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비아토르/ 740쪽/ 35,000원

2018년 9월에 독일 튀빙엔의 모 지백(Mohr Siebeck) 사가 출판한 필자의 책 Justification and God’s Kingdom을 최근 두란노서원이 한역하여 《칭의와 하나님 나라》(2020년 7월)로 국내에 내놓았다. 그 한역판 말미에 2018년 11월 16일, 미국 휴스턴 소재 레니어신학도서관(Lanier Theological Library)에서 개최된 톰 라이트의 최근 저서 《바울 평전》(Paul: A Biography, 2018)에 대한 패널 토론회에 필자가 제출한 논평문을 우리말로 옮겨 부록으로 덧붙였다.

그 토론회는 레니어신학도서관의 창립자인 마크 레니어(Mark Lanier)의 사회 아래 라이트를 중심에 두고 샤이블리 스미스(Shively Smith, 보스턴대학교), 주디스 건드리(Judith Gundry, 예일대학교), 토드 스틸(Todd Still, 베일러대학교) 교수들과 필자가 함께 참여해 이루어졌다. 우리 네 명의 패널리스트들에게는 라이트의 책 중 한 부를 각각 맡아 논평하도록 위탁되었는데, 필자는 제1부를 맡았다.

그동안 필자는 라이트와의 토론에서 그의 칭의론과 반제국적 해석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이번 책 중 그것들을 주로 다루는 부분이 필자에게 위탁되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제1부에서 라이트는 그 주제들에 대한 자기 특유의 해석을 위한 기초를 놓기 때문에, 필자가 그것들에 대해 대강의 비평은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의 책 한역본에 그 논평문을 부록으로 실어 독자들이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한 비판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 글을 본 〈목회와신학〉에서 필자가 하고 싶었던 라이트의 칭의론과 반제국적 해석에 대한 비평을 기고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고, 이에 간단한 비평문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독자들에게 이 비평문을 필자의 책 《칭의와 하나님 나라》에 덧붙여진 부록과 함께 읽기를 권하는 바다.
 

라이트의 칭의론 비판

사실 필자의 책 《칭의와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장(제11장)은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한 비판을 그 내용으로 한다. 본고에서는 여러 이유로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할 수 밖에 없다. 더 자세한 비판을 원한다면 그 책을 권한다.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론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아담의 죄와 그 결과들을 해결하시고, 이스라엘의 족장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심으로써 세상을 바로잡으심(창 12:2­3; 17:1­8; 18:18­19; 22:15­18)이라는 도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칭의를 믿음이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아브라함의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신원하심으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 가정을 이루고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시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교 전승의 광범위한 메타-내러티브(거대 담론)적 해석과, 제2성전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기가 지속되고 있다고 믿었다는 이론을 근본적인 가정으로 삼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대한 광범위한 내러티브적 해석을 함으로써 위와 같은 칭의론 해석을 도출한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방법론으로 그는 자신과 더불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갖자는 운동을 주도한 제임스 던보다 ‘새 관점’을 더 일관성 있고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칭의론 해석을 피력한다. 하지만 그러한 대담한 메타내러티브적, 그리고 내러티브적 해석이 과연 구약, 유대문서, 바울 서신들의 본문에 대한 더 세세한 주석에 의해 뒷받침되는가라는 큰 논란을 야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주로 라이트의 칭의론 해석이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들을 제기해 왔다.

 

