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가 요한복음 첫 표적으로 선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랑이라는 이미지는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은유 중 하나가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줄곧 그려온 메시아 상의 핵심에 닿아 있다. 예수님의 사역이 혼인 잔치로 열리고, 십자가가 신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해석되며, 마침내 요한계시록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그 전체 이야기를 닫는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반복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이라는 실로 꿰어져 있다. 1세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신랑으로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구원 역사의 절정이 거대한 메시아 연회, 즉 하나님과 그 백성이 영원한 혼인 언약으로 맺어지는 잔치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었다. 이 글은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가 가지는 윤리적 의미를 탐색하며,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우리의 관계 자체가 어떻게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1
유대적 배경: 유대인의 갈망과 그 성취
1. 포도주의 부재: 이스라엘의 오랜 탄식
혼인 잔치는 1세기 유대 문화에서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사였다. 며칠씩 이어지는 잔치 기간 동안 음식과 포도주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은 신랑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공동체 앞에서 씻기 어려운 수치였다. 그러나 요한이 이 배경을 첫 표적의 무대로 선택한 것은 단순히 그 사회적 맥락 때문은 아니다. 혼인 잔치와 포도주는 구약 전통에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었다. 요한은 이 친숙한 상징의 언어를 빌려,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구약에서 포도주의 부재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사야 24:7-11은 포도주가 사라진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세계의 초상이다. 기쁨이 사라진 세계, 포도주 없는 잔치다. 그러나 이사야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25:6-8에서 그는 그 어두움이 완전히 역전되는 날을 노래한다.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포도주가 넘치는 연회는 단순한 풍요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슬픔과 수치가 영원히 역전되는 메시아 시대의 표지였다. 24장의 탄식과 25장의 약속, 이 두 장면 사이에 이스라엘의 수백 년 된 갈망이 놓여 있다. 바로 이 맥락 안에서 포도주가 없다는 마리아의 말을 들어야 한다(2:3). 이 짧은 보고는 표면적으로는 잔치의 곤경을 알리는 말이지만, 그 아래에는 이사야의 탄식이 흐른다. 마리아가 이 말을 예수님께 전할 때, 그것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백 년 동안 품어온 갈망의 표현이다. 구원의 포도주가 다시 흐르는 날, 죽음과 슬픔이 역전되는 그 날을 향한 기다림이 이 한 문장 안에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갈망에 응답하신다.
2. 종말론적 구원과 회복을 상징하는 초자연적 풍성함
요한은 이 장면에서 놀랍도록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2:6). 이 항아리들은 유대인의 정결 의식을 위한 물을 담는 용도였다. 각각 두세 통, 합산하면 넉넉잡아 650리터에서 680리터에 이른다. 이 물 전체가 포도주가 된다. 신학적으로 이미 풍성한 장면이다. 율법의 정결 의식을 위한 물이 메시아 연회의 포도주로 바뀐다. 정결의 도구가 기쁨의 도구가 된다. 요구와 의무의 언어가 은혜와 풍성함의 언어로 전환된다. 더욱이 연회장은 이 포도주를 맛보고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2:10)라고 감탄한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소규모 시골 결혼식에서 이 정도의 양과 질의 포도주가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다. 그리고 요한은 바로 그 상식의 초과를 정교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 풍성함은 유대 묵시 문학의 메시아 기대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바룩 2서 29:1-2는 이렇게 묘사한다. “메시아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한 포도나무에 천 가지가 있고, 한 가지에 천 송이가 달리고, 한 송이에 천 알이 맺히고, 한 알에서 1리터의 포도주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과장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실제로 포도주가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모스의 예언도 같은 기대를 담는다.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 9:13). 요엘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욜 3:18). 이 본문들이 공통적으로 그리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포도주의 초자연적 풍성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포도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1세기 유대인 독자가 가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귀에 울렸을 것이 바로 이 예언들의 메아리였다. 650리터가 넘는 최상급 포도주가 갑자기 등장하는 이 장면 앞에서, 이사야와 아모스와 요엘의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직감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은 보통 기적이 아니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이다. 수백 년의 기다림이 지금 이 순간, 이 갈릴리 시골 마을의 혼인 잔치에서 마침내 시작되고 있다.
