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습니다.현대 해석학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키에르케고르의 비유처럼 단지 말씀을 바라보고만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대신 거울 속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해석’하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우리 자신을 보거나 말씀에 우리 자신을 투사시키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현대 독자는 해석을 통해 성경의 권위를 박탈하려 궁리하곤 합니다. 이들은 메시지를 회복하거나 설명하는 대신 대면을 피하려는 해석을 합니다. 텍스트에 대답하는 일을 회피하기 위해 읽는 방법을 양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에 저항해 자신을 변호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의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접근과 달리 바른 해석은 텍스트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예술 작품의 이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예술 작품이든지 우리에게 첫째로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라는 점입니다. 예술품들은 우리에게 “보라. 들으라. 받아들이라”고 주문합니다. 텍스트는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앤서니 시슬톤의 말처럼 독자가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는 해석이란 텍스트가 독자를 읽는 의미와의 씨름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들에서 해석이란 독자의 능동적 작업에서 시작해 그에게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독자는 의미의 원천이 아니라 의미의 수용자입니다. 그는 의미는 독자를 “넘어선 곳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이런 해석학의 통찰은 텍스트가 독자의 자비에 무력하게 놓여 있는 죽은 글자들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오히려 텍스트는 독자를 인도하는 안내자요, 풍성한 삶을 가져오는 선물 꾸러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텍스트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현대 해석학자들은 텍스트가 정보와 지식뿐 아니라 세계와 독자 자신을 보는 새로운 양식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텍스트는 독자를 초대해 그것의 세계 속에서 그 가치관에 따라서 그 비전에 비추어 사는 길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해석학을 텍스트에 관한 것을 아는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에 의해 사람됨에 영향을 받는 것의 문제라고 봅니다.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철학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해석학을 “언어가 독자에게 변혁의 효과를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텍스트는 우리를 움직이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체적인-물리적이기보다는 의미론적-작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해석에의 초대

이처럼 현대 해석학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나아가 그 태도를 보다 깊이 있고 긍정적으로 바꾸어 줄 통찰도 담겨 있습니다. 물론 해체주의처럼 근대의 비판적 해석보다 훨씬 심각한 상당한 도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통찰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를 다시금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한 가이드라인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입니다. 이 문헌은 지금도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한결같이 알기 쉽거나 모든 사람에게 다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고 믿고 지키기에 필요한 것들은 성경의 이곳저곳에 분명히 제시되고 열려 있으므로, 학식이 있는 자뿐만 아니라 학식이 없는 자도 보통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

성경의 명료성과 해석의 필요성을 절묘하게 균형 잡아 제시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글을 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정도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읽기와 이해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해되기 위해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뿐 아니라 모든 글은 해석을 통해 이해됩니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은 의미로 충만합니다.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 흔히 창조를 ‘무에서부터의 창조’라고 규정합니다. 어거스틴 이래 이것은 창조 신앙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조는 하나님의 삼위 간 사랑이 피조물에게로 넘친 선물이라는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물은 능력과 신성뿐 아니라 사랑이 듬뿍 담긴 의미로 충만합니다.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존재가 의미’라고 했습니다. 존재의 의미 이해는 창조주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말씀으로 자신의 뜻을 보이셨기에 가능합니다.

문제는 죄로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는 그것을 볼 눈이 어두워졌다는 데 있습니다. 장 칼뱅은 그래서 성경이라는 안경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기독교강요 1.6.1). 성경은 그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는 렌즈입니다. 자연만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그것의 의미와 목적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성경도 해석되어야 합니다. 글로 쓰이고 책으로 묶여진 성경의 계시는 읽어야 하고, 또 해석을 통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초대이며 그에 합한 응답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성도의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와 해석은 하나님의 은혜로의 초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의미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읽기에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식적 훈련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문적인 해석학에 앞서 인문학적 훈련이나 이른바 독해력, 즉 리터러시(literacy)가 요구됩니다. 성경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것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해석학적 순환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는 읽기 이상이 요구되는데, 다른 무엇보다 믿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과 이성: 해석의 이중적 기초

고대 성경해석학을 가장 잘 정리한 어거스틴의 경우가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그의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유명한 경구는 성경 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의 또 다른 경구인 “신앙은 찾고 이성은 발견한다”(fides quaerit, intellectus invenit)는 이해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바로 규정합니다. 그의 이런 자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적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믿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 방법이나 훈련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분리되거나 그에 앞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 이해와 삶 전반에 관한 통찰이지만 특히 성경 해석에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지금과 같은 ‘해석의 문화’ 속에서는 또다시 텍스트에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나 숨어 있는 분이 아님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달리 요즘은 밴후저의 말처럼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해석을 통해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정사실처럼 굳어진 의미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해체하지만, 그로 인해 의미 자체가 상대적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생기고 맙니다. 사실 텍스트 자체도 해체되곤 합니다.

이런 사태는 단지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보다 근원적인 의심과 해체의 의도가 있습니다. 오늘의 포스트모던 철학은 이성의 기능과 능력에 대한 믿음과 책임의식을 의심하고 해체하려 합니다. 성경 해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역할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또 믿음과 권위, 이성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권위와 이성의 이중의 힘’에 관한 어거스틴의 통찰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쓴 《아카데미주의자를 반대함》(Contra Academicos)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권위와 이성의 이중의 힘에 의하여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차후로 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대개 나는 이보다 더 타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묘한 이성으로 추구해야 할 것에 관해서는 믿음으로만 진리를 깨달을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도 깨닫기를 갈급한다(III, xix, 43).

이런 어거스틴의 태도에서 고대 수사학의 여러 기법을 성경 해석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씨름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이런 방향을 설정한 훨씬 후에 펴낸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istiana)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고대의 인문학적 통찰을 성경 해석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 전반에 취해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애굽의 보화를 ‘탈취’(spoliation)해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2권, p.60). 그는 이런 면에 있어서 중세의 여러 주석가들보다 훨씬 강력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해석의 문화는 과거보다 더욱 험난한 도전을 던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해체는 근대적 비판보다 강한 위협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석의 문화를 이끌고 있는 사상들이나 인문학적 통찰에는 독소만 가득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은 위기지만, 기회가 될 수 있는 점도 분명 있습니다. 단, 우리 목회자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해를 추구하면서 신앙 안에 있는지(또는 거기서 출발하는지)를 살펴볼 것을 권하는 언약의 비유를 다시금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언약에 신실한 해석이 무엇이고,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샬롬!


 

신국원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Ph.D.). 저서로 《니고데모의 안경》,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