1. 예수의 왕적 통치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라이트의 칭의론

필자에게 있어 라이트 칭의론 해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로 신자에게 부여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언약의 관계)에 서 있는 자로서의 신분을 일관되게 아브라함의 언약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즉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또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실행하는 그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롬 1:3-4; 고전 15:23-27; 골 1:13-14)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이트의 다음 두 가지 강조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의 신학적 이해의 통합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라이트가 바울 복음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다윗 가문 출신의 왕,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즉 하나님의 통치권의 대행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는 로마서의 주제 진술로서 로마서 1:3-4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바울의 본문에 등장하는 ‘크리스토스’를 규칙적으로 ‘메시아’로, 그리고 자주 ‘왕’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면서도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직을 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즉 그의 씨(이스라엘)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창 12:2-3; 18:18-19; 22:18) 언약 목적의 성취 도식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적, 내포적) 대표자로서 그의 죽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또는 그의 신실함)으로 그 목적을 성취했고, 그래서 믿음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하나의 가족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럼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다.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직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서 예수의 왕적 통치라는 범주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라이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즉 언약적 관계가 어떻게 복음 선포에서 발포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수립되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관계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주이신 예수에게 복종하며’, 우상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섬길’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그런데 라이트는 이것들은 모두 ‘가족’ 그림보다는 ‘나라’ 그림을 더 떠올리게 하는 용어들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부활하신 주이신 예수에게 복종하기’가 실제로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는 당위성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라이트가 칭의를 하나님 나라 또는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이전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의 가족 구성원 되기의 범주로만 해석하는 것은 또한 근래 그가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반제국적[counter-imperial] 바울 해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쓰겠지만, 라이트는 바울이 예수가 다윗적 ‘메시아-왕’,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주’라고 선포하며 그가 ‘의’와 ‘평화’를 주신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은 같은 칭호들로 자신을 참칭하면서 온 세상에 ‘의’와 ‘평화’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선전하던 로마의 황제에 대항한 것이라고 본다. 이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주’ 가이사와 그의 거짓 ‘복음’을 신뢰하며 그에게 충성하는 것을 그만두고 참 ‘주’이신 예수와 그의 참된 ‘복음’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여 참 ‘구원’을 얻게 하려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이트는 그의 대작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에서 이 같은 주장을 수없이 되풀이하는데, 정작 그 책 어디에서도 메시아/주 예수의 통치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로마 제국이 온 세상에 베푼다고 선전하던 ‘정의’와 ‘화평’ 그리고 ‘구원’보다 더 월등한 진짜 구원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라이트가 바울의 칭의론을 그의 윤리적 가르침과 전혀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보다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문제의 한 단면이다. 라이트가 예수의 메시아직을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그리고 칭의를 아브라함의 가족 되기로 해석하는 데 집중하면서 칭의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것을 등한시하는 것은 당연히 의로운 생활을 위한 바울의 윤리적 권면들을 그의 칭의론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필자는 그것이 단순히 라이트 신학의 통합성에 있어 작은 흠결이 아니라 그의 칭의론 해석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들 중 하나라고 본다.

라이트는 칭의를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의 대속 제사의 덕을 입어 죄사함, 즉 사면(acquittal)받고,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아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메시아­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나라로 이전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이 주 예수의 사도(즉 전권대사)로서 자신을 보내신 ‘주’의 이름으로 발하는 윤리적 명령들은 사실 세례 때 사면받고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 된 ‘의인’들이 실제로 의롭게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발하는 주의 명령들이라고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실제로 라이트는 자신의 바울 신학 이해를 총 망라한 책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바울의 윤리를 메시아적 왕 예수의 주권이나 칭의론과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토론한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필자의 책 《칭의와 하나님 나라》 제11장에서 비교적 자세히 토론하고 비판했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상 그 비판의 대강만 요약한다.
 

2. ‘은혜’에 대한 성찰이 없는 라이트의 칭의론

라이트는 바울의 윤리를 세례 때 칭의의 선취(첫 열매)를 받은 신자들(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의인’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칭의의 완성을 얻기 위해 칭의의 현재적 단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재적 왕적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영(하나님의 영, 즉 성령. 롬 8:9-10; 고후 3:14-18)을 통해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자는 그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믿음의 순종’을 해 ‘성령의 열매’(갈 5:22-23), 즉 ‘의의 열매’(빌 1:11)를 맺게 되는 것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라이트는 성령의 사역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시켜 설명하지 않는다. 더불어 신자들이 주의 윤리적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베푸는 ‘은혜’를 덧입음으로 이루어짐을, 그러므로 칭의의 현재적 단계에서도 우리의 칭의 과정은 ‘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히지 못한다.

사실 우리의 칭의는 세례 때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최후 심판 때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로 완성된다. ‘의인’으로 인정된 사람들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칭의의 현재 과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으로써 가능한 것이기에 우리의 칭의는 시작부터 완성까지 삼위일체적 하나님 ‘은혜’에 의해, 그리고 우리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이트는 그의 책 《바울 평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책의 색인에서도 그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라이트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성을 그토록 강조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내게 주신 은혜’라고 버릇처럼 부르는(참조, 롬 12:3; 15:15; 고전 3:10; 갈 2:9; 엡 3:2, 7, 8; 이 이외에 고전 15:9-10; 갈 1:15; 2:21과 고전 7:25; 고후 4:1; 5:14) ‘은혜의 사도요 신학자인 바울’의 전기를 ‘은혜’에 대한 성찰 없이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여간 바울의 윤리가 그의 칭의의 복음에서 기원하기에 그것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칭의의 현재적 과정(즉 우리의 의로운 또는 윤리적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덧입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라이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리라는 바울의 가르침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그 은혜의 통치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가 세례 때 받는 칭의의 첫 열매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최후의 심판 때 칭의의 완성은 다만 우리의 선한 행위로 받는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바울에 대한 반제국적 해석 비판

