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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나?
- 2017년 5월호

유난히 천둥과 번개가 기분 나쁘게 치던 음침한 밤, 기괴스런 분위기의 실험실에서 광기에 휩싸인 천재 과학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에 대한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아 공포로 바뀌었다. 시체를 연결해 만든 괴생물체의 흉측한 모습이 경악스럽기도 했지만, 죽은 몸의 마디마디를 관통하며 흐르기 시작한 생명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의 과학자는 자신의 피조물 앞에서 ‘좋다’라고 감탄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이처럼 황급히 도주하고 만다. 태어나자마자 조물주로부터 버림받은 피조물은 자신의 존재를 부를 이름도 없이 실험실을 뛰쳐나간다. 흉측한 외모 때문에 괴물이라 불릴 수밖에 없던 생명체는 이렇게 세상 속에 비참하게 던져지게 되었다. 낯선 세계를 마주한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흡수했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책을 읽으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배웠다. 급기야 그는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자신의 사랑을 부어 줄 여성 피조물을 창조하라고 협박에 가까운 요청까지 한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소설가 M.W. 셸리(Mary Shelley, 1797~1851)가 1818년에 출간한 《프랑켄슈타인》의 줄거리다.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유럽 사회의 정치?사회적 혼돈과 과학 혁명에 따른 지적 동요와 윤리적 충격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시종일관 독자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육체를 가진 프랑켄슈타인은 시체로 만들어진 괴물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이의 몸을 모아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피조물도 자신의 창조주처럼 이성적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고, 사랑의 욕망을 가졌다. 그렇다면 괴물에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괴물의 사고와 감정과 욕망은 단지 육체의 활동에서 생겨난 화학적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인간의 지혜나 학문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적절한 답을 줄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더라도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의문이 갈 때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을 접하노라면 성서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soul)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냐(막 8:36)1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영혼이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인간됨은 영혼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으니, 육체나 물리적 세계는 신앙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수록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 글에서는 성서가 이해하는 영혼과 몸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등의 주제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영과 혼은 어떻게 구분될까?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 인체의 구성 성분은 내장, 근육, 뼈, 혈관, 혈액, 체액, 신경계 등이다. 하지만 인간이 단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영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고대부터 퍼져 있었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몸은 그대로인데 생명이 갑자기 없어짐을 관찰하면서, 물질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가시적 생명의 원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동물도 죽고 나면 몸을 남기는데 동물 역시 비가시적인 생명의 근원을 가지지 않는가? 인간은 지성도 있고 언어도 사용하는데, 동물과 구분되는 정신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독특성은 어디서 나올까? 이처럼 인간이 무엇으로 구성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동물과 차이가 있느냐는 문제는 인류의 호기심을 늘 자극해 왔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성서적 답변으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을 근거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인간은 영(pneuma), 혼(psych?), 몸(s?ma)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 왔다(히 4:12도 참고). ‘삼분설’(三分說, trichotomy)이라 불리는 이 입장에 의하면,3 물질적 육체와 구분되는 ‘혼’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생겨나는 곳이다. 혼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억하는 등의 일상적 정신 활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반면, ‘영’은 하나님과 소통을 하게 되는 부분으로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은혜를 통해 회복되거나 되살아난다(롬 8:10, 요 4:24, 빌 3:3 등 참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보았듯 영과 혼과 육을 지칭하는 개념이 신약성서의 언어인 그리스어에서는 각각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도 인간을 세 개의 구성 요소로 설명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영’과 ‘혼’과 ‘육’ 모두를 사용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창세기 1∼2장의 인간 창조 장면에 있어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부분은 몸,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는 혼, 하나님 형상은 영으로 구분된다(창 1:26-27; 2:7). 하지만 이처럼 영과 혼과 육의 삼분법을 구약성서를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는 그리스적 개념에 히브리어 단어를 끼워 맞추려는 다소 무리한 시도로 보인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삼분설을 지지해 왔던 이유는 영과 혼의 구분이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 혹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의 곤란한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필자도 교회학교 시절 동물도 혼이 있지만, 인간만 영이 있으므로 인간은 피조물 중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배웠다.5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 영이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서 불멸의 혼이 남아 귀신의 형태로 떠돈다는 설명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주장은 ‘혼’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좌우될 뿐만 아니라, 성서가 혼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근거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삼분설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이 ‘영적인 실체’와 ‘물질적 실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이론을 ‘이분설’(二分說, dichotomy)이라고 한다.6 성서에서 영과 혼은 구분되는 두 실체로 상정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된다(요 12:27; 13:21, 눅 1:46-17, 히 12:23 등). 성서는 사람이 죽을 때 혼이 떠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영이 떠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눅 12:20; 23:45, 요 19:30, 행 7:59 등). 성서는 인간을 ‘몸과 영’ 혹은 ‘몸과 혼’이라 부른다(마 10:28, 고전 5:5, 약 2:26 등). 또한 사람이 죄를 짓게 하는 것도 혼이기도 하고 영이기도 하다(신 2:30, 고전 7:34,  벧전 1:22,  계 18:14 등). 삼분설 지지자들이 구분하는 혼과 영의 기능 역시 성서 속에서는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시 25:11, 막 2:3, 눅 1:46, 고전 2:11 등). 이같이 성서의 많은 구절이 영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혼을 사용하지 않기에 삼분설보다는 이분설이 성서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분설 지지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5:23과 히브리서 4:12 같은 구절들이 영과 혼을 지칭하는 두 다른 단어를 한 문장에서 구분하고 있기에 삼분설이 더 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꼼꼼히 위 구절들을 읽어 보면, 이들이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논증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간됨 전체를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하기 원하시고(살전 5:23),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들어오신다(히 4:12)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삼분설을 지지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이분설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고, 그 특정 구절들을 해석하는 방식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오늘날 대다수 신학자들은 삼분설이 아닌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분설과 삼분설의 대립을 놓고 19∼20세기의 대표적 침례교 신학자 어거스트 홉킨스 스트롱(Augustus Hopkins Strong, 1836∼1921)은 흥미로운 의견을 펼쳤다. 그 역시 삼분설이 성서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논리적 문제가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삼분설이 제대로 정의될 경우,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는 점을 쉽사리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영과 혼을 분리하지는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둘을 구분했다.

