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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통의 문제 3 고통의 렌즈로 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2017년 1월호

인류가 남긴 지혜 속에 고통의 문제는 인기 있는 주제이다. 특별히 서구 신학이나 철학에서는 고통이나 이 문제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어원적으로 신정론은 theos(하나님)와 dike(정당성)라는 두 그리스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즉, 문자적으로 신정론은 ‘하나님의 정당성’이라는 의미이다. 고통에 대한 질문은 인류의 역사에서 끊이지 않은데 비해, 신정론이라는 개념의 역사는 기껏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생전에 내어놓은 유일한 저서 Theodizee(1710)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어 Theodizee는 《신정론》으로도 번역하지만, 그 어원이 ‘하나님의 정당성’이기에 《변신론(辯神論)》이라 불리기도 한다.1
신정론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악의 현상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악의 기원을 신에게 돌리려는 시도에 저항하며 신의 정의와 선함과 권능과 지혜를 옹호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막상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인간인데, 왜 인간이 고통받게 내버려 두는 신을 변호해야 하는가? 관심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고난에 휩싸인 인간일 텐데, 왜 신이 고통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신학은 온 힘을 다하려 하는가? 자동차에 치여 다친 사람 앞에서 자동차 제조사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급 발진한 차로 큰 사고가 난 상황에서 무조건 제조사의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회사 측 변호사 역할을 신학자가 담당하는 것은 아닐까?
악이 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이려는 시도는 초대 교회부터 지속했고, (지난호에 살펴봤듯) 기독교 역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전적 논증의 패러다임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의 기원을 부분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다루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근대에 이르러 라이프니츠는 수백 쪽에 달하는 거대하고 정교하며 체계적인 철학적 논증을 남겼다. 이처럼 신정론이라는 단어가 주조되고 논의가 심화된 시기는 근대다. 신정론이 근대에 발달했다는 것은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근대 이전에는 신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세계 모든 일의 원인이라 믿었다. 반면 근대인은 과학 발전에 힘입어 세계를 정교한 수학적 법칙에 따라 이해하게 되었다. 태풍이나 화산 폭발, 흑사병 창궐 등 이러한 끔찍한 재해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세계가 열렸다. 병에서 치유되고 기후가 좋은 것이 신의 은혜가 아닌 자연의 운행으로 이해하는 시대가 왔다. 그 결과 ‘교양 있는’ 근대인은 과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역사의 주관자이자 섭리의 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기계처럼 스스로 잘 돌아가는 우주 안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와 자연에 개입할 여지가 점차 없어져 보였기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혁명적 수정이 요구되었다.
교회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자연 과학의 도전에 부딪혔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강조하던 시대정신에 발을 맞추어야 했다. 그 결과 신앙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변증’이 근대 신학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신정론도 이러한 변증적 필요에 응답하며 근대인에게 하나님을 옹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열정 이면으로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지게 되었다. 합리적 이론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주요 매체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 신학과 영성, 학문적 신학과 목회의 현장 사이에 괴리가 생겨났다.2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예리하게 관찰했듯 ‘신정론’이라는 근대적 담론이 형성된 시기에 근대 무신론도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3 무신론과 마찬가지로 신정론도 절대자에 대한 추상적 논리 체계가 될 위험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계몽주의적 합리성과 과학에 대한 낙관론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된 21세기에, 우리는 악의 문제에 진실하고 성실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 두 가지 요청에 충실히 반응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전통적 신정론처럼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일으키시지 않음을 보이면서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초래하는 파국적 결과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고통이 일으키는 문제의 복잡성과 실존적 성격을 논리의 유려함과 이론의 세련됨으로 해소하려는 욕망에 저항해야 한다. 이 두 도전 모두가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중요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부터 근원적으로 질문하며 문제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토마스 롱은 이러한 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근대 세계에는] 신정론은 악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바를 전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와 관련된다.”4