1. 반제국적 해석에 대한 라이트의 근거

라이트는 1996년에 출판한 그의 책 Jesus: The Victory of God(예수: 하나님의 승리)에서 예수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에 항전을 꿈꾸던 이들과 비판적 거리두기를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리처드 허슬리(Richard Horsley) 등 소수의 학자들이 전개해 온 바울 신학에 대한 반제국적(antiimperial, counterimperial) 해석 운동에 합류해 그 운동이 당시 미국에서 네오-콘(NeoCon) 이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정권의 다분히 패권적이고 신제국주의적이기까지 한 정치를 배경으로 많은 지지자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이트는 2013년 신약 신학의 바울 편으로서 두 권으로 된 방대한 책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출판하면서 바울 신학에 대한 반제국적 해석을 가장 포괄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그의 근작 《바울 평전》에도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 반제국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역설한다.

2016년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독일의 학자 30명이 각각 라이트의 대작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한 주제를 맡아 논평해 처음에는 독일에서, 후에는 미국에서도 출간하게 되었는데, 그때 필자는 라이트의 반제국적 바울 해석을 맡아 “바울과 로마 제국”이라는 논평으로 그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그 논문은 필자의 책 《그리스도와 가이사》(Christ and Caesar)와 연속성을 가진 것이나, 2013년에 라이트가 보다 원숙하게 제시한 바울 신학에 대한 반제국적 해석과 토론하며 필자도 그동안 좀 더 다듬어진 필자의 견해를 피력한 논문이다. 여기서는 그 논문의 몇 가지 요점들만 간략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근까지 바울 신학의 반제국적 해석가들은 주로 바울의 복음 선포와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 및 제국 선전이 ‘신의 아들’, ‘주’, ‘구원자’, ‘복음’, ‘구원’, ‘(정)의’, ‘화평’, ‘믿음/신실함/충성’, ‘파루지아/아판테시스’ 등의 어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착안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쓰던 용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로마제국이 온 세상에 가져다 주었다고 선전하는 구원의 축복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왔다고 선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신의 아들’이요 ‘주’요 ‘구원자’이시고 가이사는 그저 그리스도의 패러디에 불과하고 그의 주장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을 은근히 가르쳐서 로마제국을 ‘전복’(subvert)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그 언어적 공통성을 넘어서 로마의 이데올로기와 바울 복음의 ‘놀라운’ 내러티브적 유사성에 착안한다: 한편 로마는 스스로를 온 세상을 지배하며 평화와 정의를 가져온 ‘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를 배출한, 신의 선택을 받은 도시요 민족이며 문화로서 자신의 유구하고 강력한 이야기를 자랑했다. 반면에 바울은 ‘신의 아들’로서 온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와 세상의 순복을 요구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배출한, 신의 선택을 받은 한 민족의 긴 이야기를 서술했다. 라이트에 의하면 앞서 살펴본 언어적 공통성에 더하여 이 내러티브적 유사성으로 인해 바울의 복음과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 간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울은 유대 묵시문학의 전통을 이은 사람으로서 당시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온 세상을 차례로 통치하는 이방 제국들을 상징하는 네 짐승들 중 가장 잔인무도한 마지막 짐승을 로마제국으로 본 관점을 견지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가이사에서 다니엘 7장의 마지막 괴물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메시아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 세상의 모든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본문(롬 1:3-4; 고전 15:20-28; 빌 2:6-11; 골 1:15-20; 2:14-15 등)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에 구원자로 오실 것임(파루시아)을 선포하는 묵시문학적 본문(살전 4:123-5:11; 살후 2:1-12; 빌 3:20-21; 롬 8:31-39; 고전 15:20-28, 51-57 등)에서 로마의 가이사에 대해 도전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복음이 근본적으로 반로마적, 반제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로마 제국의 복무자들의 불의와 폭압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그는 로마가 온 세상에 가져왔다고 선전하는 ‘평화와 안전’의 허상(살전 5:3)에 대해, 이방인들의 일반적인 우상 숭배의 일종으로서의 황제 숭배의 어리석음과 죄악성(고전 8:5)에 대해, 그리고 그것과 함께 가는 음행 등의 부도덕성(롬 1:18-32)에 대해, 무엇보다도 로마가 이 세상의 다른 통치자들과 영적 권세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종으로 복무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력이라는 것(고전 2:6-8)에 대해 두루 비판적인 견해를 지녔다. 그리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경계하도록 가르쳤음은 누구나 쉽게 그의 편지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반제국적 해석의 아킬레스건 ‘로마서 13장’