인간을 개체적이고 의식 있는 생명이라고 볼 때 … 육체적 기관을 소유하고 움직이게 하는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을 혼이라 부른다. 인간을 이성적이고 도덕적 주체라 볼 때,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이 내주하게 하는 동일한 비물질적 부분을 영이라 부른다. … 영은 영적 실재와 관계된 … 인간의 고차적 부분이라면, 혼은 몸과 관계된 … 고차적 부분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란 셋으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둘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비물질적 부분은 비록 이중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실체에서는 통일되어 있다.7

스트롱의 타협안은 우리가 영과 혼을 다른 실체로 규정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 경우 인간의 영혼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조 세계와 관계를 맺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의 존재’라는 것을 성서의 인간학이 알려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스트롱처럼 영과 혼을 ‘고차적’ 부분이라 상정하는 순간, 몸은 ‘저급한’ 부분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살과 뼈와 근육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몸’을 가지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몸을 단지 영혼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몸은 영혼보다 저급한 부분인가?
이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삼분설이 성서가 아니라, 인간을 삼중 구조로 파악했던 그리스 철학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삼분설뿐만 아니라, 이분설도 고전적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을 영적인 실체와 물질적 실체로 이중적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 사변일 뿐 아니라,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것은 영혼과 육체를 대조적으로 파악했던 플라톤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몰트만의 비판에 따르면, “영혼의 ‘정신화’와 몸의 ‘물질화’는 무의식적으로 서구 인간화의 이론들을 지배”8하고 있고, 그리스도교도 이러한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플라톤 훨씬 이전부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이 죽고도 남아 있는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었다.9 하지만 플라톤은 영혼과 몸의 ‘연대성 속의 이질성’을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몸은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이 땅에서 영혼과 육체는 결합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영혼이 지상으로 하강해 사멸하는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이다.10 영혼의 본향은 생성 소멸하는 물질세계가 아니며, 인간의 행복은 이 세계에 길들여진 몸의 욕망을 영혼이 어떻게 조종하고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플라톤적 이원론이 그리스도교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영혼을 육체보다 고차적으로 보게 되면, 인간의 본질적 부분은 몸과 대조되는 영혼에 있다고 생각하게 될 위험이 있다.11 영혼의 우위성에 대한 강조는 몸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절하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된 자연에 대해서까지 부적절하거나 억압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12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다고 한 대상은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서 인간이요, 물질적인 피조세계 전체이며(창 1:31),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되는 구원의 은혜는 영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이다(눅 4:18-19).
또한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던 영혼이 잠깐 사멸할 육체 속에 들어와 있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영혼불멸설’이라는 이질적 사상을 주입했다. 하지만 성서에 의하면, 불멸성은 영혼의 속성이 아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힘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은 불멸하는 영혼의 회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몸의 부활을 통해 현실화된다.13
끝으로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갈망의 존재이므로 충돌하는 욕망을 이성이 잘 조정하지 못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의 본 의도와 무관하게 욕망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몸이 죄의 근원지인 것처럼 잘못된 이해를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성서는 육체가 죄로 이끌 수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마 7:13, 롬 8:13, 벧전 2:11 등), 갈망의 장소인 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전 6:13). 그리고 성서는 몸에서 나오는 욕망만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죄를 짓게 한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사 29:24, 단 5:20, 시 78:8 등). 심지어 죄를 향하는 교만한 영혼의 질주에 일차적으로 제동을 거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이다. C. S. 루이스는 몸과 영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재밌게 상상해 낸다.

