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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 2017년 4월호

두 세례식 이야기

잊을 수 없는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한 국제 모임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아 3일 동안 집회를 했습니다. 중국의 비즈니스맨 20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 집회가 끝났을 때 사람이 다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도 성경책과 설교 원고를 들고 나가려고 할 때, 20명의 중국 비즈니스맨이 강대상 위로 올라왔습니다. 3일 동안 당신의 설교를 들었는데,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싶은데 세례를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신앙고백을 들을 기회도 없고, 물도 준비가 안되어 있고, 가운도 준비가 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세례를 받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 눈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중국에 알려지면 그들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물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일회용 컵에 담겨 있던 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회용 접시가 있었습니다. 그 접시에 그 물을 담고, 간단한 신앙고백을 하고, 그 아주 작은 물에 손을 적셔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 보다 그 사람들에게 있는 눈물을 봤습니다. 그들이 눈이 아주 빨개져서 진지하게 세례를 받을 때, 저는 그런 세례를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감동했습니다.1

위 인용문은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사역의 핵심으로 보았던 한 목회자의 증언이다. 처음 만난 20명의 사람에게, 게다가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외국인에게 바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적절한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런 세례식이 가능할까?
한국 교회에는 위와 비슷한 일이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특별한 세례식이 있다. 군대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훈련소에서는 대규모 진중 세례식이 열린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한 번에 3,000명 이상의 훈련병이 세례를 받는다. 이때 수세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교육 과정 없이 그날 처음 본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물론 진지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는 훈련병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간식이 먹고 싶어서 참석한 사람도 있고, 고단한 훈련소 생활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려고 세례 행렬에 끼어든 사람도 있으며, 유아 세례를 받고도 또 세례를 받은 한국형 ‘재세례파’도 있다. 어떤 훈련병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겠다는 믿음 없이 세례식에 참석했다가 세례를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한다.2 군 선교에서 진중 세례의 역할이 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론적 수준에서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세례식에서는 신앙의 준비나 교리 교육이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믿는다. 하지만 교회 내에는 세례가 무엇인지, 또 세례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태도가 공존한다. 많은 교회가 부활주일에 세례의식을 시행하는 것을 고려해 세례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4월의 주제로 ‘세례’를 선택했다. 지금부터 세례가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합당한지 등의 주제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성서는 세례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세례를 뜻하는 영어 단어 baptism은 ‘씻는 의식’ 혹은 ‘씻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baptisma(βπτισμα)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의 동사형 baptizo(βαπτζω)는 일반적으로 ‘물속에 담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3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baptizo를 ‘세례받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명사로서 ‘세례’와 동사로서 ‘세례받다’는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성서는 세례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볼 때, 세례는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던 종교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4
신약에서 세례가 죄를 씻는 기능을 하는 것과 유사하게, 구약에서 흐르는 물을 제의적 정화의식에 사용한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제사장의 봉헌(출 29:4), 나병 환자의 정화(레 14:7), 기타 정결 의식(레 11:25; 15:6; 민 19:12)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예식이 유대교의 입교 의식이 되었는데, 이를 ‘트빌라’(tvilah)라고 부른다. 트빌라는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례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트빌라와 세례의 궁극적인 차이는 그 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서는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세례는 시대와 교단과 신학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방식으로 목회 현장에서 시행되고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초대교회 신자들도 세례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세례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출애굽(고전 10:1-2), 할례(골 2:11-12), 홍수(벧전 3:19-21) 등의 모형을 이용해 세례의 구원론적 의미를 설명했다. 비록 잘 다듬어진 세례 신학은 전개하지 않더라도, 성서는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5
첫째, 세례는 정결 의식, 즉 죄를 씻어 없애 버리는 예식이다. 디도서 3:5은 “중생의 씻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도행전 22:16에서 아나니아도 사울에게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한다. 베드로후서 1:9은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라며 세례를 받고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이 구절은 세례가 이전의 죄를 씻어 버린 표지임을 보여 주는 예로 자주 사용된다).
둘째, 세례는 이전의 모습과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세례의 물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정결 의식과 연결되지만, 신약에서는 옛 자아의 죽음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를 받을 때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것은 사람이 죽었다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아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6
셋째, 세례받음이 새 생명의 탄생일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 근거이기 때문이다(골 2:12, 롬 6:1-11). 세례를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특별히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세례는 신자로서 교회의 일원이 됨을 공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한편으로는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보여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던 인종적?민족적?사회적 구분을 뛰어넘는 화해의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
신약성서는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람이 물에 잠기는 세례의 ‘가시적’ 의식이 영적 재탄생이나 연합이라는 ‘비가시적’ 사건과 연결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세례가 죄를 씻고 은혜를 전달해 주는 효력이 있다는 가톨릭부터, 세례를 성례(sacraments)로 인정하면서 가톨릭의 세례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려는 개신교의 여러 교단, 그리고 세례를 성례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하는 침례교까지 다양한 입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성을 염두에 두고 초대교회의 세례 의식을 통해 세례의 의미를 풀어 나가 보도록 하자.

