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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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6년  10월호이사야 56-66장 메시지에 대한 재고찰: 2022년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젊은 신학자의 발견(1)

오늘날 사역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목회자가 영적 이상과 목회적 현실 사이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라는 성경적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복음을 증거하며 제자를 삼는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를 꿈꾸며 헌신하지만, 교회는 본질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을 초대하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다양한 인간 군상의 상처와 아픔, 연약함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목회자의 내면적 긴장은 이러한 딜레마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목회자는 목회의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의 존경과 기대를 받지만, 역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는 단지 목회자 개인의 내적 한계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그를 둘러싼 환경적 요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사회 각 측면에서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환경 속에서, 목회자는 깊은 딜레마를 경험하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나다. 요나는 예언의 선포보다 예언자의 내면에 초점을 둔다. 원치 않는 부르심으로부터 회피하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며, 선포된 예언의 미성취에 반발하며 항의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노출한다. 그 뿌리를 탐색하다 보면, 이는 단지 요나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양극적 상황과 환경과 관련됨을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가 겪는 딜레마만큼이나, 고대 예언자들이 겪었던 딜레마도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필자의 이사야서 56-66장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며, 이를 위해 성서를 다면적으로 탐구하며 본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본고에선 학술용어의 사용과 이론 설명은 최대한 자제하고, 목회적 시선과 상황에 맞추어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인류의 시간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성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담은 기록된 계시이자,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거룩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와 문화, 역사와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겨, 수천 년 세월 동안 부르심을 받은 다양한 사람의 말과 글을 통하여 이야기되고, 기억되고, 되풀이되고, 인용되고, 결합되고, 누적되고, 기록되고, 전수되고, 정교하게 결합되어 지금의 성서로 완성되었다. 

정경으로 찾아온 성서는 오늘도 여전히 늘 새로워진다. 말씀을 읽고, 구조를 파악하고, 의미를 드러내고, 적용하고, 강단에서 선포하며,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성서의 형성과정을 현대의 기계적인 출판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중대한 시대착오다. 오늘날 책을 출판할 때는 기획부터 유통까지 일련의 단계를 수개월 혹은 수년 안에 마무리하지만, 성서는 그런 단기간 기획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시간 속에서 인류 가운데 누적되어 온 하나님 구원사의 신앙적 기억들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한데 모아 담은 생명의 말씀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와 같이,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역설적이며 주관적이다.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체험하며, 미래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이 모든 흐름을 초월한다. 옛 믿음의 선현들은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자신들이 시간의 주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계절의 변화 속에서, 언제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릴지 분별하며, 오직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때에 맞춰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는 분이 오직 시간의 주관자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간과 역사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와 신비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말씀이 이토록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역사라는 그릇에 담겼다는 사실은, 성서가 지닌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성육신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죄인인 우리가 감히 저 높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주하여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구약의 고백처럼 죽음의 위험을 수반하는 두려운 일이다.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천하를 창조하시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질서를 세우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친히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그 코에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성서는 저 멀리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바로 우리 곁에 숨결로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동시에 증언한다. 우리의 짧은 논리적 식견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성서는 이 거룩한 긴장과 양가성을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담아낸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밀착해 들어오는 성서의 다양한 신학적 뉘앙스와 긴장은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함이 인간의 유한함 속으로 들어오실 때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영광스러운 영적 신비다.

인간의 지성은 짧고, 경험은 협소하다.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고 도시를 세운 역사는 하나님의 장구한 창조의 시간에 비하면 극히 한 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좁은 인간의 언어와 경험, 기억과 전승을 기꺼이 도구 삼으셔서 시대마다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한 한 인간의 언어와 경험은 다시 흙과 먼지로 돌아가도, 성령님의 깊은 인도하심 가운데 그 후손들의 기억과 전승 속에 살아남아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살아남았다.

완벽주의를 넘어, 흔들리는 이성과 언어를 품기

오늘의 인간은 자신의 관점과 경험이 전부인 줄 착각한다. 데카르트 이래로 인간의 이성이 삶의 주체가 되었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언어와 표현에 있어 논리적으로 정합되어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지나간 과거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연히 고대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런 보편적이고 순수한 이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전제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텍스트에 나타난 논리적 오류와 모순들을 서로 다른 출처에서 온 것으로 판단해 과도하게 분리하거나, 정합된 주제 의식만을 강조하기 위해 난해구절이란 개념들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인간 이해에서 출발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계시를 수용하고 기억하고 전승하는 인간의 순수 이성의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신뢰를 전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속 인간의 이성은 순수하거나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이기보단 주관적이다. 인간의 이성은 본래적이면서도 동시에 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정신적이면서도 신체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와 언어, 은유와 범주는 나와 주변 환경을 반영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어떤 경우엔 정합적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최근의 인지언어학은 인간의 언어가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며, 그로 인하여 서로 상응하는 개념이 함께 등장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의 재발견은 창세기 3장에 드러난 질서와 약속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첫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을 얻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과 같다. 웨슬리도 이러한 현실의 인간이 갖는 한계를 인간의 연약성이라 불렀다. 비록 신자가 거룩하고 완전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더라도,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완전은 인간 스스로의 순진무구, 무오무결함이 아닌, 인간 실수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와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성서 연구는 계시와 역사, 완전과 과정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말씀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유한한 인간을 향하신 구속사적 사역의 틀 안에서 수행되는 작업이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학문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것과 인간학적인 것 사이의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렇기에 더욱 그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만약 그 긴장으로부터 한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흑백 논리에 빠진다면, 이는 정직한 학문하기라 말할 수 없다.

