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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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6년  11월호AI가 상담을 더 잘한다면, 인간의 돌봄은 무엇이 다른가 AI와 교회, 본질을 묻다

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시어도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다소 낯선 설정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둘의 관계가 점점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사만다는 그의 말을 잘 듣고 기분을 알아채며, 적절한 순간에 위로하고 때로는 그 자신보다 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듯 보인다. 시어도어에게 사만다는 어느 순간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 주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한 존재가 된다. 그 관계는 점점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보다 나를 잘 이해하는 AI가 있다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는 먼 미래의 상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생성형 AI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관계 문제를 묻고, 불안한 마음을 설명한다. AI는 이야기를 정리해 주고 감정을 짚어 주며, 때로는 꽤 따뜻한 말로 위로한다. 낯선 상담자를 찾아가는 것보다 AI에게 먼저 속마음을 말하는 일이 더 편한 사람도 있고,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불편한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AI가 인간보다 더 오래 듣고, 더 많은 것을 기억하며, 더 빠르게 적절한 말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인간 상담자는 왜 필요한가? 목회자가 해 오던 위로나 상담의 상당 부분을 AI가 수행할 수 있다면,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이 질문은 단순히 AI의 성능을 평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돌봄이라고 불러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AI의 능력을 애써 낮춰 볼 필요는 없다. “기계가 하는 위로는 가짜이고 사람의 위로만 진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사람은 AI의 말로 위로받고,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감정을 새롭게 이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사람처럼 느끼는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답과 따뜻한 위로를 넘어서는 돌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AI가 상담을 더 잘할 수도 있는 시대에, 인간이 인간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AI도 잘 듣고 위로할 수 있다

AI가 상담과 돌봄의 일부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 AI는 질문을 정리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가능한 해결 방향을 제안한다. 때로는 사용자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말로 정리해 주면서, ‘누군가 내 말을 제대로 들어줬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반응하기도 한다.

상담을 위해 설계된 AI는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돕는다.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한 상담 챗봇은 우울이나 불안의 징후를 살피고, 반복되는 생각의 패턴을 점검하며, 자신의 생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생성형 AI는 미리 정해 놓은 답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용자가 방금 한 말의 맥락에 맞춰 새로운 응답을 만들어 낸다. AI가 상담 과정의 일부를 실제로 수행하는 현실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실제로 AI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AI가 인간처럼 마음 아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자는 AI의 말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이해받았다고 느끼며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어떤 AI는 단순한 문제 해결보다 사용자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관계를 이어 가는 데 초점을 두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기계와 대화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정서적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AI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데에는 인간 상담과 다른 편안함도 있을 것이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고민이 너무 사소하거나 부끄럽지는 않은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새벽 두 시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사람에게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AI에게 먼저 말해 본 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접근성과 익명성이 주는 장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인간 상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AI의 능력을 축소해서 말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아니다. ‘AI는 진짜로 느끼지 않으니 그것은 공감이 아니다’라고 단정하면, AI의 말로 위로받은 사람의 경험을 설명하기 어렵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로의 효과는 반드시 상대가 인간인지 아닌지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을 인정해야 다음 질문을 제대로 물을 수 있다. 잘 듣고 적절한 말을 건네는 것과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인가?

공감하는 말과 사람을 돌보는 것은 같은가

AI가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실제로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AI가 공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하는 것처럼 반응하는 일과 한 사람을 실제로 돌보는 일이 같은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상담자의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경청, 감정 반영, 적절한 질문 가운데 상당 부분을 AI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의 발전은 공감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인간 상담의 고유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새롭게 묻게 한다.

칼 로저스는 상담에서 공감을 핵심적인 조건으로 봤다. 그러나 그가 말한 공감은 단순히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맞추거나 적절한 위로의 표현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경험하는 세계를 가능한 한 그의 자리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이며, 그렇게 이해한 것을 관계 안에서 다시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감은 특정한 문장이나 상담 기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전체와 관계된다.