초대교회 사람들은 왜 죽기 전까지 세례를 미뤘을까?
성서에 의하면, 세례는 죄를 씻어낸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다음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럼 세례를 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가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세례 이후 범한 죄로 인해 구원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세례 의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세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동방 교회의 초기 세례 예식을 간략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4세기 기록에 의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도 곧바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먼저 예비 신자가 되어 교리 교육에 참여해 도덕적 지도를 받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익혀야 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성찬식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할 정도로 부분적인 신앙생활이 허용되었다. 세례를 준비하는 과정의 절정은 ‘승리자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에 참여하는 사건이었다.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는 초대교회 이래 가장 중요한 구원론의 모델 중 하나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는 사탄의 죄수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을 억압하던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렸다. 즉, 그리스도의 승리는 악의 힘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우주적 사건이다.7 신자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며,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다. 그리스도인은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서 죽음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세례는 자기 나름의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의식이다. 초대교회에서 세례식은 보통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 즉 부활절 전야에 밤을 지새우는 동안 시행되었다.8 세례받는 사람은 한밤중에 교회를 떠나 침례 장소(baptistery)로 이동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물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례받기 전 그는 주교의 지시에 따라 특별한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는 어둠의 영역을 상징하는 서쪽을 향해 서서 축귀(逐鬼, exorcism)의 말을 듣고, 악마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게서 단절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하고자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그 후 빛의 땅을 상징하는 동쪽으로 돌아서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아니라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것을 맹세하고, 교회의 믿음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믿음을 고백했다.
자신을 옭아매던 옛 주인으로부터 진리와 자유를 주는 새 주인으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선서하는 의식이 끝난 후 침례가 진행되었다. 수세자는 주교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때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후, 물 밖으로 걸어 나와서 흰옷을 입고 교회로 들어가 성찬식에 참여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옛 생명은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었다. 세례를 통해 피조물이자 죄인에 불과했던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하면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롬 8:17)가 되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본향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이 땅에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기류민, 혹은 체류 외국인(resident alien)으로서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세례 의식은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자,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입문 예식임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준다. 죄의 씻음,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 새 생명의 탄생, 그리스도의 몸에 속함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이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세례 의식 속에 아름답고 균형감 있게 얽혀 있다.
이후 세례의 극적(dramatic) 성격이 다소 상실되면서 세례 의식과 신학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감각도 약화되었다.9 오늘날 초대교회의 형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세례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구원의 드라마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이 잘 표현했듯,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는 성령이 시작하고 유지하는 이야기에 참여”10하게 된다. 세례는 이 세계를 용서하고 치유하고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얻는 존재로 태어나는 새 창조의 사건이다. 
 
세례는 왜 삼위일체 하나님 이름으로 주는 걸까?
1세기 그리스도교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문서인 《디다케》 혹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세례에 대한 흥미로운 지침이 나온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일부다.
 
