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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독교 세계관:타락에 대한 성경적 이해
- 2017년 3월호

죄와 악, 그리고 죽음은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 이토록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게 된 것일까요? 인생은 그 위대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는 것일까요?
종교와 철학과 예술은 이 질문에 답하려고 몸부림쳐 왔습니다. 이에 관한 성경의 대답은 정말 독특합니다. 사실 성경이 진리임은 여기서 가장 밝히 드러납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인가요?
해일이 인도양을 휩쓸어 수십만 명의 희생자가 났을 때 세상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절규했습니다. 아이티 지진 참사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흉악무도한 범죄나 전쟁을 보며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조금이라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죄악의 문제를 놓고 씨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과연 삶에 의미가 있는지도 분명치 않은 것 같으니까요.
전도서의 첫 말처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낙원임이 분명합니다. 자연재해뿐 아니라 인간 사회와 문화의 일상은 더욱 참담합니다.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힘든 때엔 가정적 불행과 계속되는 역경 속에 많은 사람이 살 의욕을 잃곤 합니다. 세상은 아름답고 의미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고통만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름답던 세상이 악과 고통으로 가득하게 된 이유는 큰 수수께끼입니다.
세상은 이런 삶의 모습 앞에 당황합니다.“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당하나”라는 넋두리가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망할 놈의 세상, 그렇지 뭐”라는 타박도 같습니다. 환경, 팔자, 부모, 사회를 탓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초등학교를 좋은 데 나오지 못해서”라고 농담하기도 하지요. 요즘은 모두 다“저놈들 때문이다”라고 사납게 구는 이들이 많아서 더 문제입니다.
창조주께서 보시기에도 좋았던 세상이 어떻게 죄악으로 물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죄가 세상에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죄악으로 얼룩지게 된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죄악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칼뱅이 말했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은 그렇게 파멸의 참혹한 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면 존재의 근원에 대해 알 수 없듯이 죄와 악의 문제는 더욱더 깊은 미궁에 빠져들고 맙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는 죄악이 널리 퍼졌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불행한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죄악과 그로 인한 재난에서 면제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욥처럼 갈등하며 이유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도 직접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설명해도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깨우쳐 주셨을 뿐입니다.
욥은 악의 문제를 보는 안목을 고쳤고 그것으로 충분했지요. 우리도 죄와 비참함을 직면하면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시험을 겪게 될 때 이 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죄악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악의 ‘구조화’
타락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병을 잘못 진단하면 처방도 잘못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초월한 듯 냉소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뇌이며 인생은 별수 없다며 체념에 빠지기도 하지요. 반대로 혁명이나 개혁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낙관론을 부르짖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관도 낙관도 모두 죄악과 타락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철에 백만 부 넘게 팔린 책이 있었습니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라는 일종의 정치평론입니다.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로 도배가 된 책입니다. 그토록 많이 팔린 이유는 ‘속이 시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이다’입니다. 너무도 감성적인 책이라 읽는 것이 아니라 눈에 와서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술술 넘어갑니다.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왜 이 모양인가를 두 가지로 압축했습니다. 대통령과 한 대기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책이 지금 나왔더라면 사이다가 아니라 청산가리 수준으로 더 독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 면모입니다. 과거엔 세상 문제를 운명이나 제도 탓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인간 승리를 다짐하며 극복하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하다가 포기할 때면 “인생이 다 그렇지 뭐”라고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것을 책임져야 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러고는 다 문제를 초래한 그들 때문이라고 질타합니다. 죄와 악의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이를 악의 ‘구조화’라고 말합니다. 본래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 하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돌렸고요. 결국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다시 사탄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게 만들거든요.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사실도 죄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해 주진 않습니다. 죄악의 원인을 이렇게 돌리면 결국 미궁에 빠집니다. 성경이 말해 주지 않는 것들은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지요.