우리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인간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환난과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자 자연과 역사를 모두 동원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시는가? 비록 잘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고통의 자리에서 함께하시는가? 그것도 아니면 너무나 초월적인 분이라 인간의 고통에 전혀 무관하고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인가?
고통 속에 있는 신앙인을 무엇보다 힘들게 하는 것은 절대자가 고통의 순간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 같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다른 이는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은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분의 침묵 앞에 더 절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이 구절만큼 어려움 속에 있는 신앙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구절이 또 있을까?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예레미야 31:20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에브라임을]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 없이 헤매는 양처럼 고생하고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마 9:36).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ni,zomai)인데, 창자나 마음 등을 뜻하는 단어 스플랑크논(spla,gcnon)에서 나왔다. 인간의 고통은 이처럼 야훼와 그리스도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찐한 공감의 울림을 만들어 낸다. 달리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고 심지어 그 아픔의 무게를 함께 지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나 철학자가 하나님은 본성상 고통을 당할 수 없기에, 우리의 아픔을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신은 타자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자족적 존재’라는 독특한 전제가 깔려 있다. 서양 지성사에 큰 흔적을 남겼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신을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라고 불렀다.5 물리적 우주 안의 존재는 모두가 생성과 소멸의 운명한다. 달리 말하면 신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는 보이든 안보이든 움직이고 변화하는 중이다. 이러한 운동을 하려면 움직임을 일으키는 원인이 필요하기에, 세계는 움직임을 ‘일으키는 자’(the mover)와 ‘움직여지는 자’(the moved)의 인과관계의 복잡한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예로, 나는 〈목회와 신학〉의 원고 청탁으로 글을 쓰지만, 나의 저술 작업은 독자의 눈과 뇌를 활동하게 만들어 지식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나는 다른 누군가 때문에 움직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을 운동하게 만들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운동의 원인이자 결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이상 이러한 이중적 존재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 세계가 인과관계의 고리에 따라 움직이려면, 처음에 누군가가 운동을 일으켜야만 한다. 그 존재가 바로 신이다. 신은 이 세계 모든 운동의 원인이지만,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신이 운동한다면 그 배후에 운동의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는 신보다 더 근원적 존재가 신을 움직였음을 의미하기에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주 전체의 움직임을 일으킨 최초의 운동자, 즉 원동자(the prime mover)가 바로 신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 사고해 보면 신은 감정을 느낄 수 없고 고통도 당할 수 없다. 희로애락을 경험하거나 아픔을 느끼려면 외부 환경이나 타자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신은 다른 존재에게서 영향을 받거나 움직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고통을 당한다면 신 역시 이 세계의 여러 존재 중 하나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부동의 동자’로서 신 개념은 자연의 운동에 대한 설득력과 그 논리적 일관성 덕분에 고대 그리스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적 신 이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의 설명 방식은 세계 전체 운동의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궁극적 존재로서 신을 상정하면서도, 인간사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개입하던 신화적 신관을 극복했기에 당시로는 획기적 신관이었다.6 게다가 고통받는 존재가 과연 다른 존재를 고통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느냐는 구원론적 질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적 신관을 수용하는 주요 동력이 되었다.7
그런데 그리스도교에 이러한 신관이 들어오면서 감정이 풍부한 ‘성경의 하나님’과 감정이 메마른 ‘철학자의 하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고통이나 감정 등의 표현이 다 은유적이기에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8 그러나 이러한 입장도 역시 뭔가 의심쩍다. 하나님은 본성상 고통당하지 않지만, 인간들에게는 자신이 아파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거짓 소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실천의 영역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 이해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무감각한 신의 이미지는 고난이 없는 상태를 삶의 이상으로 상상하게 하고,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인간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세계 대전 직후 인류가 왜 이토록 폭력적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서구 사상에 깊숙이 박혀 있는 ‘부동의 동자’로서 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연계되어 일어나기도 했다.9 당시 활동했던 영국 신학자 윌리엄 템플은 ‘고통받지 않는 신’을 두고 우리 마음의 왕좌에 자리 잡은 파괴하기 가장 힘든 우상이라고까지 불렀다.10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하시는가라는 질문은 결국에는 삼위일체론적이고 기독론적 시각에서 성서를 읽어갈 때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세 인격으로 존재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11 사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정했던 인과관계가 아니라, 서로서로 자기를 내어주고 타자를 수용하는 상호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랑은 삼위일체의 세 인격 사이에서 가장 풍성하고 온전히 드러난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고 사랑하셨다는 것은(요 1:3, 3:16), 그분과 세계의 관계가 인과율로 환원될 수 없는 다채롭고 심오한 인격적 속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실 정도로 자신을 세상과 단단히 묶으시는 분이다. 