혼인 모티프의 신학
1. 포도주 제공은 신랑의 책임이다
가나 혼인 내러티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포도주를 제공한 행위가 가진 사회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세기 유대 혼인 문화에서 잔치의 모든 비용, 특히 포도주의 공급은 전적으로 신랑 가문의 책임이었다.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진행상의 차질이 아니라, 신랑의 명예와 그 가문 전체의 체면이 걸린 심각한 사회적 위기였다. 그러기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해결해야 할 사람은 신랑이었다. 상식적으로, 또 사회적 관례상으로 마리아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잔치의 실제 주인인 그 신랑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곧장 예수님께 갔다. 이것은 단순한 모자간의 친밀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비범한 행동이다. 이 순간 마리아는,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예수님을 이미 신랑의 자리에 세우고 있었다. 새로운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연회장은 포도주를 맛본 후에 예수님이 아닌 신랑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2:10). 연회장은 관례를 따라 신랑이 새 포도주를 준비했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물을 떠온 하인들과 독자들은 실제로 그 포도주를 공급한 이는 신랑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연회장의 오해는 우연이 아니라 요한의 정교한 신학적 장치다. 명목상의 신랑은 공로 없이 칭찬을 받고, 진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은 무대 뒤에 조용히 머무신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 독자의 시선을 더 강하게 이끈다. 책임을 다한 자, 풍성함을 채운 자, 진짜 신랑의 역할을 감당한 자는 예수님이시다. 어머니 마리아가 처음 예수님께 포도주의 부재를 알렸을 때 이미 시작된 예수님의 신랑으로서의 정체성은 연회장의 엉뚱한 칭찬을 통해 아이러니하게 확증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신랑이시다. 이 두 정체성이 가나의 혼인 잔치라는 평범한 무대 위에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동시에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2. 신랑이신 예수, 신부인 교회: 구원 역사의 혼인 내러티브
신랑 모티프는 구약에서 깊고 일관된 신학적 전통을 가진다. 구속사 전체를 하나의 혼인 이야기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체결은 혼인 계약이었고, 선지자들의 예언은 배신한 신부를 되찾으려는 신랑의 사랑 이야기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사 62:5b). 여기서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신학적 실재의 묘사다.
호세아는 이 관계를 더 비극적이고 더 강렬하게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간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림받은 남편의 사랑으로 표현한다(호 2:16-20).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에스겔 16장 역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정혼한 여인으로 묘사하며, 그 언약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의 언어로 서술한다.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혼인 관계이며,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랑이신 하나님이 돌아오심으로 이루어진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신랑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신랑 하나님이 마침내 오셨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고 답하셨을까. 요한복음에서 ‘내 때’()는 일관되게 수난과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가나의 포도주는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 포도주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표적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언약의 피를 향해 나아가는 예비적 계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이 연결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신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 22:20). 포도주는 신랑이 신부를 위해 흘리는 피의 상징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나의 포도주는 십자가의 예표다.
이 신학적 연결은 설교자에게 풍성한 내러티브 자원을 제공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혼인 잔치를 통해 자신이 신랑임을 드러내시고, 갈보리에서 그 신랑의 사랑은 가장 깊고 가장 무거운 방식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그 사랑은 마침내 영원한 연합으로 완성된다. 시작과 절정과 완성이 모두 같은 하나의 이야기(신랑이 신부를 사랑해 자신을 내어주고, 마침내 그 신부와 영원히 함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개 내러티브의 연결고리는 결코 우연히 흩어진 장면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선이 요한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서사적 뼈대를 이룬다.
설교자가 이 세 장면을 하나의 흐름,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 엮어낼 수 있다면, 그 설교는 단순한 본문 해설을 넘어선다. 청중은 가나의 포도주 한 잔 속에서 이미 복음 전체의 윤곽을, 그 시작부터 끝까지의 사랑의 궤적을 어렴풋이 보게 될 것이다. 작은 표적 하나가 거대한 구원 이야기의 입구가 되는 셈이다.
