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운동은 세계 선교를 제시하고 이끌어 가는 큰 조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공식적인 이름이 필요한데, 처음 모인 도시 이름을 아직까지 쓰고 있음은 이 대회의 느슨하고 허술한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그 느슨함이 로잔의 장점이다. 로잔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운동’이라는 점이다. 세계적인 교단이 모여 연합체를 구성하는 제도가 아닌,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점이 한국 교회에 주는 도전은 크다.

한국 교회는 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해 왔다. 가장 치명적인 실패는 제도의 실패다. 많은 교단의 노회와 총회는 요약된 회의록을 ‘촬요’라고 부른다. 이는 조선 시대 용어인데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헌의’나 ‘증경’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용어도 사라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언어가 낡았다는 말은 제도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각 교회의 당회나 운영위원회는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직돼 있다. 교단도 마찬가지다. 매해 9월에 주요 교단이 총회로 모일 때면, ‘어떤 비전이 제시될까?’ 하는 기대보다 ‘또 어떤 결정으로 웃음거리가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신학교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신학은 제도 교회의 사역을 지원하고 그 지도에 순종하며 동시에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때로는 교회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도 교회와 신학교 사이엔 건강한 긴장 관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이 긴장이 무너져 있다. 그 결과 신학교는 무기력하거나 정치화 됐다. 

해결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노력이 바람직한 제도를 만드는 데만 투자됐다는 점이다. 교단 총회 등 거대 조직의 폐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지금도 눈물겹게 진행되고 있다. 개교회의 개혁에 관심 있는 이들이 ‘표준정관’ 도입 등을 연구해 오기도 했다. 좋은 제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버넌스를 흔히 ‘지배구조’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경직된 인상을 준다. 거버넌스는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공감(con-sensus)을 이뤄 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운동’이라는 말로 지향하고자 하는 교회의 건강한 문화는 ‘복음의 코이노니아’에 있다. 코이노니아를 중심에 놓고 최소한의 그리고 유연한 제도가 그 아래 복속하는 것이 성경적 교회 원리다. 이 원리는 성경의 진리를 시대 변화에 적용할 수 있는 창조성,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태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가능하게 한다. 사도행전 공동체는 자발성과 유연성이 담보될 때 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  

2024년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에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참가자 약 5천 명이 모인다. 전체 인원 중 25%는 40세 미만 젊은 지도자, 40%는 여성, 40%는 일반 직장인으로 구성하는 걸 목표로 시작했다. 준비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와 평신도 모임을 진행했고,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이 비전이 한국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로잔대회는 남성 일색인 교단의 대표 기관과 젊은이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교회의 운영 방식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로잔대회는 선교에 관해 ‘대화’하고자 전 세계에서 모인 코이노니아다. 대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한국 교회에는 충분한 소통과 대화가 있는가? 개교회는 어떠한가? 교회가 현실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번 로잔대회에서 나온 문서들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자발성, 지속 가능한 운동의 조건 

제도는 조직과 자금이 이끌어 가지만, 운동은 꿈과 열정이 이끌어 간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연합 운동은 대형 교회의 영향력과 재정 지원, 인원 동원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헌신에 감사하면서도 이 구조가 역동적인 자발성을 가로막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자발성이 없기에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로잔대회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중심에 선 교회들이 겸손하게 섬기자고 다짐했다. 물론 미흡한 점이 있겠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큰 교회와 유명 목회자들이 세를 과시하는 장이 되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갈 길은 멀지만 한국 교회의 연합 사역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문화 예술을 꽃피운 나라들의 성공 사례에서 “정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이 자주 언급된다. 한국 교회 연합 운동도 활력을 얻으려면, 지원은 하되 무대를 독점하지 않으려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면 무대 뒤에 있어 여태 주목받지 못하던 이들이 눈에 보일 것이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각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성도들, 그리고 당찬 꿈을 꾸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 로잔의 공식 문서와 상관없이 로잔이 지향하는 통전적 복음을 잘 실천하고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도 있다.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을 찾아 바나바가 다소까지 갔듯이 그들의 사역을 들여다보고 서로 배우고 동역하는 사역이 필요하다.

다중심적(polycentric) 선교

세계 선교를 주도해 온 미국은 자국에서 벌어지는 야구 대회의 명칭을 ‘월드 시리즈’라고 명명하는 나라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를 이끌어 가는 국가라는 자부심이 충만한 나라다. 이처럼 오랫동안 중심의 자리에 있던 관성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선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제1차 로잔대회는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과 영국의 존 스토트가 손을 잡음으로 시작됐다. 두 나라의 주도성은 중요했다. 그러나 그 대회 때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 등 남미의 목소리가 반영됨으로 로잔대회는 세계적인 시야를 확보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후 로잔대회들은 이 정신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제4차 로잔대회는 다중심적 선교를 지향한다. 다양한 중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 교회에 주어진 세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세계 주요 선교사 파송 교회의 하나로서 겸손하게 피선교지와 동역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현지에서 그들의 문화와 경험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혜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로잔의 공식 문서에서 충분히 다뤄질 내용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 내에서 다양한 중심들 가운데 독특한 하나의 중심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봉준호 감독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수상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카데미는 로컬일 뿐”이라고 말한 것은 한국문화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개신교의 역사가 일천하고 불과 백 년 전까지 피선교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주요 나라로서 한국적 기독교를 정립해야 한다. 서구 신학의 한계가 분명해진 포스트-크리스텐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에 충실한, 우리의 신학을 절실히 요청한다. 나아가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탄식에 귀 기울이며 성경적인 대답으로 소망을 주는 선교를 요구한다. 

