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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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26년  10월호여성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 이슈 디베이트

한국 교회 안에서 여성 목사 안수는 오랫동안 뜨거운 쟁점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신학교마다 여성 신학생의 비율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이 질문은 더 이상 일부 교단만의 논쟁으로 머물지 않는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또 교단의 전통과 목회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입장은 첨예하게 갈린다. 편집부는 이 질문에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찬성과 반대의 가장 설득력 있는 두 목소리를 나란히 실어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찬성: 성경은 여성 지도자를 세웠다

2026년 한국 사회는 성별에 따른 역할 강요를 차별로 규정하고 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성경 역시 창세기 1:27-28의 하나님 형상 창조와 통치 명령을 통해 남녀의 존재적·기능적·사회적 평등을 선언한다. 비록 인간의 타락(창 3:16)으로 남녀 간에 갈등이 생겼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회복됐고(갈 3:28), 요엘 2:29의 예언대로 성령이 남녀 모두에게 임하여 말씀을 전할 권능을 주셨다(행 2:1-4). 이처럼 성경적·사회적으로 남녀 평등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보수 교회만 소수 구절을 근거로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한다. 이 글은 신구약의 여성 지도자들을 살펴보고, 이들과 함께 사역한 바울이 실제로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했는지를 반대 근거로 쓰이는 구절들을 통해 검토하려 한다.

성경 속 여성 지도자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여선지자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모세, 아론과 함께 출애굽 시대 세 명의 지도자(미 6:4)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은 미리암 선지자다. 그녀는 홍해 구원 사건 직후 백성을 독려해 용사이신 여호와를 향한 찬양을 인도한 영적 지도자였다(출 15:20-21). 그리고 훌다는 요시야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선지자로, 성전에서 발견한 토라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나님은 훌다에게도 직접 말씀하셨기에 그녀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왕하 22:15)는 표현을 사용했다. 훌다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을 가능하게 한 영적 지도자였다.

사사 중에서도 여성 지도자가 있었다. 드보라는 6명의 대사사 중 한 명이다(삿 4-5장). 사사이자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손에서 구원한 정치적·영적 지도자였다. 당시 사사는 정치적·군사적 지도자였는데 드보라는 이에 더해 영적 지도력까지 갖춘 뛰어난 사사였다. 그 결과 드보라가 사사로 있을 때 가나안 정복이 완성됐다. 또한 드보라는 가나안 전쟁 이후 용사이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전쟁에 참여한 자에게는 축복을, 불참한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는 영적 권위를 보여줬다. 

신약성경에는 여사도가 등장한다. 로마서 16:7은 여성 유니아를 사도라고 말한다. 개역개정은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로 번역했지만, 원문 ?π?σημοι ?ν το?? ?ποστ?λοι?(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를 번역하면 ‘사도들 중에 뛰어난’이다. 그러므로 7절을 직역하면 “나의 친척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중에서 뛰어난 사도들입니다”이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유니아를 뛰어난 사도로 소개한다. 중세 시대 후반에 유니아의 이름을 유니아스로 바꿔 남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초대 교회 교부인 크리소스토무스가 유니아를 여성 사도로 인정하는 등 초대 교회 때부터 유니아는 여성 사도로 인정받았다.

사도뿐만 아니라 여성 집사도 있었다. 뵈뵈는 개역개정에서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로 소개된다(롬 16:1). 그런데 여기서 ‘일꾼’으로 번역된 단어 δι?κονον(디아코논)은 δι?κονο?(디아코노스)의 여성 단수 목적격이다. 그리고 δι?κονο?(디아코노스)는 디모데전서 3:8에서 ‘집사’, 즉 현재 교회 직제에서 보면 안수집사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교회 직분인 안수집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사역자로 여집사 뵈뵈를 소개한다.