앞서 언급한 가르침을 미리 연습하고는 다음과 같이 세례를 베푸십시오. 흐르는 물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십시오. 만약 흐르는 물이 없다면 구할 수 있는 어떤 물이라도 사용하십시오. 만약 차가운 물에서 세례를 할 수 없다면, 따뜻한 물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만약 둘 다 없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물을 세 번 부으십시오.11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인지 아닌지는 세례 의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몸에 닿는 물의 양이나 온도보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이 더 강조되고 있다.
세례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출처는 신약성서다. 특히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자’ 위로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오셨고, ‘성부’는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셨다(마 3:13-17 외).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명령을 남기고 승천하셨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집례자는 다음과 같은 예식문을 사용해 세례 의식을 진행한다. “OOO 씨, 나는 너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12 이처럼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과 우리 각자가 가진 이름이 연결되는 사건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렇기에 세례 때 내가 가진 고유한 이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함께 불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인격적인 사귐과 소통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다.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와 세례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 결정적인 행위로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시며 자신의 말씀과 행위를 증언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받아 공동체 속으로 들어올 때, 우리 삶은 더욱 철저하고 더욱 깊은 방식으로 관계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모든 세례받는 지체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이다.13

세례를 받으면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 생명은 홀로 외따로 떨어진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결정적으로 관계 맺어진 삶이다. 나의 자아에 깊숙이 박혀 있던 삶의 중심축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사귐을 향해 기울어지는 사건이다. 세례를 통해 비인격적 원리나 추상적 관념에 길들여져 있던 인간은 상호 인격적이며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영혼의 고귀함이 짓눌리고 탈인격화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이 있고 서로 용서하며 치유하는 공동체의 삶 속으로 초청된다.
그렇기에 존 메이엔도르프가 잘 표현했듯, 세례를 통해 인간은 “종말론적이며 신비스러운 자신의 본래 운명”14을 응시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자기중심적’ 인간에서 ‘하나님 중심적’ 인간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세례는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자각할 수도 없는 나와 너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자기 스스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는 아기가 그러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세례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을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이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을 혼란스럽게 한 유아 세례의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유아 세례, 과연 성서적인가?
그리스도교 가정에 속한 아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유아 세례가 옳은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로 믿음을 고백할 때 받는 신자 세례가 옳은지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다. 어린아이에 대한 세례를 성서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서를 근거로 유아 세례를 완전히 지지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렵다. 초대교회는 세례 의식을 아주 신중하게 치렀고 세례를 위한 준비와 교육을 강조했지만, 흥미롭게도 유아 세례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일반화되었다.
초기 교부들은 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지만, 유아 세례에 대해서는 입장을 통일하지 못했다. 세례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이라 여겼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155~240)도 유아 세례에는 부정적이었다.15 반면 교회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던 키플리아누스(Cyprianus, 200~258)는 유아 세례를 찬성했다. 다만, 그는 이단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세례가 무효하므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유아 세례를 죄 씻음을 위해 필수적인 예식으로 여겼다. 심지어 그는 삼위일체 이름으로 행해진 세례라면 교회 밖 분파나 이단에서 행해졌더라도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았다.17 이후 재세례에 대한 반대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타락에 대한 반발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아 세례를 거부하던 급진파를 무력으로 탄압하는 모습은 가톨릭이나 루터교나 개혁교회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18 1525년 5월 29일 로마 가톨릭 당국은 스위스 슈비츠에서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던 에벌리 볼트(Eberli Bolt, 출생 연도 미상)의 화형을 집행했다. 1527년 1월 5일 취리히 정부는 펠릭스 만츠(Felix Manz, c. 1498~1527)의 사형을 집행했다.19 취리히의 개신교인들은 만츠가 재세례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잔인한 방식을 사용했다. 만츠의 순교는 종교개혁 세력 내부에 대한 탄압의 시초이자, 수세기 동안 이어진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박해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종교개혁 당시 유아 세례를 둘러싼 논쟁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위험하고 잔인한 기억을 새겨 놓았다. 세례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고 서로를 박해하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교단 간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 1986~1968)나 위르겐 몰트만(Jrgen Moltmann, 1926~)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유아 세례를 옹호하던 개혁주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20