역사적으로는 죄악의 원인을 사회 구조와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 흔합니다. 그중 가장 대담한 것이 이원론입니다. 한 방에 죄와 악의 신비를 해결하는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선과 악이 있었고, 그 악이 번성한 것이 오늘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철저히 이런 사상을 배격합니다. 오로지 선이 있었을 뿐이고 악은 실체가 없습니다. 성경적 세계관과 다른 관점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본래 악에 의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경만이 죄와 악의 원인을 인격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것도 관계적 배신에서 찾습니다. 자연히 기독교는 회복을 말하고 치유와 용서를 말합니다. 다른 종교와 철학도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고 치유가 필요함을 직시합니다. 하지만 악의 원인을 모르거나 잘못 짚기 때문에 처방도 그릇됩니다. 두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동양의 대표적 사상인 불교는 허상뿐인 세상을 탐하는 것이 악이요, 그 ‘진면목’을 파악하는 것을 해탈의 길로 제시합니다. 서양 철학의 대표자 플라톤은 그림자 세상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한편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인식론적 해법을 거부하고 정치적 해법을 제시합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했지만 중요한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논제입니다. 마르크스는 구원을 삶과 제도, 즉 유물론적 변혁, 다시 말해서 가장 구체적인 사회관계이자 삶의 조건인 경제적인 변혁에서 찾습니다. 모든 악을 방향이 아닌 구조에서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비롯한 이념적 정치 운동은 대체 종교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이 망가지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나 집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적 진리의 하나인 타락은 그 원인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깊고 널리 퍼져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죄와 악의 비참함을 뼈저리게 알아야만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유일한 해결책인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인격적 피조물의 타락, 자율
창조는 놀라운 질서의 세계입니다. 창조세계 앞에 진솔하게 서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압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 아름다운 세계가 오늘날 깨어진 모습이 된 것은 인간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세상 비극의 뿌리를 단지 법이나 도덕을 어기는 것에서 찾지 않습니다. 죄와 악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삶의 근원되신 성경을 거역하는 것이 죄악의 뿌리입니다.
성경은 사람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만 인격적 순종의 특권과 책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모험’이었다고까지 쓴 적이 있지요. 물론 그 특권이 인간을 만물의 자의적 지배자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계획과 질서를 세상에 부여하는 주권자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창조주의 법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의 청지기 역할을 바로 하게 됩니다. 이에 실패한 것이 죄의 원인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자율(自律, autonomy)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입니다(창세기 2:17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타락은 그것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어긋난 것입니다. 법 아래에 있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법의 제정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질은 자율의 추구와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마음속 깊이 있는 죄인의 인격 중심에 숨어 있는 악과 죄의 뿌리입니다.‘죄’는 사실 타락의 결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은 본래 있던 악이 싹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인간이 자율적 판단과 행동을 취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무엇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 결단을 통해 형성됩니다. 따라서 자신과 주변 문화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 기질은 타고날 수도 있고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자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의지적 결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간음이 타고난 급한 성격이나 분노, 음욕, 나쁜 환경으로 변명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자유와 의지적 결단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전적으로 자율적이지 않지만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동적인 존재만도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종교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너’로 만드셨지요. 인격의 본질은 자유로움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장 칼뱅은 인간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인격적으로 지어졌기에 ‘예’뿐 아니라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명령이 그 좋은 예입니다.

선악과를 두신 이유
선악과는 무감독 시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감독을 하지 않는 것은 컨닝의 유혹에 빠트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정직한 성숙을 배울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아이에게는 불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불을 영원히 멀리 할 수는 없습니다. 고의로 다치게 해서 그 위험성을 가르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바로 쓰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선악과를 성욕과 비교해 봅시다. 성적 충동은 선한 것이지만 때때로 괴로운 유혹의 빌미가 됩니다. 지금처럼 성적 자극이 가득한 문화 속에서 혼전 순결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순결은 바른 인격 성장이나 건전한 결혼 생활을 위해 필수적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유혹에서 차단된 진공 속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선악과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시는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선악과는 온전한 자유를 행사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수단이었습니다. 선악과는 결코 인간을 시험하는 유혹이나 함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할 것인가를 보이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먹을 줄 알면서 왜 만드셨는가?”, “그것을 먹을 때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물음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순종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그런 특권과 책임을 누리지 못했더라면 범죄할 수 없었지요.
선악과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 것은 마술적 약효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취하는 인간의 마음에 이미 악이 깃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고 선과 악을 선택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함정이나 덫이 아닙니다.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존중하시는 은총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율법과 비슷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의며 악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줍니다. 마치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경찰이 따라와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운전자는 알코올 측정기에 대고 마음껏 숨을 불어넣습니다. 숨겨야 할 것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으니까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의 미혹된 마음에는 선악과가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이 담긴 약속의 상징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이처럼 타락은 감각과 이성 그리고 판단력을 모두 망쳐 놓았습니다. 이렇게 죄에 빠진 인간은 더 이상 선을 알지도 못하고, 행할 능력은 더욱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범죄로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졌고요. 심판과 벌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부모나 선생님의 말을 어긴 결과 어려움을 자초한 우둔한 자녀나 학생의 모습과 같습니다. 악을 스스로 경험해 비참한 결과 로 인한 고통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아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것 자체가 악의 한 모습이지요. 죄는 피조물이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타락의 결과,  전적 부패
뉴스를 보면 온통 부패와 범죄 이야기 투성이라 괜히 봤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예술 작품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악에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고 주장한 평론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범죄가 선행보다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 속에는 온갖 악당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만큼 타락한 심성은 악에 매혹되기 쉽다는 뜻일 것입니다.