이런 여성 집사의 존재는 디모데전서 3:11에서도 확인된다. 디모데전서 3:8-13은 집사의 자격(8-10절), 여자들의 자격(11절), 집사의 자격(12-13절)으로 세분된다. 전통적으로 11절은 남자 집사의 아내의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집사의 자격에 갑자기 집사 아내의 자격을 말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11절에서 ‘여자들’로 번역된 γυνα?κα?(귀나이카스)는 ‘여자’(γυν?귀네)의 복수형으로 ‘-의 아내’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여자들’ 단독으로 쓰였다. 즉, ‘여자들도 이같이’는 여자 집사들도 남자 집사들처럼 정숙하고 모함하지 않고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충성’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4:1-2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구절에 쓰인 것과 같은 단어다. 이상을 종합하면 11절의 ‘여자들’은 여성 집사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로 불린 여성도 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며 그들의 집에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롬 16:3). ‘동역자’로 번역된 원어는 συνεργ??(수네르고스)인데, 바울은 우르바노와 디모데(롬 16장), 디도(고후 8:23), 빌레몬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자신의 동역자로 부른다. 이렇게 바울이 동역자로 언급한 인물들은 모두 교회의 지도자였고 여기에 여성 브리스가도 포함된다. 그리고 브리스가는 아굴라와 함께 아볼로를 가르치기도 했다(행 18:26).

결론적으로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은 여성을 지도자로 선택하시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셨다. 바울도 초대 교회 안에 있던 여사도, 여집사, 여동역자들과 함께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한 바울이 여성 지도자를 반대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반대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에 대한 해석

1. 고린도전서 11:3-16
“남자는 여자의 머리”(고전 11:3)라는 구절에서 ‘머리’(κεφαλ?케팔레)를 ‘권위’로 해석하여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대표적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케팔레’는 헬라어에서 ‘권위’로 해석된 용례가 없다. 이 단어는 가족·아버지·조상과 연결해 ‘근원’이나 ‘원천’의 의미로 사용됐는데, 예컨대 조상이 나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3절은 8절의 “여자가 남자에게 났으며”, 12절의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라는 구절과 연결되므로, 머리는 ‘권위’가 아니라 ‘원천’을 뜻한다. 즉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표현은 남녀 사이의 위계가 아니라, 여자의 원천이 남자라는 뜻으로 창세기 2:23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아담의 말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12절을 덧붙인 것은 혹시 남성이 여성의 원천이라는 말이 남성 우월로 여겨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3-16은 예배 중 대표 기도와 예언 시 남녀의 복장 문제를 다루는 문맥으로, 이미 남녀 모두 대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초대교회에서 예언은 설교와 같은 의미다. 기도와 예언 시 남성은 아무것도 쓰지 말고 여성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권면한다. 10절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동안 이 구절은 ‘남성의 권위 아래 있는 징표’로 해석됐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징표”로, 수건이 여성 자신의 권위 표시임을 보여준다. 바울 시대에 수건은 귀족 여성과 일반 여성만 쓸 수 있었고 노예나 성매매 여성 등 하층민은 쓸 수 없었는데, 바울은 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에게 권위를 표시하는 수건을 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을 쓴 목적은 여성이 남성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 시 남녀 모두 단정한 복장을 하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2. 고린도전서 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여성의 입을 막는 대표 구절로 읽혀 왔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미 여성도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었다고 전제하므로, 이 구절을 여성의 발언 금지로 해석하면 11장과 모순된다. 이 본문은 예배 질서를 다루는 14:26-40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바울은 예배 질서를 위해 통역자가 없으면 잠잠하라(28절), 다른 사람이 예언하면 먼저 한 사람은 잠잠하라(30절), 여자는 잠잠하라(34절)라며 세 번 ‘잠잠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방언과 예언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이런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39-40절이 여전히 남녀의 예언과 방언을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형제들아’는 모든 교인을 가리키는 관용구이지 남성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런 정황에서 34-35절은 예배 중 모르는 것을 큰 소리로 설교자나 옆 사람에게 물으며 소란을 피운 일부 여성을 향한 권면으로 봐야 한다. 바울은 이런 소란을 막기 위해 예배 시간에 묻지 말고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의 설교권 전체를 금지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다.