그렇다면 유아 세례와 신자 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어떤 곳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각 입장이 세례에 대한 대표적 성서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을 간단히 추려서 살펴보기로 하자.21
첫째, 구약 시대에 남자아이들은 생후 8일째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표시로 할례를 받았다. 유아 세례 찬성자들은 신약에서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골로새서 2:1-11에서 바울도 할례와 세례를 연결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자들은 구약에서는 육체적 출생으로 언약 공동체에 들어간다면, 신약에서는 영적 거듭남으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고 지적한다. 즉, 할례는 ‘믿음의 부모’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면 모두 받는 것이기에 유아 세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둘째, 사도행전과 서신서에는 가족들 전체를 위한 세례가 언급되어 있다(행 16:15; 33, 골 1:16). 유아 세례 찬성자들은 유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가족 전체’의 세례를 강조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그 가족들이 모두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만큼 장성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는 성서는 유아 세례 찬성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확실한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유아 세례에 대해 각 교단들이 수백 년간 쌓아온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이론 체계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다른 신앙에 대한 비판이나 핍박으로 이어지거나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단마다 특유의 세례론을 발전시켜 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의 근거는 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세례는 그분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예식이고 세례의 효력은 물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는 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기본 전제를 가지고 결론적으로 유아 세례를 옹호하는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성서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고, 그 언약은 율법이 아닌 은혜의 언약이다. 그렇기에 세례에서는 각 개인의 결단보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과 교회와 맺으신 특별한 관계를 더 우선시한다.22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 결단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택 덕분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세례를 받을 때 개인이 가진 신앙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회에 속한 성인이나 교회 구성원의 자녀 모두 언약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표로서 세례를 받는 것이지, 개인이 쌓아 온 신앙에 대한 보상 혹은 증명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죄인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필요로 한다. 하나님 은혜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성인과 유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초대교회에 유아 세례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던 이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23
또한 신자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동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헌신의 서약 등이 전제 조건이다. 그렇다면 지적장애나 언어장애가 있어서 이러한 학습이 불가능한 사람은 세례를 받을 수 없는 것인가? 또한 사고나 질병으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사람은 이전에 받는 세례의 효력도 잃게 되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보면, 조건과 경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 은혜의 포용성을 잘 드러내는 세례는 오히려 유아 세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아 세례가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의식인지는 유아 세례 의식문을 꼼꼼히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아래에 나오는 유아 세례 질문은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미성숙한 존재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부모나 공동체에 얼마나 큰 책임을 부과하는지 잘 보여 준다.

질문 1)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이인 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질문 2) 그러면 이 아이가 커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할 때, 당신은 말리지 않겠습니까?
질문 3) 이 아이가 자라다 죽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24
  이처럼 유아 세례는 한 아이와 하나님 사이의 진실하고 신실한 관계를 위해 부모와 공동체가 전적인 헌신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아 세례에 대한 비판이 종교개혁 이후 근대 신학에서 빈번해지고 강화되는 것은 인간 주체의 자율성과 책임이 강조되는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유아 세례에 대한 비판에는 분명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귀 기울여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교회 다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세례를 받는다면, 세례는 제자도의 삶과 무관한 값싼 은총(cheap grace)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몰트만이 지적했듯이 유아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세례를 받게 되면, 세례가 유럽의 국가 교회 유지를 위한 예식의 하나처럼 변질될 수도 있다.
국가 교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도 세례 의식은 기존 종교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시행할 때, 세례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그리고 책임감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용기와 각오가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 필자 정보 -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D.Phil.). 저서로 The Spirit of GOD and Christian Lif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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