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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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6년  10월호토요 공예배, 신학적으로 가능한가? 변화의 시대, 다시 묻는 예배

주일의 규범성을 지키면서 예배의 문을 넓히는 목회적 시도

교회는 오랫동안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며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해 왔다.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이 전통은 그 자체로 큰 무게를 지니며, 일요일은 여전히 교회의 규범적이고 으뜸가는 예배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 온 전통은 주의 날의 공예배를 반드시 일요일에만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일요일의 규범성과 우선성을 지키면서도, 목회적 필요에 따라 동일한 공예배를 토요일에도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초대교회의 회집, 그리고 제4계명에 대한 개혁주의 전통의 이해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논의는 기독교 역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가 《일요일의 역사》에서 정리한 역사적 사실과,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다룬 제4계명에 대한 해석에 기초한다. 이를 통해 일요일 주일의 전통과 우선성을 존중하면서도, 더 많은 성도가 말씀과 성례의 공적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기회를 토요일까지 확대하는 것이 어떤 신학적 근거 위에서 가능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안식일과 주일은 같지 않다

이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안식일과 주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은 창조의 일곱째 날에 뿌리를 둔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안식하셨으므로, 사람도 일에서 손을 떼고 창조주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주어진 ‘쉼’의 날이다. 그 시선은 완성된 첫 창조를 뒤돌아본다. 반면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둔다. 주님께서 ‘안식 후 첫날’ 다시 살아나셨고, 교회는 그 첫째 날에 모여 부활을 기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를 바라본다.

폴 K. 쥬이트는 《주일의 참 뜻》에서 이 점을 예리하게 다룬다. 그는 부활의 날을 가리킬 때 신약이 사용하는 ‘안식일의 첫째’(mia tn sabbatn)라는 어법에 주목한다. 이는 ‘안식일을 기점으로 헤아린 순서에서 첫 번째 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주일이 안식일을 단순히 다른 요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구별되는 부활 기념일임을 드러낸다. 일곱째 날이 첫 창조의 완성을 가리킨다면 첫째 날은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의 승리를 가리킨다. 안식일과 주일은 이렇게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다른 신학적 무게중심을 가진다.1

이 구별은 토요 공예배를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자는 것이 아니며, 일요일 주일의 의미와 지위를 약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과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자에 대한 존중을 후자에 대한 복종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토요 공예배에 관한 논의도 이러한구별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날과 초대교회의 회집

이러한 구별은 신약의 증언과 초기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첫째, 주의 날은 안식일을 대체한 날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별개의 날로 시작되었다. 곤잘레스는 적어도 4세기까지도 일부 혹은 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지키고 그 다음 날 주의 날을 따로 지켰다고 정리한다.2

둘째, 회집 시간은 유동적이었다. 사도행전 20:7을 보면 성도들의 모임은 ‘그 주간의 첫날’ 밤중에 이뤄졌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루를 해질녘부터 다음 날 해질녘까지 계산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모임은 사실상 토요일 저녁에 시작된 셈이다. 다른 신약의 기록과 초기 교회 문헌에서도 주의 날 회집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2는 ‘첫날’의 연보를 언급하고, 요한계시록 1:10에는 ‘주의 날’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디다케》 14장, 이그나티오스의 《마그네시아인들에게》 9장, 《바나바서》 15장,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제1변증서》 67장도 첫날의 회집을 증언한다.

이 자료들이 보여 주는 것은 단지 ‘어느 날에 모였는가’만이 아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며, 기도하고 교제했다. 주의 날을 규정하는 본질은 그 시간에 있지 않고 그 내용에 있다.

