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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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2년  01월호 성경, 너무나 정치적인 책: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왜 성경을 새로 번역했을까? 역사, 목회자에게 묻다(1)


잉글랜드의 영어 성경 번역의 역사는 14세기 말 옥스퍼드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0-1384)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100년도 훨씬 전에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칭할 정도로 반 로마 가톨릭 정서를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그가 남긴 업적 중의 하나는 성경을 잉글랜드 대중의 언어인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종교개혁 전후의 성경 번역의 역사는 단순히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했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경 번역의 역사와 국가 교회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형성의 역사는 흐름을 같이 한다. 

종교개혁 이전 중세 유럽의 가톨릭 공동체는 교황과 공의회의 결정과 같은 불문법 전통에 의해 유지됐다. 가톨릭 교회가 권위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교황과 공의회의 전통은 영구적인 것이기보다는, 새로운 전통에 의해 대체되며 발전하는 잠정성과 가변성을 지녔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국가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교회와 국가의 유일한 권위로 삼는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참조할 성문법이자 헌법의 자리를 성경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른 문제도 생겨났다. 성경을 단 하나의 유일한 권위의 원천이라고 놓는 프로테스탄트지만, 성경 권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성문으로 주어진 이 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됐다. 성경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로 프로테스탄트 국가 내의 종파 간의 분쟁이 생기고 내전도 벌어졌다. 

프로테스탄트 형성 이후 성경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고도의 정치적인 텍스트가 됐다. 성경이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의 근간이 됐다는 점에서 이 정치적인 성격은 피할 수 없다. 성경 텍스트를 번역할 때,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넣을 때, 최대한 특정한 신학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게 됐다. 그 결과 종교개혁 이후 종파적 입장에 따른 성경 해석은 사회 갈등의 해소제라기보다는 갈등의 촉진제로 작동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성경 번역의 역사는 참고한 원본이나, 번역 문체나 번역의 완결성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이다. 영어권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은 성경이자 국왕이 직접 번역을 위임해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이라고도 불리는 킹제임스성경(King James Version) 번역은 종교로 인한 사회 갈등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주여!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종교개혁기 성경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한 대표적인 인물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1509-1547)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봉자였으나, 자신의 이혼 문제로 인한 교황과의 갈등으로 마침내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성립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치세에서 성경번역학자인 윌리엄 틴들(1494-1536)이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유럽에서 이단 혐의로 체포돼 화형을 당했다. 틴들은 화형장에서 “주여!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1526년 출판된 틴들의 신약성경은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성경으로 헬라어 원전에서 번역했다. 틴들 성경은 독일에서 인쇄됐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출판이 금지됐다. 하지만 틴들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수 세대 동안 영어 성경 번역사에 영향을 주는 결정을 하게 된다. 영어 성경을 모든 교회에 비치하게 한 것이다. 

헨리 8세 때 최초로 인정된 공식 성경은 1537년 승인된 ‘매튜성경’이다. 이 성경은 성경 번역에 대한 핍박이 있을 때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목회를 하며 성경 번역 작업을 하던 존 로저스가 토머스 매튜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번역본이다. 그는 틴들의 1535년 판본을 활용해 편집했다. 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하나의 새로운 공인 성경을 제안했다. 왕실과 오랜 인연이 있는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개정한 번역본인 ‘대성경’(Great Bible)이 1539년 출판됐다. 대성경은 그 크기(42×28cm)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번역본 역시 원어를 기본으로 한 새로운 번역이기보다는 틴들의 성경을 기반으로 했다. 화형장에서의 틴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1

틴들의 화형 전후로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가 단절된 헨리 8세는 국가가 공인한 단일 성경을 통해 종교적, 정치적 통일을 성취하고자 했다. 성경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이데올로기는 대성경(1539)의 표제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삽화에 잘 나타나 있다. 삽화는 국왕을 중심으로 성경 안에서 하나 된 교회와 국가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진정한 군주는 종교를 옹호하고, 교회는 국왕을 받드는 모양새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제네바성경