3. 디모데전서 2:11-15
이 구절은 바울이 교회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본문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본문도 위의 두 본문과 마찬가지로 예배 시 조용하고 바른 행실을 갖추라고 권면한 것으로, 8-15절이 한 단락을 이룬다. 8절은 남성들에 대한 권면이고, 9-15절은 여성들에 대한 권면으로, 특히 11-15절은 여성의 배움 자세에 대한 권면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2절이다. 개역개정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로 번역했다. 하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안 된다”이다. ‘주관하는 것’으로 번역된 α?θεντ?ω(아우쎈테오)가 ‘지배하다, 우위를 가지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지 가르침 자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신화와 이단 사상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이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딤전 1:3; 4:1-4; 6:3-5). 특히 초기 영지주의로 보이는 사상은 여성의 우월성과 선재성, 금욕주의를 강조했다. 12절은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여성들을 향한 권면이다. 13-14절은 창세기 2-3장을 근거로, 남성이 먼저 지음 받고 여성이 먼저 속았다는 사실을 들어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한다. 15절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구절 역시 금욕주의로 인해 결혼과 출산을 금지하던 사상에 맞서, 결혼과 출산을 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11-15절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사상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지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한 본문이 아니다. 창세기 2-3장 어디에도 여성이 나중에 지음 받은 것 혹은 먼저 유혹을 당한 것이 열등함을 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런 거짓 교사들에게 흔들리지 않도록 11절에서 여성들에게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고 권면한 것이다. 여성에게 교육을 금지하던 유대인들과 달리 바울은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여성 목사 안수 반대의 근거로 사용된 구절은 모두 예배 시 질서를 위한 권면이다. 각 교회의 상황에 맞춰 바울은 여성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언과 대표 기도를 하도록, 예배 시간에는 조용히 하도록, 그리고 남성을 지배하려는 이단 사상에서 벗어나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여성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과 동역한 바울이 여성 지도자를 금지했다는 오명은 이제 벗겨져야 한다.

나가는 말

여성 목사 안수 반대는 성경적 근거보다는 뿌리 깊은 남성 우월주의에 기반한다. ‘머리’를 헬라어 용례와 달리 ‘권위’로 해석하며, 예전에는 생물학적 열등성을 근거로, 지금은 ‘존재론적 평등, 기능적 차별’이라는 모순된 논리로 반대한다. 이런 태도는 교회·성경·하나님이 여성을 차별한다는 인상을 주며 젊은 여성들의 교회 이탈과 여성 사역자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한 여성들이 자신의 은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여성도 목사가 되는 길을 하루속히 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는 길이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을 논할 때 필자는 여성 사역이라는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야 하며, 그런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일단,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염두에 두는 사안, 즉 여성이 교회의 목사로 사역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반대: 성경은 질서를 세웠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출발점

먼저 각자 어떤 의견이 있든 이를 차치(且置)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해야 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본질을 흐리지 않는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1. 남자와 여자는 그 신분과 지위가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논의에서 이 부분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창조 이후 타락으로 인해 서로가 투쟁하며 결과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창 3:16),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보다는 죄악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후 논쟁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 이 점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논의를 진행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분과 지위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고, 단지 은사와 기능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가 아니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구약 교회의 직임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나 성공회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임을 근거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논점을 벗어난다. 곧 교회의 어떤 직분자가 그리스도를 대리하며, 그리스도가 남성이었으니 교회 사역자도 남성이어야 한다는 식의 논의는 선결문제 오류를 안고 있다. 

3. 신약의 선지자들이 있는 상황은 과도기적인 현상이었다
신약 시대에는 남자 선지자들과 함께 여선지자들이 있었다(행 21:9; 고전 11:5). 그러나 이는 과도기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직분이 신약 교회에 지속적으로 있게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신약 시대 초기에 여자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도 말씀을 가르치는 여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논하는 것은 계시사의 흐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논의다.

4.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가늠하는 시금석은 성경이다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해 빛을 비춰 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우리 문화나 현실적 요구에서 도출돼서는 안 된다. 오직 신약성경이 신약 교회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돼야 한다(sola scriptura!).

5. 현실적인 배려의 문제
그렇기에 오늘날 남성과 동일하게 교육받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사역할 때 경제적 처우나 존중의 측면에서 남성들과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모든 외적인 준비가 이뤄져야 한다. 이 사실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해야 하고, 더 나아가 실제로 이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본격적 쟁점: 디모데전서 2:11-14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근자에 목회 서신에서 디모데전서 2:11-12만큼 많이 다뤄진 본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역사적으로 읽을 때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을 제한하며, 그 근거를 창조의 순서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만일 바울이 다른 곳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권위 있는 공식적 가르침을 허용한다면 그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거나 우리가 본문인 11-14절을 오해한 것이 된다. 이 구절과 관련된 세 가지 논점을 하나씩 살펴보자.

1. ‘가르침’과 ‘주관함’의 의미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12절)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르친다’는 말을 다른 곳에 쓰인 용례와 비교해 보면, 이 표현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행위를 가리킨다(딤전 1:3; 3:2; 4:11, 13, 16; 5:17; 6:3; 딤후 2:2, 24; 4:2). 따라서 이는 다른 곳에서 “목사, 즉 교사”(엡 4:11)라 불린 이들의 사역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공식적·교리적 가르침을 동반하는 활동으로(딤전 5:17), 가르치는 목사에게 위임된 권세다(엡 4:11). 특히 바울이 편지 곳곳에서 장로들 가운데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자들(딤전 5:17)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가 여기서 염두에 둔 것은 분명 기독교의 공식적 가르침이다.