셋째, 주일의 시작 시점과 관련된 ‘날의 계산’이다. 창세기 1:5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과 레위기 23:32의 ‘저녁부터 저녁까지 너희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에서 보듯, 성경의 절기와 유대적 시간 계산에서는 하루를 해질녘부터 헤아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주일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청교도 전통 안에서 견해가 나뉘었다. 다수는 자정부터 자정까지를 하루로 보았지만,3 저녁부터 저녁까지, 곧 토요일 해질녘부터 주일이 시작된다고 본 견해도 있었다.4

그러나 어느 입장에 서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정부터 자정까지를 하루로 보는 다수의 견해에서도 토요일 저녁은 주일을 예비하는 시간으로 여겨졌고,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 저녁을 주의 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토요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주의 날’의 예배와 연결해 이해하는 것은 결코 낯선 발상이 아니다. 더욱이 첫 세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동안 토요일의 안식일 준수와 첫째 날의 부활 기념이 나란히 공존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회당과 성전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안식 후 첫날에는 따로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떡을 떼었다.

이러한 주의 날 회집의 흐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321년 칙령이었다. 곤잘레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모임을 안식 계명과 연결 짓지 않았고, 일요일 역시 쉬는 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요일이 공적 휴일로 지정되면서 시민법과 교회법이 뒤따랐고, 점차 일요일은 안식일의 쉼과 그 계명에 결부되기 시작했다.5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첫째 날의 모임은 일요일 낮으로 옮겨 갔고, 일요일은 교회의 주된 예배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곤잘레스가 책에서 내리는 결론은 우리의 익숙한 주일 이해에 도전적이다. 그는 21세기의 주일 신앙이 오히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모델로 돌아갈 때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일요일을 규범적 예배일로 존중하며 토요 예배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연구가 보여 주는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다. 주의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별도의 날로 출발했고, 회집의 시간과 형식은 신자들의 형편에 따라 유동적으로 정해졌다. 특정한 날을 안식일처럼 엄격히 고정하는 도식은 후대에 형성되었다. 토요 공예배의 가능성은 바로 이 사실들 위에서 시작된다.

칼뱅의 제4계명 해석과 개혁파 전통

종교개혁 전통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때 중요한 인물은 칼뱅이다. 그의 제4계명 해석은6 이 논의의 신학적 척추와 같다. 칼뱅은 제4계명의 의식법적 부분, 곧 특정한 날에 매이는 영원한 그림자로서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됐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골로새서 2:16-17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 ‘날에 대한 미신적 준수’를 피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칼뱅은 ‘일곱 중 하루’는 도덕법이고 ‘어느 날인가’는 의식법이라는 식의 절충적 구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과 다르게 하려고 날만 옮겨 놓고 그날에 여전히 같은 거룩함을 부여한다면, 결국 유대인이 지녔던 날의 구별을 그대로 지니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서 14:5을 들어 한 날을 다른 날과 차별하는 태도 역시 미신적이라고 경계했다.

그렇다면 칼뱅은 왜 일요일을 유지했는가. 그는 종교적 모임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신 것이지만, 일정한 날을 정하지 않으면 실제로 그 모임을 지키기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대인의 거룩한 날은 폐지됐지만, 교회 안에서 품위와 질서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날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곧 한 날의 선택은 신적 의식에 매인 것이 아니라 교회적 필요를 위한 것이었다.