성부는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시며 역사 속에서 그들의 아픔을 나누셨다. 성자는 인간의 연약한 몸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배척당하고 배신당하고 누명을 쓰고 버림받고 채찍질 당하다 결국 십자가에서 몸이 부러져 죽음을 맛보셨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함께 탄식하며 친히 피조물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 분이시다. 이처럼 영원하고 전능한 절대자가 세계의 고통에 마주하고, 그 아픔을 인내하고, 비극적 운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고통당할 수 없는 존재의 고통이라는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자리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구절에서 육신으로 번역된 사르크스(sa,rx)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혹과 아픔을 느끼는 몸을 의미한다. 성육신하심으로써 성자는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신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기 본성의 정반대까지 경험하는 극단으로까지 자신을 내몰았다. 즉, 영원이 죽음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영광스럽게 변모한 몸에는 여전히 못과 창 자국이 있었다. 영원한 존재에 인간이 겪는 고통의 흔적이 새겨진 것이다.12 나사렛 예수가 영원한 성자라는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도 인간의 아픔과 고난을 품을 수 있는 신비로운 자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통은 신앙 없이 관찰하거나 경험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고통당하는가?
삼위일체의 한 인격인 성자가 성육신하여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은 삼위일체 안에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고통이 놓였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고통의 파괴적 힘은 구원론적이고 창조적 힘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생겼다. 성자가 성부께 순종하셨고 고통을 당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고통 역시 타인의 삶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골로새서 1:24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물론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우리의 고통으로 보충되어야 할 정도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서 우리의 고통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세계의 화목(골 1:20)을 교회를 통해 증언하고 역사 속에서 현실화하면서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를 위한 대리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13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복음이 선포되게 하고 하나님의 화해 사역이 이 땅 곳곳에 이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 중 하나는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우주적 지평을 갖는 사실이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 죄만 사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요일 2:2, 고후 5:19, 골 1:20 등 참고). 그렇다면 우리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은 불신자의 회심과 교회의 선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를 위한 도덕적 회복과 사회적 변화까지 그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와 오늘의 현실을 변혁하는 대표적 예이다.
그리스도인의 ‘대리적 고통’의 힘과 가능성이 잘 응축되어 드러난 사례가 바로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이다. 미국에서 비폭력 평화 시위로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고통이 가진 구원론적인 의미를 꿰뚫어 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간디에게서 배운 비폭력 평화 사상이 가진 변혁적이고 도덕적 힘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비폭력 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지 평화롭게 나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상대가 폭력을 가하고 모욕을 하더라도 이를 인내하고 참아내며 이로써 “상대편의 도덕적 수치감을 일깨워내는” 것이자, 비폭력적 수단을 통해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14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킹 목사는 인종 차별로 흑인들이 겪는 아픔과 치욕 그리고 백인들이 직접 가하는 폭력을 증오와 폭력으로 되갚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교회가 테러를 당하고, 집이 폭파되고, 본인이 습격당하고, 가족의 안전이 위협당하고, 여러 번의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평화와 선을 위해 감내하는 “고통은 자체에 어떤 도덕적 속성을 포함하지만 강력하고도 창의적 힘이 될 수도 있다”15라고 그는 믿었다. 비폭력 투쟁에 참가한 이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징벌적 정의 대신 자발적으로 아픔을 겪음으로써 고난의 구속적 힘이 역사 속에 흐르게 하고자 했다. 흑인들이 차별과 폭력에 보복하지 않고 고통 받기를 선택하자, 점차 미국 사회는 흑인 인권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반면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자 사이에서는 비폭력 저항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커졌고, 결국 킹 목사는 암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미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한 단계 나아가며, 흑백 분리와 인종 차별의 상황이 개선되는 데 지대한 이바지를 하였다. 그의 고통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상상력을 일깨웠고, 더욱 많은 사람이 더 존중받는 현실을 이루는 창조적 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통 면제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대리적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사회가 생각처럼 변하지 않고 본인과 주위 사람에게 고통이 더욱 커가자, 분명 킹 목사 자신의 마음에도 증오가 쌓일 수 있었고 체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화 시위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장 헤럴드 페이(Harold Fey)는 킹 목사가 겪은 테러와 수모가 분명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텐데, 왜 자신의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킹 목사는 ‘고통과 믿음’이라는 글로 응답했다. 그 일부를 인용해 보겠다.
 