거룩한 긴장 속에서 이사야서 마주하기

이사야서를 보는 관점도 이러한 긴장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사야서는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사야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삶, 죽음, 부활에 대한 메시야적 예언들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야적 예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야서의 배경이 되는 BC 8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왕국의 흥망성쇠와 재건운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서의 언어와 은유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서를 크게 둘 또는 세 부분들의 모음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학문적 작업은 단순히 단절과 분리를 위함이 아니라, 한 권으로서의 이사야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완결된 성서를 두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시도 자체가 자칫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고 계시로서의 말씀이 갖는 권위를 해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성서적 설교와 목회의 진정한 출발점은 우리 삶과 맞닿아 함께 숨 쉬어 온 역사적이자 문학적인 텍스트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이를 청중의 귀에 생생하게 들리도록 선포하는 데 있다. 밴후저가 성서를 ‘의사소통 행위’로 규정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청중 간의 상호성을 강조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성서의 역사성과 문학성에 깊이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를 여러 부분으로 구분하여 읽는 접근법은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나아가 이는 후대의 익명 예언자들이 정경의 표제 아래 묶인 예언 전통을 시대적 변화 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해 나갔는지를 시사한다.

학계에서 이사야서의 셋째 부분으로 간주하는 56-66장은 바로 그러한 익명의 단일 예언자 혹은 예언자 그룹을 암시한다. 이사야서 56-66장은 이사야서가 최종 형태의 정경으로 나아가는 직전 단계(penultimate)에 위치한다. 따라서 학자들의 접근법에 따라,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또 어떤 이들은 본문 내의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효과에 집중해 왔다. 비록 이 단락의 화자가 누구이며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에 대한 통일된 합의는 없지만, 본문 안에서 이질적인 청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한 예언자의 목소리에 주목하여 이를 화자의 사회문화적 현실과 결부해 읽어내려는 시도는 그동안 많지 않았다. 본문 안에 등장하는 가치 대립적인 표현과 주제들을 단순히 서로 다른 목소리로 파편화하거나 핵심 주제와 무관한 난해한 구절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종종 손쉬운 해결책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 한 사람의 이성과 사고, 언어가 환경의 영향과 한계들로 인하여 정합적이지 않다면, 이사야서 56-66장에 나타나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들은 한 목소리의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제의 갈등은 한 목소리가 갖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즉 내적 갈등을 암시할 수 있다. 

BC 6세기 후반, 바빌론 포로들이 조상들의 땅으로 귀환하던 시기는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던 시기였다. 귀환민들은 유다 땅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지도층이 됐지만, 그들이 돌아온 땅에는 이미 거주민들이 있었다. 귀환한 땅은 인프라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초라했으며, 인프라 재건을 위한 인력과 비용도 충분치 않았다. 비록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지 않지만, 56-66장의 최종형태는 이런 상황 속 귀환민 중심의 주류집단과 그렇지 않은 토착민 집단 간의 갈등을 암시한다. 예언자 이사야의 언어와 은유를 계승하는 56-66장의 화자는 당시 유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귀환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사회의 주변부에 놓여 있던 자들의 삶과 목소리들에 관심을 두던 자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근거는 56-66장에 드러나는 서로 다른 가치들의 공존, 다시 말해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긴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 논지다.

귀환민과 토착민, 엇갈린 시선 속에 놓인 목양

BC 587년 바빌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 사건은 유다인들의 예루살렘의 불가침성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멸망 전후로 유다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바빌론의 포로로, 어떤 이들은 이집트에 피난민으로, 어떤 이들은 유다 땅에 남아서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바빌론 포로들, 과거에는 예루살렘의 고관이었던 집단에 의해 주도됐다. 70여 년의 바빌론 포로 경험은 성전과 제사 중심의 예배를 넘어, 회당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발전하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이제 예루살렘은 단지 다시 재건해야 할 물리적 도성만이 아닌, 영적이고 종말론적 도성으로서 새롭게 이해됐다. 