한국 현대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집중적으로 이뤄낸 독특한 역사다. 이 흐름에서 민주화에 기여한 한국 교회의 역량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로잔대회는 모일 때마다 인권이 억압되고 자유가 짓밟히는 지역의 아픔을 나누고 공감을 표시해 왔다. 3·1운동부터 7-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경험한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응답할 특별한 유산을 갖고 있다.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위한 노력도 평화를 향한 세계인의 실천에 주는 도전이 클 것이다. 로잔과 관련한 한국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로잔 문서들을 읽고 그 정신을 한국에 접목시키려 했던 ‘소수의 선각자’ 내에서 그 의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로잔이 표방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폭은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한국 교회 복음주의의 유산은 복음주의자로 명명되는 소수의 사람이 남긴 흔적이 아니다. 그러니 한국 기독교 전체 유산을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복음주의적 지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다중심이라는 가치는 지나치게 중앙 집중화된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모든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가치가 일원화돼 간다. 이 현상에 문제의식을 갖고, 교회가 이 흐름에 역행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민족’과 ‘모든 열방’을 향하는 복음, ‘약한 이를 더 귀히 여기는 예수님 마음’에는 소외된 지역과 주목받지 못한 계층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힘이 있다. 

이번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동적인 모임들, 각 지역의 기도운동과 말씀운동은 작은 희망의 시작을 보여 준다. 로잔이 다중심을 기치로 모이는 2024년은 한국인이 호주연합교회의 총회장으로, 미국장로교의 정서기로 선출된 해이기도 하다. 이미 세계는 우리 앞에 넓게 열려 있다. 누가 달려갈 것인가?

복음의 총체성을 향해

제1차 로잔대회 즈음해 복음 전도의 중심성과 폭넓은 선교의 필요성 간의 긴장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신학적으로 정리됐고 실천의 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교회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에 누가 반대하는가? 문제는 ‘복음 전도’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회적 의제 한두 가지에 몰두해 다른 가치들을 등한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이다. 이는 교회 이미지를 훼손하고 복음의 중심성도 흐리게 한다. 총체성의 반대는 복음 전도가 아니라 환원주의(reductionism)다. 자신의 의제에 대한 과도한 몰입이 진영의 대결과 정치 과잉이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맞물려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고 선교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오늘날의 선교가 염두해야 할 사회적 의제는 무엇인가? 제4차 로잔대회는 25개의 이슈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입장을 경청하고 반영하고 조율해 왔다. 각 과제에 대해 특별히 헌신한 이들이 있지만 ‘이것만이 교회를 살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우리는 대회에서 나올 결과물로서의 최종 문서만이 아니라, 작성 과정에서의 대화와 상호존중 그리고 열린 태도를 배워야 한다. 

계속될 말씀 운동

한국에서의 로잔대회 준비 과정은 특별했다. 전국의 수많은 교회가 연대해 기도했다. 500여 개의 교회가 사도행전 공동설교에 참여했다. 교단이 다른 다수의 목회자가 매 주일 같은 본문을 설교하고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을 나누는 모임을 가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모임을 ‘프로페짜이’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매주 목회자들과 성경연구모임을 가졌던 데서 연유한다. 제네바, 런던, 에든버러 등 개신교가 활발하게 일어났던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모임을 진행했다. 칼뱅의 성경 주석도, 취리히 성경 번역도, 최초의 개신교 신학교도 이 운동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다. 수직적인 체계를 벗어난 교회가 개인주의적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목회자들이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강단을 풍성하게 하는 일은 개신교 본래의 DNA다. 이제 그 DNA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 목회자들의 모임은 말씀에 대한 통찰만이 아니라,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살피는 우정 공동체로 발돋움해 가기도 한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나눔의 필요성이 목회자들에게 그만큼 컸다는 말일 것이다. 

로잔대회는 지나가겠지만 그 영향은 남아 있을 것이다. 올해 시작한 프로페짜이는 2025년부터는 더욱 발전된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프로페짜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 온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에서는 주제별 설교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한국 교회에는 성도들과 함께 큐티를 하며 해당 본문으로 주일 설교하는 교회가 많고, 교회력의 성서본문을 따라 설교하는 목회자도 많다. 앞으로는 〈생명의삶〉을 비롯한 주요 QT 월간지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하는 그룹과 교회력을 따라 설교하는 그룹이 더욱 많이 생겨날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한국 교회를 힘 있게 세워 가기를 기대한다. 

제4차 로잔대회는 단순히 스치는 행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운동이 한국 교회에 남길 영향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만들어 갈 기회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