물과 포도주: 두 시대의 교체와 그 윤리적 의미
1. 돌항아리의 신학: 율법에서 은혜로
이제 가나의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살펴보자. 요한은 가나 표적에서 항아리에 대한 세부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공한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2:6). 이 항아리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정결 의식을 위한 물을 담는 용도였다. 그 수 여섯은 히브리 전통에서 완성의 수 일곱에 하나 못 미치는 불완전함을 암시한다. 율법의 정결 의식은 선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완성된 것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 항아리들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된다. 요한복음 1:17의 선언이 서사적으로 구현되는 장면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의 정결 의식을 위한 물이 메시아 연회의 포도주로 바뀐다. 정결의 도구가 기쁨의 도구가 된다. 요구의 언어가 선물의 언어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다. 물이 버려지지 않았고 포도주가 되었다. 율법이 가리키던 하나님의 성품〔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에메트(신실함)〕이 이제 예수님이라는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난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 5:38)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2장은 이 원리의 서사적 구현이다. 새로운 시대의 포도주는 새로운 존재론적 그릇을 요구한다. 율법의 정결 의식을 위한 돌항아리로는 메시아 연회의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개혁의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 전체의 전환이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위로부터 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3:3)과 같은 논리다. 새로운 시대의 삶은 새로운 출생,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세계관을 전제한다. 가나의 표적은 이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탄이다.
이러한 변화가 윤리에 미치는 영향은 근본적이다. 시내산 언약을 단지 ‘율법의 수여’로 읽으면, 이스라엘의 순종은 계약 이행의 문제가 된다.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위반이고, 위반에는 처벌이 따른다. 그러나 시내산을 혼인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십계명은 계약 조항이 아니라 신랑이 신부에게 건네는 사랑의 언약이다. 순종은 의무 이행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 전환이 가나의 표적에서 다시 확인된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베푸신 것은 어떤 요구나 자격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랑의 풍성한 사랑의 자발적 흘러넘침이다. 혼인 신학이 제공하는 윤리적 틀의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부어진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는 것은 신랑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서신의 윤리와도 정확히 공명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혼인 신학은 이 순서―사랑받음이 먼저, 사랑함이 그 다음―를 서사 전체를 통해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틀이다.
설교자에게 이것은 중요한 설교 방향을 제시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초청이다. 그러나 그 초청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의 언어가 아니라 ‘이런 풍성함 안에 들어오라’는 초대 언어여야 한다.
2. 새로운 시대의 제자도
가나의 표적이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윤리적 틀은 제자도를 신부의 단장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제자도는 목적지를 알고 살아가는 삶이다. 그 목적지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면, 현재의 삶도 그 목적지에 걸맞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9:7-8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2는 새 예루살렘을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묘사한다.
가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완성된다. 그 사이의 모든 역사는 신부가 단장되어가는 과정이다. 개인의 신앙적 성장, 교회 공동체의 성화,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같은 모든 것이 혼인 잔치를 향한 신부의 단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신부의 의로운 행실은 구원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의 결과로 입혀진 예복이라는 것이다. 신부가 스스로 예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허락하신 것이다. 신랑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그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을 단장한다. 그리고 그 단장이 바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의 본질이 흔들린다. 신부는 자신을 단장하여 신랑의 사랑을 얻어내려 애쓰는 자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신랑에게 속한 자로서, 그 사랑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단장되어가는 존재다. 이 단장의 과정, 이 천천히 빚어지는 변화가 곧 제자도다. 가나에서 흘러넘친 압도적인 포도주가 구원의 풍성함을 미리 보여주었듯이, 신부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한 행실은 그 풍성함이 마침내 신부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온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신부가 신랑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신랑과의 깊은 연합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의 저절로 피어나는 열매에 가깝다.