1553년 헨리 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의 사망으로 평화롭던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는 큰 환란을 경험한다. 종교개혁에 부정적이었던 가톨릭교도 메리 1세(재위 1553-1558)가 다스리면서 국가는 하루아침에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메리 치세 5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성경은 금서가 됐다. 제네바성경(1560)은 메리 치세를 피해 제네바로 피신한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번역한 것이다. 칼뱅의 처제와 결혼한 윌리엄 위팅엄(1524-1579)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이 성경은 라틴어로 절 구분이 돼 있으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난외주가 들어 있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 신학이 성경 속에 강하게 스며들게 됐다. 1560년에 제네바에서 처음 인쇄되고, 1644년 암스테르담에서 마지막으로 인쇄됐다. 이 성경은 킹제임스성경 번역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제네바성경은 잉글랜드의 망명자들이 신학적으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됐다. 제네바성경의 난외주는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신학 지침이었다.3 이 성경 출판이 잉글랜드에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공식 승인을 받은 성경도 아니었다. 제네바성경은 지나치게 칼뱅주의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메리 여왕의 사망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잉글랜드가 프로테스탄트로 복귀하면서 1576년 마침내 잉글랜드 내에서 인쇄가 승인됐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대성경이라는 국가 공인 성경이 있었지만, 혁신적으로 편리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에 장절을 구분한 제네바성경은 개인과 가정에서 사용하는 대중적인 성경이 됐다. 

대중이 대성경 대신 제네바성경을 수용한 것은 제네바성경의 난외주 때문이었다. 제네바성경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에 각주를 첨가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적인 정보를 담은 각주도 있었지만, 신학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 신학은 칼뱅주의 신학이었다. 칼뱅주의 신학이 스며 있는 제네바성경이 영국에서 청교도주의를 형성하고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요소였다. 

제네바성경의 난외주는 청교도 사상이 어떻게 진화됐는지, 종교개혁의 해석학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 준다. 총 140개의 각주를 단 이 성경은 이후 성경에 각주를 다는 전통을 확립했다. 위팅엄이 번역한 최초의 판본에는 4개의 난외주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적그리스도라고 표시한다. 교황과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가장 큰 적이라는 인식이 들어 있다. 동시에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주창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 역시 거세다. 요한계시록 2:24의 “사탄의 깊은 것”을 ‘재세례파, 방종파, 교황주의자, 아리우스파의 사악한 오류와 신성모독’이라고 주석했다. 국가에 대한 시각은 다소 양가적이다. 출애굽기 1:19의 난외주에서는 ‘왕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표현하기도 했고, 열왕기하 9:33의 주석에서 이세벨의 강제 퇴위는 ‘모든 폭군들에 대한 신적인 심판’을 나타낸다고 했다. 동시에 계시록 21:24 주석은 ‘(재세례파들의 사악한 주장과 반대로) 국왕과 군주들이 주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통치한다면 하늘 영광의 참여자들이 된다’고 했다.4 

이 성경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교회의 공식 성경이 되기를 바랐지만, 난외주에 표현된 너무나 분명한 신학적 색채는 국교회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1560년 첫 출판된 제네바성경의 유명세에 국교회 주교들은 매우 당황했다. 난외주 문제와 별개로, 번역이 교회의 공인성경인 대성경보다 탁월했다. 국교회 내에서는 대성경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성경 번역에 대한 필요가 제기됐다. 

