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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독교 세계관은 학문이 아니라 ‘관점’이다
- 2017년 7월호

연재를 마친 소감은 어떠한가.
신앙적으로 철이 들면서 격동하는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통찰을 목회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번 연재에서는 뻔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했다. 창조-타락-구속의 틀로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식상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 글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그리고 목회자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설명했고, 마지막 회에서는 선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었다.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통찰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새로운 접근이다.
연재를 읽으며 한 편의 ‘복음 스토리’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은 바로 복음 제시다. 만약 나의 글을 ‘복음 스토리’로 이해를 했다면 필자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핵심 진리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 삶에 그대로 들어왔을 때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진리를 매일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도달해야 한다. 또 기독교 세계관은 신학이 아니라 상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내가 누구인지가 정의되고, 우리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정의하는 스토리다.
기독교 세계관은 고도의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삶의 상식적인 이야기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행해야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이것을 하나의 틀을 가진 이야기로 풀어내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종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를 다루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신약 교회의 범주에 살고 있고 지금도 사도행전 28장의 연속선에 있다. 책의 한 쪽에 기록되는 삶이란 책에 부합하는 삶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없어진 대본의 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맥락과 결말을 모두 알고 있다. 창조-타락-구속의 성경의 스토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 그림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멀리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겼다면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세 가지 방향으로 살펴야 한다. 첫째, 복음이 땅끝까지 가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열방을 향해 복음전도를 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삶의 한 구석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은 곳이 없다. 즉 교회뿐 아니라 직장, 학교, 가정,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예술의 모든 분야에 남김없이 하나님이 영역이다. 셋째,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의 시간까지 이어져야 하며,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이를 이어가야 한다. 이는 다음 세대를 향한 교육과 돌봄으로 가능하다. 이 세 가지 방향은 스토리텔링으로 가야 한다. 스토리가 끊어지면 이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특별히 목회자를 염두에 둔 이유는 무엇인가?
목회적인 적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목회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결론은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세계관적 안목을 갖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즉, 한 본문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전개하는지를 설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아이디어를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부활과 십자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구속사적 내러티브를 부분적으로는 알지만 큰 틀에서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인지를 아는 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 설교나 공부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세계관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별것 아니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식상하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때 나는 다시 질문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무엇을 했나요?”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 수업 마지막 시간에는 이 강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적도록 한다. 조별 토론도 한다. 스마트폰, 영화를 주제로 잡고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들을 대할 것인지를 발표하도록 한다.
나의 작업도 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적용 문제를 다룬다. 문화 이슈,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 사회의 이슈들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 신문이라면 모든 섹션의 주제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기사가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자와 편집자 모두 기독교 세계관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가 지금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역할이 컸다. 그는 40년 동안 기독 일간지와 주간지에 칼뱅주의적 개혁주의 시각에서 기사를 써 왔다.
칼뱅주의는 개혁주의 전통의 열매이자 종교개혁 최고의 결실이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학만 바꾼 개혁이 아니라 인생관과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변화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계관의 변화라는 표현을 쓰기보다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물론 편집자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같은 관점을 가진 공동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원주의의 물결이 거세다. 이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확신을 가진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종교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다원주의 사회이다. 다원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격려하고 축하하는 분위기다. 그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부정적으로 대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처한 실제 상황이다.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다원주의 문화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취할 수 있다. 소극적으로 교회 안에서만 기독교적 관점을 취하고 밖에서는 시장의 논리를 따라가는 이원론적 태도를 취하거나 다원주의에 전투적으로 맞설지 선택해야 한다. 요즘 사회의 분위기는 자기 사상에 확신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리더들은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지적 무장도 필요하지만 다원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예의범절과 관용적 태도도 필요하다. 진리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말하는 방법도 진리가 되어야 한다. 자기 확신이 무례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풍부한 비전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양면성이 있다. 재림과 더불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소망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 미래의 약속이지만 현실의 힘도 있다. 소풍 가는 어린이를 생각해 보라. 소풍에 대한 들뜬 기분과 기대감 때문에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낸다. 이동하는 시간도 힘들지 않다. 과정 자체가 이미 소풍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탄의 세력을 이기셨기 때문에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다. 그러나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세계관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내 손이 미치는 범위는 이미 천국이 임한 것으로 여길 것을 제안하고 싶다. 가령 지금 내가 쓰는 글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듯이 쓰고, 내가 살고 있는 집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부모가 자녀에게 그것을 보여 주고,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듯 살아가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 종교개혁의 최고 열매라면 가장 중요한 현실 가치는 거룩한 삶이다.
 
‘현대 문화의 이해와 목회적 함의’라는 주제로 다시 한 번 연재를 할 텐데, 어떤 내용인가? 
올 봄에 삼일교회에서 30명의 목회자를 대상으로 재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 내용을 조금 더 다듬을 예정이다. 전공을 살려서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고, 이해할 것인가를 다룰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룬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역사서는 서사, 시편은 시, 선지서는 독특한 문화다. 성경을 이렇게 이해할 때 본래의 성경의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간혹 이것들을 무시하고 내 방법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내야 하는 내가 판단자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들이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이기심이나 주관적 관점으로 텍스트를 읽기 쉽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태도를 바로잡는데 철학과 인문학적 해석학이 큰 통찰을 줄 수 있다. 케빈 벤 후저의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와 레슬리 뉴비긴의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는 목회자들이 설교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을 통찰을 지닌 저서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8월호부터 신학 연재를 하려고 한다. 애독을 바란다.

:: 필자 정보 - 글 이동환 기자 · 사진 정화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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