나의 고통이 점차 쌓여가자 곧 나는 내 상황에 반응하는 길이 두 가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고통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 혹은 고통을 창조적 힘으로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고통을 당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나는 고통을 덕으로 변모시키려 애써 왔다. 고통의 쓰라림에서 나를 건져내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적 어려움들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현재 비극적 상황에 부닥쳐 있는 사람을 치유하는 기회로 보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이유 없이 겪은 고통이 구속적인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왔다.16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의미를 십자가의 구원 사건을 통해 보는 이들이다. 물론 인간이 고통을 겪고 그것을 인내하는 것은 어렵고 불쾌한 일이다. 그렇지만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 이면에 삶의 안락과 안정성을 주요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의 강박감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현대인이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과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17 자기를 신처럼 자족적 존재로 만들려는 현대적 망상에 치명적 균열을 내는 것이 고통이라면, 하나님을 만물의 주로 고백하는 이에게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 없이 삶을 안정적으로 꾸려가려는 교만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응답은 무엇일까?
앞서 고통을 삼위일체 신앙의 빛에서 볼 때 고통의 창조적이고 구원론적 의미가 드러남을 살펴보았다. 이뿐 아니라 고통을 삼위일체론과 연계할 때 우리는 중요한 ‘실천적’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심으로써 악의 문제를 다루셨다면, 그리스도인 역시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아파함으로 악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화해를 이야기한 후 그가 제시한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연민을 가지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시공간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마련해 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웃을 위한 마음의 여유가 없이 분주하고, 슬픔마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단 당하는 사회에서 공감과 애도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흔히 우리는 연민을 인간이 가진 여러 감정의 하나로 축소해서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연민, 동정, 공감, 감정이입 등의 단어가 섞이면서 각각의 의미가 혼동되곤 한다. 학자마다 이러한 개념들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연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자.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연민은 행동적 차원과 정서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18 구약에서 연민을 표현하고자 쓰이는 단어와 여성의 태반을 의미하는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창 49:25; 잠 30:16 등).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관계가 배 속의 아기와 탯줄로 연결된 산모의 이미지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처럼 구약에서 연민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연민을 가져야 할 근거다(신 4:31; 눅 6:36).
신약의 하나님은 더욱 분명하게 연민의 하나님으로 제시된다. 연민의 하나님께서 육신을 취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위로자이자 벗이 되어 주셨고(마 9:36; 14:14 등), 제자들에게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가르치셨다(마 5:43-48; 눅 10:30-37 등).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들도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라고 권면한다(엡 4:32; 골 3:12; 요일 3:17 등). 이처럼 성경에서 연민은 단지 주관적 감정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 존재의 울림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깊이 참여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자, 구원의 중요 요소인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imitatio Christi)의 대표적 예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이전 시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독립성과 자율성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낯설어지는 고립감 또한 크게 느끼고 있다. 개인은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분리된 채, 약육강식의 경쟁에 내몰리며, 폭력과 쾌락에 길들고, 주관적 감정에 중독되어 있다. 이런 때일수록 타자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더욱 요구된다. 상대의 감정을 상상력을 통해 자기에게로 옮겨올 수 있는 공감 능력, 눈물 흘리는 이웃을 껴안고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는 연민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에게 주신 귀하고 중요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의 문제를 다룰 때 애도(grief)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주제이다. 너무나 큰 고난을 겪는 사람, 특히 상실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애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애도란 슬픈 감정보다 더 심오하고 쓰라린 그 무엇이다. 심지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상태를 C. S. 루이스는 아내를 잃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누구도 내게 애도가 공포와 같이 느껴진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무섭지 않다. 그렇지만 무서운 것과 유사한 감정을 가진다. 두려울 때처럼 위 속이 뒤집히고, 안절부절못하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다. 나는 계속 침을 삼키게 된다.”19
이처럼 애도는 극심한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감정과 표현의 불규칙성과 격렬함 때문에 다른 이의 이해나 공감을 쉽게 끌어내지 못하기도 한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은 슬픔의 상태에서 벗어나 빨리 ‘정상’ 생활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며 애도를 비정상적인 상태이거나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감정인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에 대해 아주 중요한 통찰을 남겼다.20 ‘애도’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기에 그 현상이 아무리 극렬할지라도 특별한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하고 깊이 슬퍼하게 되면 시간은 걸리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면 상실의 후유증으로 외부 세계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가 ‘우울증’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그것은 바로 실패한 애도가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자는 애도와 우울증을 프로이트처럼 나누어 개념화하지는 않지만, 애도에는 충분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거의 반대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애도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신다는 의미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이 자아내는 분노와 좌절과 우울을 인내하시며 애도의 기간을 충실히 통과하도록 묵묵히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마법 같은 하나님의 개입을 원할 때도, 사람들이 슬픔에서 우리를 억지로 건져내 일상으로 복귀시키려 노력할 때도 침묵 속에서 그분은 우리 아픔을 껴안으시며 우리 존재를 지탱하신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애도의 과정에 대한 생생한 보고이다. 상실로 인한 극도의 비통함에 압도되고, 아들이 죽었는데도 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못 이겨, 결국 그는 자신의 날이 선 감정의 칼끝을 신에게로 향했다.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살아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21