하지만 귀환 이후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재건에 대한 두 가지의 방법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자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세우자는 관점이다. 이사야서 56-66장은 이러한 서로 다른 관점 간의 긴장과 갈등 상황을 반영한다. 본문 속 화자는 이사야의 전통을 이어받은 익명의 예언자로, 오늘로 말하자면 당대 사회 속에서 활동한 목회자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운문 장르의 특성상 당시의 사회적 환경과 갈등을 역사의 언어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로 후기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 같은 역사서, 그리고 학개서와 스가랴서, 말라기서와 같은 동시대의 예언서들과 함께 읽으며 그 사회상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귀환 당시의 유다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단일 공동체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에 대한 설명은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가장 잘 알려진 전통적인 이해로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구도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는 본문을 BC 8세기 말 사마리아 멸망과 인구의 혼합, 5세기 중반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의 주요 방해자, 그리고 예수님 시대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연결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사야서 56-66장은 사마리아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둘째, 또 다른 방식은 제의적 관점으로, 제의의 주도권에 대한 갈등으로 보는 것이다. 특정 제사장 그룹 간의 권력 투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사야서 56-66장은 그러한 제의적 갈등보다 그 너머에 관심을 둔다. 셋째,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로기 이후 유다의 다층적 사회상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귀환 이후 정치, 종교 여러 측면에서 사회 지도층의 역할을 맡아 재건 운동을 주도한 자들은 바빌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로, 이들은 왕국 시대 고관들의 후손들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 땅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남아있던 유다인들 뿐 아니라, 주변 인근 지역 출신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했다. 이 토착민들은 사회적 주도권을 갖지 못한 다수의 비주류였다. 

이사야서 56-66장은 어떠한 집단에 대한 인종적·제의적 구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 경외와 경건이라는 기준으로 그를 찾지 않는 자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 분을 찾는 자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56-66장의 시작과 끝에 나타나는 여호와와 연합하며 그 분을 찾고 섬기는 이방인들과 고자들(사 56:3, 4-6), 아브라함은 모르고 이스라엘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사 63:16), 여호와로 두려워 떠는 자들(사 66:2, 5)은 귀환민의 관점에서 바깥으로 밀려난 토착 평민들의 사정과 연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56-66장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화자의 청중은 이런 낮은 자들로서, 화자는 그들의 경건함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사야서 56-66장의 중심부는 이와 상반되는 내용을 강조한다. 61:1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직접 봉독하며 본인의 메시아적 사명을 천명한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눅 4:18-19). 그러나 예언이 궁극적인 성취에 이르기까지, 텍스트 내부에 형성된 의미의 여러 층위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56-66장 안에 담긴 화자의 고유한 관점에서 본문을 깊이 있게 살펴야 한다. 55-66장의 중심부는 당대의 현실과 상반되는 파격적인 비전을 역설한다. 귀환한 유다인들이 무너진 성읍을 재건하여 ‘주님의 제사장’이라 불리고(사 61:4, 6), 이방인들이 도리어 그들을 섬기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사 61:5). 이렇듯 화자는 귀환 공동체를 향해 시온 신학의 원대한 이상에 기초한 회복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적 비전이 당대의 청중에게 온전히 수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학개와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로 대변되는 당대의 주류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과거 전통으로의 철저한 복고만을 거듭 강조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텍스트에 나타난 화자의 목소리와 그가 처했던 사회문화적 현실을 맞닿아 읽어내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 56-66장의 화자는 서로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한다. 중심부인 60-62장은 당시 사회의 지도층인 귀환민들을 대상으로 예루살렘 옛 영광의 회복을 통해 모든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하며 그들의 유다적 정체성을 북돋는다. 예루살렘은 온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며, 모든 귀환민은 제사장이 되며 열방이 그들에게 조공하고 섬길 것이다. 하지만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56장과 65-66장은 사회의 주변부에 놓인 토착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자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경건한 자들에게 초점을 둔다. 화자는 이들을 향해 이들도 성전에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며(사 56:7), 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담아 선포한다(사 66:21). 