이 본문에서는 ‘가르치는’ 것이 문장 맨 앞에 나와 강조되며, 동시에 ‘배우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여인들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여인들의 지식 성장을 무시한 채 그저 물리적 침묵만 요구하던 유대적 관습과 달리, 제대로 배우기를 요구하는 기독교적 정신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조용히’(in quietness)라는 번역어도 물리적 침묵보다는 ‘질서 있는 가르침을 받아 변화될 만한 태도’(orderly, teachable behavior)를 뜻한다. 이 표현은 권위에 복종하거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그저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르치는 남자 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라는 의미다. 즉 바울은 여기서 여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주관하는 것’ 역시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목회서신에서 교회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일은 장로들의 몫이었다(딤전 3:5; 5:17). 이 용어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는, 여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자 위에 공식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목사(가르치는 직무)와 장로(다스리는 직무)의 역할을 맡는 것을 금하는 구절로 해석된다. 바울은 이를 “내가 허락하지 아니한다”고 현재 시제로 단호히 말한다.

2. 상황적 금령인가, 보편적 금령인가?
그렇다면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적용되는 것인가? 

어떤 해석자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에베소가 아데미 여신 숭배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며, 여성이 종교적 주도권을 쥔 영지주의적 형태의 유대적 기독교가 바울이 이 문제를 논의하는 역사적 맥락이라고 본다. 만일 그렇다면, 교회 모임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전 11:3-16)는 금령이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듯이, 또한 고린도전서 16:20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인사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듯이, 디모데전서의 이 금령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근거를 든다. 하나는 당시 여인들이 잘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여인의 가르침을 금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모데전서 5:11-15와 디모데후서 3:1-7에 나타나는 교육 문제와 연관 지어 이 여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구체적 문제를 논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규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베소의 여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쳤다는 증거는 없다. 더욱이, 이 본문에는 디모데전서 2:13-14이 이어져 있으므로 이 규정을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규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뒤에 여자가 창조됐다는 창조의 순서(13절)와, 여자가 먼저 타락하고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는 타락의 순서(14절)에 근거해,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한다. 여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타락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바울이 여인의 주도권에 대한 금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창조 질서를 뒤집으려는 것과 같다.

또한 타락의 순서를 말하는 14절에는 처음 타락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것을 염려하는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바울의 이 금령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계속 적용된다고 봐야 한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다.

3. 바울의 글인지 여부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볼 것인지 논의해 보자. 성경에 대해 비평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디모데전서를 비롯한 목회 서신을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바울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고 본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짜 바울은 남녀의 모든 면에서 평등을 주장했으나, 이 위-바울(the “pseudo-Paul”)은 진짜 바울의 견해와 달리 여성의 사역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본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1:1; 1:13; 2:7) 구체적인 정황(1:3) 속에 있는 디모데에게(1:2, 18; 6:20) 목회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혹시 그렇다 해도, 적어도 그 인간 저자가 이 글을 쓸 때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따라 이는 오늘 우리를 규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 저자가 누구든,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교회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12절)을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점이 있다. 그렇게 논의하는 이들은, 만일 이것이 바울이 친히 쓴 것이라면 이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가? 혹시 이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들을 “이 말씀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다”라는 해석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나가는 말

성경의 입장에 충실한 정통파 교회는 이 구절에 근거해 목사와 장로를 선출할 때 그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한다. 그 유일한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그렇게 명하셨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여기에는 여성을 무시하거나 낮춰 보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목사를 남성 가운데서만 선출하는 정통 교회는 모든 면에서 성경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여성을 참으로 존중한다는 사실도 여러 면에서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오해를 사기 쉽다. 또한 신학을 충실히 공부한 여성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해 목사가 되지 않을 때, 교회는 그들의 순종의 정신을 귀히 여기고 높이 사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 동기인 남성 전도사가 목사가 되고 담임목사가 됐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사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박유미, 이승구 박유미┃비블로스성경인문학 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Ph.D.). 저서로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 《오늘 다시 만나는 구약 여성》 등이 있다.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영국 세인트앤드류스대학교(Ph.D.). 저서로 《한국 교회가 나아갈 길》, 《광장의 신학》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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