이 통찰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15:4). 가나에서 처음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이미지가, 한참 뒤인 15장에 이르러 마침내 연합의 윤리로 완성되는 것을 본다. 열매, 곧 윤리적 삶은 신랑과의 연합에서 흘러나온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저절로 맺히는 것처럼 신부의 삶도 다르지 않다. 신랑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 신학적 구조가 기독교 윤리의 근본 동기를 규정한다. 제자도는 의무의 이행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다. 신랑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은 신부는 신랑을 위해 자신을 단장하고 싶어 한다. 강요 없이, 규칙의 압박 없이. 사랑받음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이 제자도다.
설교자를 위한 조언
1. 유대적 배경을 충분히 활용하라
요한복음 2장의 신학적 풍요로움은 구약의 메시아 연회 전통을 얼마나 깊이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배경 없이 가나의 표적의 의미는 절반도 전달되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 설교자의 첫 번째 과제는 1세기 유대인 청중이 경험한 충격을 현대 청중에게 재현하는 것이다. 수백 년의 포로기와 압제 아래서 이사야 25장의 메시아 연회를 꿈꿔온 사람들에게, 엄청난 양의 최상급 포도주가 갑자기 등장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학수고대하던 그 약속의 때가 도래했다는 우주적 선언이었다. 오래 기다려온 신랑이 마침내 잔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설교자는 그 선언의 무게를, 그 기다림의 시간을 청중이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청중이 먼저 이스라엘의 갈망 속으로 들어가야, 그 갈망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건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2. 혼인의 서사로 복음 전체를 이야기하라
가나의 표적을 단독 사건으로 설교하기보다, 시내산에서 시작하여 갈보리를 거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서사 안에 위치시켜라. 이 큰 그림이 청중에게 먼저 주어질 때, 가나의 표적은 단순한 기적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서사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잡을 수 있다: 시내산의 혼인 언약 →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한 언약의 파기 → 새 혼인에 대한 예언적 약속 → 가나 혼인잔치에서 신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에서 신부를 위한 자기희생적 사랑 →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완성되는 영원한 사랑의 언약.
3. 신랑-신부 메타포를 윤리의 동기로 활용하라
혼인 신학이 설교자에게 제공하는 가장 실용적인 자원은 윤리의 동기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규칙 기반의 윤리는 두려움을 동기로 삼는다. 사랑 기반의 윤리는 응답을 동기로 삼는다. 신부는 신랑이 두렵기 때문에 단장하지 않는다. 신랑이 오시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단장한다. 이 두 동기는 겉으로 같은 행동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람을 닳게 만들고, 후자는 사람을 빚어간다. 다만 혼인 메타포를 사용할 때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혼인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청중이 있을 수 있다. 설교자는 이 메타포가 지상의 혼인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핵심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의 성격이다. 이 사랑은 신부의 자격을 보지 않는 사랑이며, 배신을 넘어서는 사랑이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독신자도, 이혼을 경험한 사람도, 결혼에 상처가 있는 사람도 모두가 동일하게 이 신랑의 사랑을 받는 신부 공동체의 일원이다.
나가며
요한은 가나 혼인 이야기를 통해 성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랑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시내산에서 시작된 혼인 언약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으로 깨어졌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마침내 아들을 참 신랑으로 보내셔서 신부를 죽기까지 사랑하게 하시고, 마지막 때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와 영원한 연합을 약속하신다. 이 거대한 사랑의 서사가 설교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윤리적 언어다. 규칙과 의무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과 응답의 언어이며, 도덕적 성취의 언어가 아니라 신부로 단장되어가는 언어이다. 신자의 삶은 사랑을 얻어내려는 분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압도적인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더 많은 의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신랑의 사랑받는 신부임을 일깨워 줘야 한다. 그 사랑을 충분히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단장하기 시작한다. 가나의 포도주가 그러했듯, 사랑은 언제나 흘러 넘친다. 이것이 혼인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윤리다.
주
1) 혼인 모티브로 대표적인 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Brant Pitre, Jesus the Bridegroom: The Greatest Love Story Ever Told (Image,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