정리하면, 귀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는 공동체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면, 토착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는 그들의 신앙적 경건성을 칭찬하고, 이들의 자격이 확대되는 주제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서로 다른 화자의 별개의 목소리로 구별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화자가 처한 복잡한 사회적 구성과 그로 인한 내면의 긴장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예언자는 귀환민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신앙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목회자로서의 정체성(61-62장)과 소외된 이들을 품는 목회자로서의 정체성(56, 66장) 사이에서 거룩한 인지 부조화를 겪었다. 당시 귀환민들은 순수성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과 토착민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고, 토착민들은 소외감과 억울함을 호소했다. 예언자는 민족의 재건을 이끄는 리더십(귀환민)을 축복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의해 배척당하는 소외된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끌어안아야 했다. 이처럼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두 신학적 요구를 한 공동체 안에서 동시에 품어내야 했기에, 예언자는 찢어지는 듯한 내적 갈등과 거룩한 인지 부조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예언자의 목회적 고민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 꽃피는 선교적 비전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 현장은 다층적이며, 때로 이질적이다. 동일한 복음의 메시지도 청중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달되고 수용된다. 앞서 설명한 이사야서 56-66장의 화자도 그러한 목회적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때로 메시지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미숙한 초보처럼 보이고, 때로 상황에 타협하는 삯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익명의 한 예언자의 변화하는 현장 속에서의 선교적 고민과 목회적 분투를 반영한다. 이런 깨어짐과 갈등의 과정을 통해, 완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은혜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런 맥락 속에서 최종 장을 다시 읽을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 이는 56-66장의 종결일 뿐 아니라, 이사야서 전체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65:17 이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66:1 이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보여줌으로, 특정한 집단과 공간이라는 좁은 이해에 그쳤던 기존의 식견이 앞으로 더 넓게 확장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 동안 하나님은 특정한 한 사람, 한 백성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지만, 이제는 그 구원의 역사가 이러한 틀을 넘어설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를 찾고 돌보시겠다는 66:2의 선언은, 더는 혈통적 정통성이 아닌 신앙적 경건성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예언자적 일성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겉으로는 종교적 전통과 의식을 내세우며 위선적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반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비록 중심부의 청중과 내용 시작과 끝의 청중과 내용이 다르더라도, 그 핵심에는 그들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경건한 예배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선교적 비전이 담겨 있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은,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온 열방으로 파송된 경건한 자들이 복음을 전하여 온 열방의 예배자들을 마치 예물을 봉헌하듯 성전으로 이끌고 오며, 하나님이 이들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신다는 파격적인 선포에서 절정에 달한다(사 66:18-21). 제사장과 레위인은 철저히 특정한 지파와 가문에 근거해 세습되던 직분이었다. 하지만 56-66장의 화자는 이미 61:6에서 제사장 직분의 대상을 특정 지파와 가문을 넘어, 귀환한 유다인 전체로 확장함으로서 기존의 이해를 극복한다. 여전히 혈통과 민족의 틀 안에 머물러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66:2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제사장직의 대상을 민족적 틀을 넘어선 모든 경건한 예배자로 확대하며, 이는 예배의 자리가 온 열방으로 활짝 열렸음을 선포하는 22-23절의 우주적 비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 뒤를 잇는 마지막 24절은 여전히 거칠고 곤혹스러운 단어로 불경건한 자들의 처참한 심판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의 막을 내린다. 이로써 이사야서의 위대한 서사적 피날레는 전통적인 심판과 회복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경을 넘어, 온 인류와 온 피조 세계를 향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완전한 실존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56-66장 안에 나타난 상충하는 가치들의 공존은, 편집의 오류나 미숙함이 아니다. 그것은 격변의 과도기 속에서 주류 공동체의 배타적 이상(61-62장)과 소외된 이들을 향한 목회적 환대(56장, 66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고뇌했던 한 예언자의 심장 속에 새겨진 불완전한 프레임의 민낯이자 정직한 흔적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연약함과 내적 갈등을 억지로 지워버리지 않으시고, 그 흔들리는 질그릇을 있는 그대로 사용해서 계시의 도구로 삼으셨다. 예언자의 프레임은 불완전하여 날마다 요동쳤지만, 그 깨어진 틈새를 뚫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언약적 열정은 완전하고 신실하셨다.

오늘날 목양의 현장도 포로기 이후의 유다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교회에나 오랫동안 교회를 지키며 전통과 신앙적 규범, 공동체의 순수성을 엄격하게 수호하려는 헌신된 주류 성도들(귀환민)이 존재한다. 동시에, 복잡한 삶의 상처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안고 찾아와 은혜를 구하지만, 기존의 엄격한 잣대와 보이지 않는 문턱 때문에 공동체 깊숙이 환영받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도는 소외된 이들(토착민)도 존재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든든한 기둥인 주류 성도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격려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배타성에 상처받는 경계선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넓은 환대의 언약을 선포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다. 이처럼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영적 가치와 요구를 동시에 품어내야 할 때, 목회자는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깊은 영적 인지 부조화를 겪게 되고 때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번아웃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흔들림은 결코 사역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 땅에 살아내기 위해,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삶의 자리에서 몸부림치는 부름 받은 사명자의 정직한 실존적 증거다. 비록 우리의 질그릇은 흔들릴지라도,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완전하시다. 자격 없는 우리를 제사장 삼으사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실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자.  
 

조내연 명지전문대학 초빙교수.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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