그러면 바울은 이런 이유들로 인해 교회가 로마에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가(즉 그의 신학과 윤리적 권면을 전개했는가)? 앞서 언급한 필자의 논문 “바울과 로마 제국”에서 필자는 라이트가 그의 책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를 다니엘 7장의 마지막 괴물의 현신으로 보고 교회로 하여금 그의 거짓 복음과 포악에 저항하도록 가르친다고 강조함으로써 바울을 요한계시록 저자 요한의 쌍둥이 형제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 요한은 당대(주후 90년 대)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용(사탄)으로부터 힘을 받아 우상화와 포악 통치를 하는 ‘짐승’으로 그려 다니엘 7장의 마지막 괴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계 13장). 그러기에 그가 상징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 체제가 결국 메시아 예수와 그의 교회/군대의 거룩한 전쟁(순교를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신실히 증거함)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비교적 선정을 베풀던 당대(폭군 칼리굴라가 암살된 주후 41년부터 바울이 로마서를 쓴 56/57년)의 로마 황제들, 클라우디우스와 초기 네로, 그리고 그들의 관리들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도록 임명하신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순종하고 세금도 신실히 바치라고 가르쳤다(롬 13:1-7). 이로써 당시 유대 땅에서 커져가는 열심당의 대로마 항전의 기세나 로마에서 일어난 세금 반란의 기세에 영향을 받지 말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라이트의 견해와 달리 바울은 로마 황제가 사탄의 종노릇하는 면도 있어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면도 있음을 인정하여 그런 때는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요한같이 일방적인 대로마 항전을 부추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반제국적 해석가에게 로마서 13장은 아킬레스건이다. 그러기에 라이트도 그 곳의 의미를 축소하고 변명하려 애를 많이 쓰지만, 설득력은 전혀 없다.

로마제국이 사탄의 종노릇하여 영적·도덕적으로 부패하며 거짓 복음으로 신민들을 현혹하고, 심히 불의하고 포악스럽기도 했는데, 바울은 왜 요한과 같이 반제국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을까?(참조, 《그리스도와 가이사》) 간단히 말하자면, 불의한 로마 관헌들에 의해서 때로는 그의 복음이 가이사에 대한 반역이고 그의 선교가 대로마 혁명운동이라는 죄명으로 구금되고 재판받기도 했지만(예, 행 17:6), 바울은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고린도에서도 결국 무죄 석방되었고, 고린도에서는 총독 갈리오에 의해서 그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사역이 암묵적으로 용인받기까지 했다(행 18:12-17). 그런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아직 로마법과 제국의 제도들이 질서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지키는 면이 더 강하다고 보게 한 것 같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 이전에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그에 대한 모든 민족의 ‘믿음의 순종’이라는 사도적 소명(롬 1:1-5)을 받은 바울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에 이루어 놓은 통일(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세계화’), 비교적 공정한 법에 의한 통치, 비교적 효율적인 행정, 안전하고 신속한 여행망 등을 최대한 이용해 빨리 그 소명을 성취하려 한 것 같다. 임박한 주의 재림으로 이 악한 세상은 곧 사라진다고 본(예, 고전 7:29, 31) 바울은 이제 겨우 싹이 튼 작은 교회들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혁명 운동을 꾀하거나 로마 제국이나 지방의 관리들과 일부러 마찰을 빚기보다는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고, 심지어 핍박자들이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웃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이다(살전 4:11; 5:15; 롬 12:9-13:10). 그렇다고 참 ‘하나님의 아들’, 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구원’의 복음을 타협하거나 약화시키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하다가 로마 제국에 반역자로 의심을 받아 끌려가면 재판정에서 재판 과정을 통해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설명해 무죄 석방 받고 도리어 관리 몇 명이라도 신자로 얻는 기회를 삼으라는 것이 바울의 정신이다. 그 정신이 바울이 재판을 앞두고 빌립보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빌 1장).
 