칼뱅이 제4계명의 실천적 핵심으로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 가운데 신앙이 쇠하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거룩한 모임에 부지런히 나아가 예배를 돕는 외적 수단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칼뱅 개인의 견해에 머물지 않고 대륙 개혁파의 한 중요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특정한 날의 고정보다 교회의 질서와 정기적인 회집을 중시하는 이 강조점은 뒤에서 살펴볼 개혁주의 전통 안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물론 개혁주의 전통 전체가 이 문제를 동일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토요 공예배에 대한 가장 묵직한 반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7항에서 온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적극적·도덕적·항구적 계명으로’ 이레 중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셨으며,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마지막 날이었으나 부활 이후에는 첫째 날로 바뀌어 ‘주일’이라 불리고, 이 날이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속될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 입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입장은 한국 장로교의 주요 교단이 표준 문서로 채택한 신앙고백에 담겨 있으며, 첫째 날을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신적으로 지정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요 공예배의 신학적 가능성을 논하면서도 이러한 전통의 무게는 충분히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에는 이와 다른 강조점도 존재한다. 앞서 살펴본 칼뱅과 대륙 개혁파는 특정한 날의 고정을 신적 의식법이 아니라 교회 질서의 문제로 보았다. 대륙 개혁파의 대표적 신앙 표준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03문답 역시 제4계명의 요구를 복음의 사역이 유지되고, 신자가 교회에 부지런히 나아가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며, 공적으로 주님을 부르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평생 악한 일에서 떠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함으로써 이 생에서부터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는 데 무게를 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모두 개혁주의가 공인하는 표준이지만, 제4계명을 해석하는 강조점은 이처럼 동일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첫째 날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규정하며 날의 고정을 강하게 강조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날의 고정보다 예배의 내용과 부지런한 회집, 영적 안식에 더 무게를 둔다. 따라서 이 논쟁은 ‘정통 대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개혁주의 안에 실재하는 서로 다른 강조점의 차이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안식일 계명의 본질: 쉼의 도덕법과 예배 형식의 가변성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안식일 계명의 본질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제4계명의 핵심은 ‘쉼’에 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안식하셨으므로, 사람도 일에서 손을 떼고 창조주를 기억하며 쉬라는 것이다. 이 쉼의 명령은 한 민족이나 한 시대에 매이지 않고 창조 질서에 뿌리를 둔 영속적인 도덕 계명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안식일의 영속성과 변화’를 다룬 설교에서 일곱 중 하루를 거룩히 구별하는 ‘비율’은 변하지 않는 도덕법이지만, 그 하루가 어느 날에 어떻게 배치되는가 하는 ‘질서’는 시대를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7

바로 이 점이 이 논의의 핵심적인 신학적 전제다. 제4계명은 쉼이라는 도덕적 본질을 영구히 명령하지만, 공예배의 구체적인 요일과 시간, 형식까지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공예배의 시간과 방식은 변경할 수 없는 율법의 영역이라기보다, 교회가 신자들의 형편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분별해 온 질서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 온 이천 년의 흐름을 교회의 주된 길로 존중하고 그 우선성을 지켜 가면서도, 목회적 필요에 따라 토요 공예배의 가능성을 신중하게 열어 둘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안식일관을 따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과 교회사 흐름, 그리고 개혁주의 안에 존재해 온 다양한 강조점을 함께 고려한다면, 토요 공예배 역시 신학적으로 충분히 설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와 토요 공예배의 적용

이상의 성경적·역사적·신학적 논의를 오늘의 목회 상황에 적용하면, 토요 공예배의 의미는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째, 원리의 직접적 계승이다. 칼뱅이 제4계명에서 길어 올린 핵심 원리는 ‘신앙이 쇠하지 않도록 거룩한 모임에 부지런히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주 5일 근무제와 다변화된 현대의 생활 리듬 속에서 토요일의 공예배는 일요일에 모이기 어려운 성도들까지 공적 예배의 자리로 불러들인다. 이는 더 적은 성도를 모으는 축소가 아니라, 더 많은 성도를 말씀과 성례 앞에 세우는 확대다. 곧 계명의 목적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뜻에 더욱 충실한 길이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세계 교회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슬람권의 교회들이 그 사회의 공휴일에 맞추어 회집하듯, 회집의 시간은 신자들의 형편에 따라 조정돼 왔다. 같은 원리를 우리 사회에 적용한다면,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된 상황에서 공예배의 기회를 토요일까지 확대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일의 참뜻은 달력의 어느 한 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용의 동등성이다. 토요 공예배는 일요일 공예배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선포와 성례, 찬송과 기도, 성도의 교제로 이뤄진다. 주의 날을 규정하는 본질이 특정한 요일 자체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예배의 내용에 있다면, 동일한 내용을 갖춘 토요 공예배 역시 ‘주의 날’의 예배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토요 공예배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주장과 분명히 구별된다. 안식교는 제7일인 토요일을 성경이 명한 안식일로 이해하고 그날의 준수에 신학적 의미를 둔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토요 공예배는 토요일 자체를 신적으로 고정된 유일한 예배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된 예배일로 존중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동일한 공예배의 기회를 토요일까지 넓히려는 것이다.