주교성경, 국교회의 대응 

국교회를 확립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의 지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역시 제네바성경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한편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직에 선임된 매튜 파커는 새로운 성경 번역의 필요를 고민했다. 그는 칼뱅주의 신학이 주교 중심의 국교회 체제의 권위를 흔든다고 판단해 제네바성경을 멀리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 공인본인 대성경도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며, 수준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1563년 대규모 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파커 대주교가 총괄 책임자로 선임돼 국교회 주교들을 동원해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성경이 ‘주교성경’(Bishops’ Bible)이다. 1568년 대성경을 개정한 주교성경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헌정됐다. 표지에 여왕의 대형 초상화가 들어 있는 성경의 헌정문에서 파커 주교는 ‘해로운 각주’는 달지 않았다고 했다. 제네바성경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제 주교성경이 공식적인 성경이 됐고, 1611년 킹제임스성경이 번역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주교성경은 대중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않았다.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의 주도로 주교성경이 번역돼 교회의 공식 성경이 됐지만 청교도들의 제네바성경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더 광범위하게 읽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이미 유일한 권위의 근거가 된 성경 텍스트 자체가 잉글랜드 내의 정체성의 통일을 가져오기보다는 여러 종파들 사이의 분열의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국가와 교회 운영에서 국교회 체제와 장로회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는 성경을 선택하는 데에서도 확연하게 갈라졌다.5

킹제임스성경

결혼하지 않고 죽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잉글랜드에는 제임스로 이름한 왕이 없었으므로, 제임스 1세가 됐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인물로, 스코틀랜드 개혁가이자 칼뱅주의자인 존 녹스가 대관식 설교를 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가 잉글랜드 왕으로 오자 국교회 지지자와 청교도 지지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요구를 왕에게 내세웠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잉글랜드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의 갈등이 도드라져 보였지만 실제는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분열은 악화되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과 같은 위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국교회 체제에 반대했다. 반면, 국교회는 청교도들이 지나치게 국가에 간섭하고 자신들의 파당적인 교리를 앞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교 중심의 국교회에 우호적이었던 제임스 1세는 여러 종파적 화해를 조성하기 위해 즉위 이듬해인 1604년에 햄튼 코트 궁전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옥스퍼드대학의 저명한 학자이자 청교도였던 존 레이놀즈(1549-1607)가 성경 번역에 대한 안건을 처음 제안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공식 성경이던 주교성경의 오역을 비판하며 새로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공식 성경을 위한 번역 프로젝트보다는 대중적인 제네바성경을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6 영어 성경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제임스 1세는 통일된 성경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영어로 번역된 성경 중에 제대로 번역된 성경을 본 적이 없으며, 그중 최악은 제네바성경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1세는 제네바성경 난외주의 선동적인 문구를 몹시 불편하게 여긴 것이다. 

제임스 1세가 위임한 성경 번역의 목적은 서로 충돌하는 신학적 관점을 중재하고, 하나의 영어 성경을 기반으로 다양한 종파들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이 번역의 가이드라인은 국왕의 재가를 받아 런던 주교 리처드 뱅크로프트(1544-1610)가 초안했다. 기본 규칙은 전체적으로 새롭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영어 번역본들을 최대한 활용해 주교성경 번역본을 수정하는 것이었다.7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을 사용하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논쟁을 야기하는 라틴어 번역은 활용하지 않도록 했다. 번역자들은 당대의 시사적이거나 신학적인 논쟁을 끌어들이기보다는, 번역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성경 번역에 종종 나타난 종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비종파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성경 번역문 자체는 제네바성경의 많은 부분을 활용했지만, 킹제임스성경은 제네바성경과는 근원적으로 대조되는 접근법을 선택했다. 제임스 왕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 설명을 위한 목적이 아닌한 난외주를 넣지 않도록 규정했다. 이는 분명 논쟁적인 난외주가 다수 들어 있는 제네바성경을 의식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가들은 이전 영어 성경 판본에서 사용된 난외주들에 비교할 때 아주 소수의 각주만 달았다. 