3. 반로마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구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가이사 친위대의 감시 아래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자신의 재판에 대해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 그에 응답해 성령이 주시는 도움에 힘입어 자신이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그리스도를 선포하리라는 결의를 전하고,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구원’(무죄 석방)받을 것을 간절히 소망하기도 하고 확신하기도 한다고 쓰고 있다. 라이트가 빌립보서 2:6-11을 바울의 반제국적 복음 선포의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은 도무지 논리적이지 않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자기 우편에 높이시어 자기 이름(‘주’)을 주시고, 만유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로 삼아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그를 예배하고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게 하셨다는 그 ‘그리스도 찬송시’가 과연 가이사를 표적 삼은 것으로 반제국적, 반가이사적인 의미가 있다면, 가이사 앞에서 벌어질 생과 사를 가릴 재판을 앞둔 바울이 가이사 친위대의 감시 아래 쓰는 편지에 그것을 굳이 담았을까? 바울이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재판 과정 중 가이사에게 그 찬송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솔직히”(빌 1:20; 비교 롬 1:16) 설명할 것이다. 그 복음이 가이사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의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로마 대신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하리라는 뜻이 아니라, 가이사와 로마 제국의 모든 신민들이 참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도와주심으로 더 완전한 자유와 정의와 화평 그리고 행복을 누리게 하는(롬 14:17) ‘복음’이라고 설득할 것이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송시’가 로마의 가이사를 표적으로 삼지 않은 것같이 바울의 다른 복음 선포 요약(예, 롬 1:3-4; 10:9-10; 고전 15:23-27; 골 1:13-14) 등도 로마의 황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바울의 복음 선포에 동원된 어휘들은 대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부 헬라의 도시 국가나 로마제국의 어휘들과 공통적이기도 하다. 사실 중국이나 한국의 옛 왕조시대에 황제나 왕의 통치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인 어휘와 공통적이기도 하다(예, 천자, 주군). 바울 복음의 그런 어휘들 때문에 바울이 반제국적 메시지를 선포한다고 체포되고 재판받았을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해야 할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그가 로마서, 빌립보서를 쓸 때까지 매번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재판 과정 중 그런 오해를 다 해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그가 심지어 빌립보서에서도 다가오는 황제 앞에서의 재판 결과를 희망적으로 보고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런 어휘들에 반제국적 의미를 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서는 길게 설명할 수 없지만, 바울이 그의 복음 선포에 있어 로마제국을 특정하여 반제국적 의미를 담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가져온 구원은 온 세상을 죄와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새 창조로 바꾸는 구원이기에 겨우 로마 제국과 그것이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구원과 비교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제국도 그리스도가 구속할 이 타락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이 세상의 한 제도에 불과하지, 이 세상 전체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복음은 차라리 ‘반이 세상적’(counter-this worldly)이라고 해야지 특정하여 ‘반로마적’이라고 제한할 수 없다. 앞서 본대로 바울이 로마제국을 비판할 때도, 그것을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의 일부로 한 것이지, 특별히 로마제국을 특정하여 한 것이 아니다(J. Barclay도 참조).
 

4. 추상적 구호로만 남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허락된 지면이 넘었다. 그래서 필자의 라이트의 반제국적 해석에 대한 마지막 비판을 간단히 덧붙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이트는,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를 다니엘 7장의 마지막 괴물로 보고 그에 대항해서 그리스도를 ‘메시아왕’, ‘하나님의 아들’, ‘주’ 등으로 선포하고 그가 참 ‘(정)의’, ‘평화’, ‘구원’을 가져온다고 선포했다고 되풀이해 주장하면서도, 정작 칭의를 아브라함 가족의 범주로만 해석하고 하나님 나라로의 범주로 해석하지는 않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구원의 통치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칭의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된 신자들을 그의 영을 통해 통치함으로써 어떻게 ‘의의 열매’를 맺게 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롬 14:17), 곧 샬롬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로마의 가이사에 대항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왕노릇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주기도 제3청원) 이루어지게 한다는 말을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예전문처럼 되풀이하지만, 실제로 그 방대한 책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구체성이 없는, 단지 추상적인 구호로만 남아 있다.

혹 독자들 중 영/육의 이원론과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에 사고가 고착되어, 라이트의 바울 복음에 대한 반제국적 해석을 비판한 필자의 이 글을 그리스도인들인들은 ‘영혼이 천국 가는 일’, 즉 ‘구령 사업’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필자의 칭의론 해석에 있어 칭의의 현재적 단계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통해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강조를 잊지 말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바울 시대 이후 근 20세기가 지난 오늘의 변화된 신학적, 역사적, 세상적 상황 속에서 오늘의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어떻게 상황화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그리스도와 가이사》의 후기에 피력해 놓았으니, 참조하기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