AI는 사용자의 언어를 분석하고 감정을 반영하며 상황에 맞는 위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실제로 안도하거나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효과를 단순히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다. AI의 위로가 사람에게 실제 도움을 줬다면 그 경험 자체는 존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AI가 만들어 내는 공감적 반응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방식이 반드시 동일하다고 할 이유도 없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야기는 상담이 끝난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고, 어떤 고통은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든다. 물론 상담자는 내담자의 감정에 휩쓸려 자신의 역할을 잃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전문적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경계를 지킨다는 것과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상대의 기쁨과 고통을 접하며 자기 안에도 흔적이 남는 존재이며, 그 흔적은 다시 관계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

이 차이는 누가 더 따뜻한 말을 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AI가 더 적절한 문장을 만들 수도 있고, 피곤하거나 불안한 인간보다 더 차분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들리느냐만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어떤 관계가 놓여 있는가이다. 인간의 공감에는 다른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포함된다. AI도 공감적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수록, 돌봄의 문제는 공감의 표현에서 ‘함께 있음’의 문제로 옮겨 간다.

돌봄은 고통 앞에 함께 있는 일이다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고통 앞에 함께 있는 일이다. 여기서 ‘함께 있다’는 말은 단순히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말 뒤에 놓인 삶의 맥락을 헤아리며, 쉽게 해결되지 않는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을 뜻한다. 무엇인가를 해 줘야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당장 해 줄 것이 없는 자리에서도 떠나지 않는 것이 돌봄일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있음에는 기다림과 지속성이 함께 들어 있다.

안톤 보이슨은 사람을 ‘살아 있는 인간문서’로 이해했다. 사람은 몇 개의 증상이나 문제 목록으로 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가 살아온 관계의 역사와 상처, 믿음과 기대, 두려움과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따라서 목회돌봄은 어떤 정보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의 삶 전체 속에서 듣고, 그 삶을 아직 쓰이고 있는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AI는 이 지점에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긴 이야기를 빠르게 요약하고 반복되는 표현이나 정서적 패턴을 찾아내며, 사람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을 정리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는 결국 입력된 언어를 바탕으로 구성된 자료다. AI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의 삶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에 관한 분석 결과나 요약보다 언제나 더 큰 존재이며, 삶은 데이터보다 더 넓다.

같은 “괜찮다”라는 말도 누가, 언제, 어떤 표정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침묵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말할 힘이 없기 때문일 수 있고, 웃음은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불안을 감추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몸과 관계와 기억 속에서 나온다. 돌봄은 사람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앞에 서는 일이다.

그래서 목회돌봄에서는 ‘빨리 해결하는 것’보다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상실과 애도, 관계의 붕괴, 오래된 상처처럼 어떤 고통은 좋은 조언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빠른 설명과 해결책이 고통받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문제를 곧바로 고쳐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고통을 혼자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한 사람을 한 번 만나고 끝내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듣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 상황을 또 마주하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사람의 삶을 기억한다. “그 일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라는 한마디에는 당신이 겪은 일이 내게도 중요했고,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그 사람을 문제보다 크게 보고, 설명보다 오래 듣고, 해결보다 오래 곁에 있는 것, 이것이 목회돌봄의 중요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는 자연스럽게 책임이 따라온다.

돌봄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말을 건넸다면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야 하고,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 판단이 틀릴 가능성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상담이나 목회돌봄의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관계와 선택, 신앙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돌봄이 따뜻한 태도인 동시에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은 특히 AI 상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AI는 빠르게 정보를 정리하고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며 때로는 인간이 놓친 위험 신호까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AI가 제시한 해석이나 판단을 그대로 최종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AI를 상담에 활용하더라도 그 결과를 검토하고 실제 사람의 상황과 맞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의 삶에는 정보만으로 다 포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AI는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가능한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답이 바로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지 아니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판단해야 한다. 상담과 돌봄에서는 정답의 가능성만큼이나 잘못된 판단이 한 사람에게 미칠 결과도 중요하다. 그래서 마지막 판단에는 사람의 책임이 남는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 차이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군가가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자신을 해치고 싶다고 표현할 때, 공감적인 문장을 계속 건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순간에는 위험의 정도를 판단하고, 필요한 경우 실제 사람과 기관이 개입하여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AI 상담에서도 자살, 자해, 타해와 같은 고위험 상황에서는 대화를 이어 가는 것보다 인간 전문가와 실제 안전망으로 연결하는 절차가 중요하다. 돌봄은 때로 말보다 행동을 요구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상담자나 목회자 역시 잘못 판단할 수 있고, 상대방이 겪는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도 없다. 오히려 책임은 내가 건넨 말 이후에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깝다. 나의 조언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듣고, 잘못 판단했다면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말을 수정하며 다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 돌봄의 고유성은 바로 이런 관계적 책임에서도 드러난다.