1604년에 시작된 이 번역 프로젝트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웨스트민스터에서 각각 2개의 팀을 선발, 총 6개의 팀이 진행했다. 한 팀당 7-8명의 학자로 구성됐다. 웨스트민스터 1팀이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 번역했고, 케임브리지 1팀이 역대기부터 아가서까지 번역했으며, 옥스퍼드 1팀이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번역했다. 그 다음 별도의 수정위원회가 런던에 모여 전체 번역을 수정했다.8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이전 영어 성경 번역본의 문구를 가능한 채택해 그곳을 수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번역본의 정확도를 높였고, 한편으로 이전 영어 번역본의 잘 알려진 문구들을 유지함으로써 일관성을 담보했다. 논쟁적인 난외주를 제외했지만,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읽힌 제네바 성경의 문구를 다수 수용함으로써, 킹제임스성경은 청교도들도 수용할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킹제임스성경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인 통일된 성경을 편찬해 잉글랜드 내의 국교파와 청교도파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효과를 발휘했다. 1611년에 출판된 킹제임스성경은 국교회와 청교도들 모두에게 수용됐다. 단일 성경 번역을 통해 서로 경쟁하는 종파들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며 정치적, 신학적 통일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성공적으로 수용된 이유는 단지 논쟁적인 이슈를 배제하고 여러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을 포용한 것에만 있지 않다. 성경 번역자들은 언어적 고려 못지않게 문학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원어에 충실하고, 문학적으로 유려한 표현들이 이 성경의 성공을 가져왔다. 첫 출판된 후부터 수세기 동안 영어권 성경에서 킹제임스성경은 우월적인 지위를 유지했다.9 

나가며

킹제임스성경의 대중적인 수용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가 의도한 종교, 정치의 통일은 완전히 성취되지 못했다. 그의 종교 정책에 반대한 분리파 청교도들은 1620년 결국 잉글랜드를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했다. 그들이 가져 간 성경도 제네바성경이었다. 또한 제임스 1세 사후 잉글랜드는 국교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오랜 내전을 겪었다. 

성경은 국가 정치의 한복판에 자리한 매우 정치적인 책이었다. 성경을 정치적이라고 하면 짐짓 불경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지점들이 있다. 그 출발은 성경의 권위나 교회의 권위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 통합의 기제로 작동하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수용한다는 것이 곧 하나의 유일한 해석이나 신학의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제네바성경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였다. 성경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는 잠정적인 것이며,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다양성, 가변성,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 

킹제임스성경이라는 유산 이면에는 국왕이 분열된 교회의 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가지고 관여했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시감(旣視感)처럼 떠오른다.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324년 제국을 통일해 밀라노칙령이 온 제국에 반포됐을 때, 황제는 신학적으로 깊이 분열된 교회의 현실을 마주했다. 이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을 통일한 이듬해인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해 직접 신학적인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16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왕국의 왕으로 런던으로 내려온 제임스 1세는 깊게 패인 교회 현실을 마주하고, 이듬해인 1604년 성경 번역을 주도해 위임했다. 

신학과 해석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핵심은 서로가 차이를 용납하고 화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다. 이런 중용과 관용의 태도 없이 정통과 그렇지 않은 해석으로 편 가르기만 하면 성경도 분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이런 의외의 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1) Donald L. Brake, Visual History of the English Bible, A: The Tumultuous Tale of the World’s Bestselling Book, Baker Books, 2008, pp. 94-95.
2) Jacobus A Naude & Cynthia L Miller-Naude, Lamentations in The English Bible Translation Tradition of the King James Bible (1611), Scriptura 110(2), June 2012, pp. 211-212.
3) Crawford Gribben, Deconstructing the Geneva Bible: the search for a puritan poetic, Literature and Theology, Volume 14, Issue 1, March 2000, p. 3.
4) 앞의 책, pp. 4-5.
5) A.K. Curtis, The Hampton Court Conference, in D. Burke (ed.), Translation That Openeth the Window. Reflections on the History and Legacy of the King James Bible,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9, pp. 57-71.
6) Jeffrey Alan Miller; “Better, as in the Geneva”: The Role of the Geneva Bible in Drafting the King James Version, Journal of Medieval and Early Modern Studies, 1 September 2017; 47 (3), p. 521.
7) 앞의책, p. 518.
8) David Norton, The King James Bible: A Short History from Tyndale to Toda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pp. 100-101.
9) Brake, Visual History of the English Bible, p.204. 







 

최종원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버밍엄대학교(Ph.D.). 저서로 《중세 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