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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적 교회
- 2017년 9월호

지난 7월 31일-8월 4일 “다음 세대 제자선교”를 주제로 하는 제8차 JDM(예수제자운동, 대표 김금찬 선교사) 선교대회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열렸다. JDM은 ‘만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는 비전으로 제자훈련과 세계복음화에 힘쓰는 복음주의 선교단체다. 17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번 세계선교대회에서는 주제강의, 성경강해, 선택식 강의를 비롯해 선교박람회 및 각종 선교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이번 대회 주 강사로 참여한 풀러신학교의 찰스 벤엥겐(Charles E. Van Engen) 교수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네덜란드계의 미국 이민자 후손으로, 멕시코 선교사인 부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보냈다. 청소년 시절 미국으로 돌아와 미시간에 있는 호프칼리지와 풀러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12년간 선교사로 사역했다. 1977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선교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5년부터 2015년까지 풀러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로서 선교의 성서적 기초와 라틴 교회의 선교신학을 가르쳤다. 인터뷰 내내 그는 선교사 출신 학자로서 교회와 선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했으며, 현실적인 제안을 하는 현장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의 저서 중 《미래의 선교 신학》,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가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8월 3일 원주에서 찰스 벤 엥겐 교수를 만났다. 진행 스티브 차 편집장 · 정리 이동환 기자 · 사진 정화영 기자 선교적 교회론의 정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개혁주의는 “교회는 그 성도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그 자체”라는 관점을 가집니다. 거기에 더해서 “이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라는 것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 건물, 신학교, 전문 성직자가 아닙니다. 핍박받는 환경에 처하면 이런 것들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할 때,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관점에서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는 어떤 형태일까요? 성경은 의도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교회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형태는 상황과 현지 문화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물이 되어야 합니다. 12-13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책의 핵심이 세계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길 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들이 생겨났고, 특히 가톨릭과 오순절파 교회들에서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현상이었지요. ‘선교적 교회 운동’에도 힘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저는 폴 히버트(Paul Hiebert), 조지 헌스버거(George Hunsberger)와 함께 선교적 교회 운동의 초기 멤버입니다. 이 운동의 긍정적인 결과는 ‘선교적 교회’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적 교회 운동의 방향성에 불편을 느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선교적 교회 운동이 60년대 회중선교운동을 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회중선교운동은 대도시 지역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필요에 그들이 어떻게 응답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 회중선교운동은 사회적 아웃리치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운동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60년도에 이미 실패한 형태입니다. 두 번째는 선교적 교회 운동 초기에 출간된 관련 서적들이 대부분 사회적 측면에 집중하고, ‘회심’과 ‘전도’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문화 속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폴 히버트도 지적했지만 당시에는 ‘문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단수의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복수로 ‘문화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시에 다양한 문화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조차도 다양한 문화 속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선교적’이라는 단어가 너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저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단어가 ‘갱신운동’(renewal movement)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미셔널 음악 프로그램’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에 대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선교사의 자녀로 남미에서 성장한 후 선교사로 10년 이상 사역하셨습니다. 남미 지역에는 오순절파 교회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미의 오순절파 교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남미 교회의 80%가 오순절파 개신교입니다. 이들은 강한 전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서서히 선교적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10%에 이르는 남미의 전통 개신교 교회들은 교회를 제도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는 선교적 교회와는 상반되는 경향입니다. 대개 이런 교회들은 중상위층 백인의 개신교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제가 자랐던 멕시코 남부의 장로교회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복음주의적 설교와 운동으로 사람들이 회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회심자가 주님과의 새 관계를 시작하고 성령께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내어 드리는 부분이 부족했습니다. 레슬리 뉴비긴도 이런 부분을 지적합니다. 오래된 주류 교회에는 이런 연약함이 있으나,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중상위층 백인 중심 개신교회의 성향입니다. 해외 사역자들이 한국에서 배운 것을 자기 나라에서 적용해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 문화에서 벗어나 교회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저는 이번 JDM 선교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역 보고를 한 선교사들이 자기 선교지 문화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는 점에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는 민족이나 국가에 관계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행전 2장과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나타난 유대인 교회, 이방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두 교회 모두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교회로 질적으로 매우 유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인 교회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도를 인정하며 교회 본질에 충실한 결정을 합니다. 이로써 복음은 유대인의 범주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상황화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유대인만의 것에서 이방인의 교회로 확대됩니다. 