AI 시대, 목회돌봄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AI가 상담의 많은 부분을 더 잘하게 된다고 해서 목회돌봄의 자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목회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달라질 수 있다. 앞으로 목회자가 AI와 경쟁해 더 많은 지식을 제공하거나 더 빠른 답을 내놓으려 한다면 그 경쟁은 오래가기 어렵다. AI 시대에 목회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AI보다 더 잘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만큼은 다른 존재에게 넘기지 않고 직접 감당해야 하는가이다.

AI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일, 상담을 준비하기 위한 질문을 구성하는 일, 복잡한 내용을 요약하는 일에서 AI는 매우 유용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기술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돌봄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기술 활용은 목회자가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을 여유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문제는 편리함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일과 판단하는 일까지 함께 위임할 때 생긴다.

AI 시대에도 목회자가 지켜야 할 것은 사람을 문제보다 먼저 만나는 일이다. “이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묻기 전에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살아 내고 있는가”를 들어야 한다. AI가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분석하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분석 결과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는 그가 말하지 못한 사정과 관계의 역사, 신앙의 질문과 모순까지 함께 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 관한 데이터보다 더 큰 존재다.

또 하나 지켜야 할 것은 곁에 있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목회돌봄에는 효율적으로 줄이기 어려운 시간이 있다. 애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언제나 새로운 설명은 아니며, 오랫동안 관계의 상처를 견뎌 온 사람이 한 번의 조언으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고, 특별히 해 줄 말이 없어도 함께 있어야 한다. 목회의 많은 일 가운데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시간이 오히려 한 사람에게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경험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판단과 책임을 기술에 넘겨주지 않아야 한다. AI는 여러 선택지를 보여 주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신앙과 관계, 삶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라면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책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기술의 도움을 받아 판단하는 것과 판단 자체를 기술에 넘기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목회자는 AI의 답을 자신의 판단으로 다시 검토하고, 그 판단이 미칠 영향을 책임져야 한다.

목회돌봄에는 여기에 한 가지 차원이 더해진다. 목회자는 사람을 단지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거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고통과 질문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바라보고, 그 사람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다시 해석하며 살아가도록 곁에서 돕는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에 너무 빨리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신앙적인 정답을 제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함께 묻고 기다리는 것이 더 목회적일 수 있다. 침묵 속에서 함께 버티는 일도 돌봄이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목회돌봄의 경쟁자라기보다 목회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일 수 있다. AI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목회자는 자신이 왜 사람 곁에 있는지를 더 분명히 알아야 한다. AI 시대의 좋은 목회자는 AI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데이터보다 먼저 보고, 답을 서두르기보다 듣고, 쉽게 떠나지 않으며, 자신의 말과 판단에 책임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여전히 목회돌봄의 중심에 필요하다.

AI의 공감보다 필요한 사람
영화 〈그녀〉(Her)에서 시어도어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사만다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사만다는 그의 말을 기억하고 감정을 읽으며, 외로운 순간마다 적절히 반응한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서 중요한 것은 사만다가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가 아니라, 사만다가 떠난 뒤 시어도어가 비로소 오래전부터 곁에 있던 친구 에이미를 다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AI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동안 시어도어는 외로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AI가 사라진 자리에 새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있던 사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이해받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의 차이를 보여 준다.

어쩌면 이것이 AI 시대에 목회돌봄이 지켜야 할 자리일 것이다. 목회자는 언제나 가장 정확한 답을 주는 사람도, 상대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고통 속에서 혼자가 되지 않도록 곁에 머물고,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왔을 때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있다. AI의 공감이 더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돌봄은 오히려 ‘누가 내 곁에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김용민 한국침례신학대학교 목회상담학 교수. 한국침례신학대학교(Ph.D.). 저서로 《해석학적 목회상담: 폴 리쾨르 해석학과 목회상담의 만남》, 《기독교인을 위한 교류분석》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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