제가 제 몸에게 말했습니다. “넌 언제나 날 끌어내리고 있어.” 제 몸이 대답하더군요. … “내게 담배와 술을 가르친 게 누구였더라? 물론 너였어. 그게 ‘어른다운’거라는 사춘기의 바보 같은 생각으로 말이지. 처음에 내 미각은 둘 다 몹시 싫어했지만 넌 한사코 네 뜻대로 했어. 어젯밤의 그 온갖 분한 생각, 복수심에 불타던 네 생각을 중단시켜 준 게 누구지? 물론 나야. 한사코 졸라서 자게 해줬잖아. 목이 바싹 마르게 만들고 두통이나 소화불량을 일으켜서 네가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막아주는 은인이 누군지 알아? 어?”14

죄를 향하거나 쾌락을 탐닉하려는 정신의 욕망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거룩해진’ 육체도 아닌 우리의 타고난 ‘자연적’ 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릴 때, 쾌락에 중독되어 있을 때, 타자와의 경계를 무시하고 자아의 영역을 무차별 확장하려 할 때, 몸은 곤고한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즉, 육체가 죄의 자리이고 영혼은 고귀하다는 이원론적 설명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실제 삶을 통해 볼 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대 신학자 중 상당수가 삼분설보다는 이분설을 지지하고, 이분설에 은밀히 스며든 플라톤주의적 요소를 비판하면서, 성서적 의미에서 전인적 인간론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비록 성서가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언어를 쓰고 있지만, 이것이 우월한 영적 실체와 열등한 물질적 실체로 인간 존재가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적 사유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영, 혼, 영혼 등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ruach, nephesh와 그리스어 psyche, pneuma는 성서에서 생명 혹은 인간 전체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15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서의 독특한 인간관을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다. 성서는 인간이 물질로만 만들어졌다는 유물론적 입장과 인간은 영적인 실체와 이와 대조되는 물질적 실체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적 입장 모두를 거부한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영혼과 몸을 나뉘지 않는 통합적 실체로 본다. 삼분설, 이분설, 이원론 등과 구분되는 성서적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심신통일체’(a psychosomatic unity)이다.16 이러한 인간론적 입장은 몸과 정신, 뇌와 의식의 관계 등에 대해 연구하는 신경과학이나 사회생물학 등의 인간 이해와 공명을 일으키며, 현대인을 위한 신학의 적절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17
영혼과 육체의 바른 관계, 어떻게 알 수 있나?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영혼으로만 정의될 수도 없다. 인간은 영혼과 몸이 결합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오직 ‘몸의 영혼’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고, 몸은 오직 ‘영혼의 몸’으로 있을 뿐이다.18 이처럼 인간이라는 주체는 ‘몸을 가진 영혼’이요, ‘영혼을 가진 몸’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간다.
창세기 1-2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물리적 세계를 만드시고, 그 세계의 일부로 ‘몸의 영혼’인 인간을 만드셨다. 그렇기에 인간은 물질적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영적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영혼과 몸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둘의 통일성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인간의 영혼은 신적 기원을 가지나 육체는 그렇지 못하다는 이원론과는 전적으로 다른 인간 이해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로서 인간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피조물 됨’을 알려 주는 창조신앙이 필요하다.
피조물인 인간은 스스로는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온전히 알 길이 없다. 이 세계를 만든 궁극적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이성적 추론으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지라도, 그 존재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로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요구하신다. 에밀 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그분이 세계의 창조주라면, 그는 또한 몸의 창조자이시다.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물질적인 육체나 질료와 같은 것들은 … 창조주의 존재와 대비되는 피조물의 분명한 표지이다. 따라서 인간의 피조적 본성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육체적 본성은 그가 신이 아니라는 표지이다. … 영혼과 몸의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창조되었다. 따라서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가장 고차원적 방법은 말씀께서 인간의 몸과 피가 되신 것이다. 성육하신 하나님 말씀을 만난 이들이 몸을 경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 그의 육체적 본성이 하나님에게 이질적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에게 몸은 “성령의 전”이다.19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인간의 추론이나 관찰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성자가 인간의 몸을 취하셨을 때, 물리적 육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을 표현하고 인간의 더 높은 소명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몸을 가진 회복과 구원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이처럼 창조주께서 인간을 위해 만드신 몸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실현하고자 하는 일을 현실화하는 매개이자, 피조물임에도 창조주의 섭리에 참여하는 인간의 참 신적이며 인간적인 운명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기호(sign)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과 결합한 몸은 유기체 조직의 대사활동을 넘어서는 특수한 역할과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과 연합한 영혼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참 정체를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몸을 통해 세계에서 구체화한다. 