그러나 하나님은 무감정의 하나님, 부동의 동자가 아니셨다. 다시 밥을 먹고, 산책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손자와 사진 찍는 상상할 정도로 그가 치유될 때까지 하나님은 묵묵히 욕받이 역할을 해 주셨다. 2000년 전 인간의 죄를 위해 모욕당하셨던 분은,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를 위해 지금도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다.
역사가 흐르는 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힐 것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우리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서 악과 고통에 대해 진실하고 신실하게 대응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충분히 애도하게 하는 실천적 지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악과 고통의 현실 앞에서 선험적으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우리 아픔을 더 잘 아시고, 그 고통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를 넘어선 희망의 근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1) ?한국어 번역으로 다음을 참고하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이근세 옮김 (파주: 아카넷, 2014). 

2) ?근대 신학에 일어난 신학과 이론 사이의 분리에 대해서는 Sarah Coakley, “Re-thinking Gregory of Nyssa: Introduction?Gender, Trinitarian Analogies, and the Pedagogy of the Song,” Modern Theology 18:4 (2002): p.431 이하를 참고.

3) ?Stanley Hauerwas, Naming the Silences: God, Medicine, and the Problem of Suffering (Edinburgh: T & T Clark, 1993), pp.40-42.

4) ?토마스 G. 롱, 《고통과 씨름하다: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장혜영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p.37.

5) ?Aristotle, Metaphysics, 1072b 25.

6) ?Etienne Gilson, God and Philosoph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9), pp.32-33.

7) ?Herbert McCabe, “The Involvement of God,” New Blackfriars 66 (1985): pp.464?476.

8) ?Anselm of Canterbury, Proslogion, p.8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감정에 대한 성서 구절을 은유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은 신구약 중간기 때부터 발견된다.

9) ?Francis House, “The Barrier of Impassibility,” Theology 83 (1980): pp.409-415.

10) ?William Temple, Christus Veritas (London: Macmillan, 1924), p.269.

11) ?몰트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고통을 당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34-81.

12) ?부활한 그리스도의 없어지지 않은 상처에 대한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론을 전개해 나간 다음의 예를 참고하라. Hans Urs von Balthasar, Does Jesus Know Us? Do We Know Him?, trans. Graham Harrison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3), p.51.

13) ?교회의 대리적 사명과 기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디드리히 본회퍼, 《성도의 교제: 교회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 유석성·이신건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pp.138-139.

14) ?John Dear, “What Martin Luther King Jr. Can Teach Us about Nonviolence,” (2012.01.17.)  https://www.ncronline.org/blogs/road-peace/what-martin-luther-king-jr-can-teach-us-about-nonviolence (2016. 11. 25. 최종접속)

15)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채규철·서정렬 옮김 (서울: 예찬사, 1987), 53. 마틴 루터 킹의 고난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에서 통찰을 빌려왔음. 김기현,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개정판)》 (서울: 복있는 사람, 2016), pp.246-249.

16) ?Martin Luther King, “Suffering and Faith,” Christian Century 77 (April 1960): pp.510.

17) ?마크 코피, 《스탠리 하우어워스: 시민, 국가 종교, 자기만의 신을 넘어서》 한문덕 옮김 (서울: 비아, 2016), p.37.

18) ?W. L. Walker, “Com-passion,”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 W. Bromile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79), pp.755.

19) ?C. S. Lewis, Grief Observed (London: Faber & Faber, 1961), p.7.

20) ?지그문트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5), pp.243-265.

21)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서울: 세계사, 2004), p.36.

 

:: 필자 정보 -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D.Phil.). 저서로 The Spirit of GOD and Christian Lif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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