셋째, 개혁주의 전통 안의 선례적 뒷받침이다. 토요일 저녁이 이미 주의 날에 속한다는 성경적 하루 계산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충분히 뒷받침된다. 주일의 시작 시점을 저녁부터로 본 청교도와 개혁파의 한 견해가 그러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성찬 절기(communion season)에서는 토요일을 온전한 ‘준비의 날’로 삼아 말씀 선포와 공적 예배를 드려 온 오랜 관행이 그러하다. 토요 공예배는 이러한 시간 이해와 개혁주의 예배 실천의 연장선 위에 있다.8

목회 현장의 필요와 신학적 가능성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적·역사적·신학적 논의를 목회 현장에 적용하면, 토요 공예배의 확대는 신학적 가능성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필요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필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배 공간의 청지기적 활용이다. 모든 성도가 같은 시간대에 모여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으면, 예배당을 불필요하게 크게 확장하지 않고도 이미 주어진 공간을 보다 넉넉하게 활용할 수 있다. 같은 공간을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성도를 말씀과 성례 앞에 세울 수 있다.

둘째, 일요일에 예배에 나오기 어려운 성도들을 위한 배려다. 주일 당직·교대 근무자와 의료·돌봄·공공 안전의 현장을 지키는 이들처럼 사회적 책임 때문에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운 성도가 적지 않다. 토요 공예배는 이들이 신앙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고 동일한 말씀과 성례 앞에 설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연다.

셋째, 감염에 취약한 지체들을 위한 배려다. 항암 치료 중인 환자처럼 면역이 약한 이들이나, 감염 위험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다. 회집 인원이 자연스럽게 분산되는 토요 공예배는 이런 지체들이 안전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가장 연약한 양 한 마리를 끝까지 품으려는 목자의 마음이 여기에 담긴다.

따라서 토요일에 드리는 공예배는 일요일 주일의 규범성과 우선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에서, 성경적·역사적·신학적으로 정당한 목회적 선택이 될 수 있다. 2천 년의 일요일 전통은 깊은 존중을 받아 마땅하며, 토요 공예배는 그 전통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또 하나의 문을 여는 일이다. 일요일을 교회의 주된 예배일로 지키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공예배의 기회를 토요일까지 넓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더 많은 성도를 말씀과 성례 앞으로 부르고, 가장 연약한 지체까지 예배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목양의 마음이 있다.  


註
1)    Paul K. Jewett, The Lord’s Day: A Theological Guide to the Christian Day of Worship (Eerdmans, 1971), 75.
2)    Justo L. Gonzalez, A Brief History of Sunday: From the New Testament to the New Creation (Eerdmans, 2017), 23.
3)    Thomas Vincent, The Shorter Catechism of the Westminster Assembly Explained and Proved from Scripture, Banner of Truth 재간, 139-140; Thomas Ridgley, A Body of Divinity, 제4계명 항목.
4)    Thomas Shepard, Theses Sabbaticae (1649), pt. 3, “The Beginning of the Sabbath.”
5)    Gonzalez, A Brief History of Sunday,41-45.
6)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8.28?34.
7)    Jonathan Edwards, “The Perpetuity and Change of the Sabbath,”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2 (Banner of Truth),93?103.
8)    Leigh Eric Schmidt, Holy Fairs: Scottish Communions and American Revivals in the Early Modern Perio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이후 Holy Fairs: Scotland and the Making of American Revivalism으로 재간.

이재훈 온누리교회 위임목사. 고든콘웰신학교(D.Min.). 저서로 《맞춤전도》, 《Great to Good》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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