죄와 악에는 우주적 함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인류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이 하는 매사를 통해 온 세상에 죄악이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죄는 세상의 역사와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자연 만물에도 해를 미치지요. 인간 관계는 망가지고 일도 고역이 되었지요. 악은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영역으로도 번져 갔습니다.
그 사실은 오늘날 저속하고 퇴폐적인 내용이 쏟아져 나오는 영화와 가요만 보더라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도 대량 살상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기 십상입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비행기가 그토록 빠르게 발전할 수 없었을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세상을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는 과도한 개발과 낭비로 인한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이 가장 잘 보여 줍니다.
타락의 결과는 이토록 심각합니다. 세상에서 탁월하다 칭찬하는 모든 것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모습은 참담할 뿐입니다. 고도로 발전한 문화가 야만보다 오히려 더 악한 경우가 흔합니다. 사람이 늘어날수록 죄와 악은 더욱 깊고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얼마 안 되어 홍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지요. 세상은 죄악으로 스스로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아담과 하와가 본래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다는 점을 들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영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고통 없는 출산이나 노동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잔해를 가지고 비행기의 본래 모양과 기능을 알아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비행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하늘을 날았다고는 꿈도 꿀 수 없을 겁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든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몸은 정욕에 사로잡혔습니다. 새삼스레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인간관계는 불신과 서로를 탓하는 태도로 파괴되었고 모든 것이 망쳐졌습니다. 인간은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일반 은총과 세상의 소망
기독교 세계관을 갖는 것의 가장 큰 유익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다른 종교는 인생의 비참함의 심각성을 바로 보지 못하기에 죄와 타락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거나 본래적 결함으로 여깁니다. 선악의 이원론이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계몽사상은 교육의 부재로 인한 미신과 몽매가 원인이라 보고,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경제체제에서 악이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죄와 악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이런 문제들은 증상에 불과합니다. 비성경적 세계관은 악의 근원이 인간의 타락에 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죄악을 통해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타락으로 인해 세상이 즉시 심판과 종말을 맞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무산시키지 못합니다. 타락은 단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삶의 방향을 비틀어 놓았을 뿐입니다. 죄와 악은 선한 것을 망쳐 놓는 원리입니다. 그것은 창조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질을 바꿔 놓지 못합니다. 단지 선한 세상에 기생하면서 본래의 목적을 비틀어 왜곡시켜 놓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은 대개 90% 정도 진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살인자는 남을 해할 만큼 건강해서 일을 저지르고요. 이처럼 악은 선을 ‘비틀고, 오염시키고, 토막’ 냅니다. 매춘이나 동성애를 한다고 남자가 여자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악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성적 매력은 유지되지요. 죄악은 선을 잘못 사용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이 곧장 파멸로 치닫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나 보존하는 은총 말입니다. 환경 파괴로 인해 이상 기후가 맹위를 떨치는 중에도 사시사철이 한 치의 착오 없이 찾아오는 것은 창조주의 신실하신 은총 때문입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문화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망가져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엔 과연 소망이 있을까요? 인간의 타락상을 알수록 세상과 삶은 암울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고자 했던 세상이었지만, 이제 아무런 의미와 소망이 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자연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지만, 의미는 바래버렸습니다.
성경은 비록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해도 소망은 있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죄악으로 자멸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직후 즉각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시며 상황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악과 비참함을 외면하거나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몸소 세상을 찾아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은 힐문이 아니라 회개로의 초대였습니다. 죄인의 위치를 돌아보게 하시려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인간이 벌을 받아 에덴에서 쫓겨나고 죽음을 맛보게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습니다. 가시덤불의 땅으로 쫓겨날 인간들에게 무화과나무 잎새를 대신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를 위해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리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죄인이 된 인간의 수치와 연약을 가리기 위한 피 흘림은 장차 예수께서 행하실 궁극적 사죄의 제사를 예표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오로지 죄악 세상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습니다.

:: 필자 정보 - 신국원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Ph.D.). 저서로 《니고데모의 안경》,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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