몸이 없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사명을 삶의 현장 혹은 역사 속에서 실현할 수가 없다. 반대로 영혼 없는 몸은 맹목적 욕망과 습관의 관습에 파묻혀 자신의 고귀한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요 4:24) 인간의 영혼을 통해 인간과 소통하신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는 대상인 영혼은 몸과 연합된 통전적 실체로서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를 등한시하거나 몸과 유리된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신앙은 비성서적이요,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인간은 몸을 가진 영혼이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인 인간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는 로마서 8:16을 해석하며, 브루너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 ‘장소’는 몸과 무관한 영혼이 아니라 영혼과 몸이 하나인 곳, 즉 ‘마음’(heart)”20이라고 지적했다.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800번 이상 사용되고 있지만, 육체적 심장을 문자적으로 뜻하지는 않는다. 성서에서 마음은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서 인간됨의 가장 중심이 되는 깊고도 신비한 곳이다.21
이것은 곧 하나님 말씀이 순수하게 영적인 말씀이 아니라, 언제나 물리적 매체와 결합된 영적인 메시지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22 즉, 선포된 하나님 말씀은 입으로 말해지고 귀를 통해 들려지며, 기록된 말씀은 눈으로 읽게 된다. 무엇보다도 계시된 하나님 말씀은 성육신하여 육체를 가진 인간과 함께 이 땅을 거니셨다. 요한일서 1:1은 이러한 계시 사건의 ‘육체적’ 본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몸과 연관된 전인적 활동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세계 안에서, 그 물질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시면서 자기를 소개하신다.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창조주의 모습을 반영하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고후 4:4)를 따라 영혼과 육의 통합체로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사랑하시며,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전인적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몸의 영혼’이자 ‘영혼의 몸’인 인간은 그 본질상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속에 살아가는 물질세계 내 존재(being-in-the material world)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 물질세계가 악하다거나, 육체의 감각을 죄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본성을 거스른 죄이자 창조주의 의도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의 위험이 있다.23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구원을 위해 우리가 벗어나야 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지금도 활동하시는 회복과 구속의 무대다. 오감을 가진 우리의 육체는 신앙의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이끄는 소중한 매개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죄와 욕망으로 무질서한 이 세계를 떠나 드높은 영적 세계로 올라가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뒤뚱거리는 몸을 가지고 불확실한 현실 세계의 일원이자 하나님 말씀의 청취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다.
결론: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어야 사람이지
철학자 디오게네스 알렌은 “영혼이라는 어휘는 사실상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하나의 당혹스러운 수수께끼이다”24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신비를 푸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영혼을 그 자체로 연구하거나, 그 의미를 육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살펴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 영혼은 언제나 몸과 결합하고 있으며, 양자의 통일성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알려진다.
즉, 참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됨의 의미를 푸는 열쇠가 되신다.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하며 이에 전인적으로 순종할 때, 이제껏 우리가 익숙하게 속해 왔던 삶의 질서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심상태가 지적했듯 “사람이 모두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란 역사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성취를 통해서 비로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25
인간다운 삶,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을 우리가 속한 물질적 환경 속에서 육화(肉化, embody)하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1) 한국어로 이 구절을 흔히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로 번역하지만, 그리스어 성서에는 목숨 대신 ‘영혼’(psych?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2) 고대부터 영혼에 대한 이해의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심상태,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서울: 서광사, 1989), pp.59-76.

3) 초대 교회부터 현재까지 이분설과 삼분설을 주장한 인물들은 벌콥이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상》, 고영민 옮김(서울: 기독교문사, 1976), p.441. 이들 중 삼분설의 대표적 지지자로 19세기 독일 루터교 학자 프란츠 델리취가 자주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성서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라는 질문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자기 이론을 조심스럽게 펼친다. Franz Delitzsch, A System of Biblical Psychology, trans. Robert Ernest Wallis(Edinburgh: T & T Clark, 1867), pp.103-118.

4) 구약학자 볼프는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 성서(70인역)와 라틴어 성서(불가타역)로 번역되면서 히브리어 단어들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었고, 그 결과 구약 인간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복잡성이 왜곡되었음을 지적한다. 한스 발터 볼프, 《구약성서의 인간학》, 문희석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1976), p.24. 

5) 아담에게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nephesh)가 다른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예가 있다(창 1:21, 2:7, 9:4 참조). 그러나 이때는 유기적 생명이란 의미가 더 강하지, 영과 구분되는 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전도서 3:21을 보면, 인간이 아닌 생명체도 ‘영’이라 불린다.

6) 이하 이분설을 지지하는 성서적 근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했다. 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상)》, 노진준 옮김(서울: 은성출판사, 1997), pp.715-723; 벌콥, 《조직신학, 상》, pp.443-444; Augustus Hopkins Strong, Systematic Theology, Vol. II: The Doctrine of Man(Philadelphia: Griffith and Rowland, 1907), p.485.

7) Strong, Systematic Theology, Vol. II, p.486.

8)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352.

9)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만 보더라도 영혼이 몸이 죽은 후에 남아 있다는 생각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때 영혼은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가련한 존재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Homer, Iliad I, pp.3-4. 

10) Plato, Phaedo, 250a.

11)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란 영혼과 몸의 통일체라고 정의하면서도, 영혼은 고차적이고 몸은 하위적인 실체라고 규정한다. Augustinus, De Civitas Dei, XIII. pp.23-24.

12) 비물질적 정신과 물질적 자연의 구분은 근대에 이르러 기계론적 세계관으로까지 발전된다. 다음을 참고하라. R. 데까르트, 《방법서설》, 최명관 옮김(서울: 서광사, 1983), p.48.

13) 김진혁, “죽음과 시간: 칼 바르트의 종말론적 시간을 중심으로”, 〈횃불트리니티저널〉 19/1(2016): pp.66-71, 75-78.

14) C. S. 루이스, “단편들”, 《피고석의 하나님》, 홍종락 옮김(서울: 홍성사, 2011), p.289.

15) 구약과 신약에서 영혼이 인간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례는 다음을 참고했다. Anth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Grand Rapids: Wm. B. Eerdmans, 1994), pp.210-215.

16)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pp.217-218.

17) 대표적으로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John Polkinghorne, “Towards an Integrated Anthropology”, in The Depth of the Human Person: A Multidisciplinary Approach, ed. Michael Welker(Grand Rapids: Wm. B. Eerdmans, 2014).

18)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2, ed. Thomas Torrance and Geoffrey Bromiley(T & T Clark, 1960), p.372.

19) Emil Brunner, Dogmatics II: The Christian Doctrine of Creation and Redemption, trans. Olive Wyon (Cambridge: James Clarke & Co., 1952), p.62.

20) Brunner, Dogmatics II, p.63.

21) 볼프, 《구약성서의 인간학》, pp.82-89.

22) 하나님 말씀의 삼중적 형태의 ‘물질적’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1, ed. Thomas Torrance and Geoffrey Bromiley(T & T Clark, 1969), pp.132-135.

23)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II-II, q. 142.

24) 디오게네스 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정재현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p.72.

25) 심상태, 《인간》, p.80.

:: 필자 정보 -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D.Phil.). 저서로 The Spirit of GOD and Christian Lif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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