당시 이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이슈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갈등을 경험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모국어를 사용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는데, 이는 성경 번역자들이 사용하는 인류학적 기초 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국어를 통해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최고의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제가 살았던 멕시코 남부는 5가지의 마야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그곳의 교회들은 지역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온전히 상황화되어 있습니다. 즉, 개혁주의 성향을 가진 장로교회이면서 동시에 마야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차이와 거기서 오는 갈등은 선교적 접근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민 교회뿐 아니라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세대 간의 문화 차이가 극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언어를 쓰지만, 다른 세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 의사소통 방법, 편안함을 느끼는 상황이나 부분 등이 서로 다릅니다. 만약 기성세대 중심의 교회라면 차세대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문화적인 교회가 되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하나의 문화가 지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의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든지, 스스로를 적응시킵니다. 다름으로 인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미국 대도시의 다문화 형태 교회와 관련이 있는데, 교회 안에는 2가지 문화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2가지 문화만 존재할 경우, 둘 사이에는 반드시 갈등이 생깁니다. 최소한 3가지 문화가 있어야 하며, 약 5가지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들이 존재한다면 더 좋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오히려 공존하기가 쉽습니다. 두 번째로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권력 분담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에 대해서 서로 논의해야 합니다. 특정한 한 무리가 건물을 소유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교회 내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LA에 위치한 다문화 교회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이런 종류의 갈등을 상담한 적이 있는데, 저는 종종 그분들, 주로 리더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교회 건물의 소유자는 누구입니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건물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예수께서 주인이십니다. 성도들 중 그 누구도 교회 건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도달해도 그들은 스스로 권력을 분담합니다. 많은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애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 경제, 교육, 과학이 변화하는 과도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첨단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대, 기술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 간에 핵심 가치관의 차이는 과거에 비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60년대 우리가 겪었던 세대 차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지금 저와 저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 다른 모습니다. 저는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세대 간의 문화와 가치의 차이를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를. 이 차이를 이민 교회의 상황에 반영한다면 더 복잡해집니다. 가령 LA 중국계 이민 교회의 세대 차이를 도식화한다면, 1세대는 중국어 사용자, 2세대는 영어 사용자입니다. 3세대는 자신의 조부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4세대는 모국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여행을 갑니다. 만약 간소화된 이 3개 세대(60대, 30-40대, 10-20대) 간의 차이가 크다면 복음을 재상황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 나눔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모든 세대가 자신들의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권력의 분담이 있어야 합니다. 60대 성도들이 세운 교회의 모습 그대로를 젊은 세대들이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10-20대 성도들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만약 60대 세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면 10-20대 성도들은 결국 모두 떠나버리거나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교회를 세워나갈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의 스타일은 리더십, 가치, 비전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대 간의 차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은 각기 다른 3가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름을 진정한 다문화적 교회로 거듭나기 위한 원동력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10-20대에게 교회를 넘기고 그들이 운영할 수 있게 하고, 45세 이상의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즐기라고까지 말합니다. 저와 같은 세대들은 교회에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는 언어와 인종 간의 문화적 차이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세대 안에서 리더들을 한데 모아 몇 시간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을 제안합니다. 만약 이 모든 세대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면, 권력 분담, 존재 목적과 방향성에 대한 공통의 비전이 공유되어야 합니다. 한국에 약 200만 명의 외국인 거주자들이 있습니다. 무슬림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복음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교회는 이 이슈들을 사람들과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이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지를 인식하는 선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현재 서유럽도 동일하게 경험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코펜하겐대학교에서 이런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도 이것은 정치적으로 큰 이슈였습니다. 전 세계가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관용을 베푸는 일에 대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통된 인간성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 사람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를 파키스탄 사람으로 인식하기보다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는 이민자가 아니라 같은 인격체이고,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 구성원입니다. 개인의 지각이 불러올 수 있는 변화는 실로 엄청납니다. 세 번째로 이민자들에게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려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세계 곳곳으로 사람들을 보내 주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또한 각 나라에서도 사실 이민자 또는 외국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의 거주를 허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기생충이 아니라, 기여자들로 여기면 어떨까요? 그들이 한국에 주는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생각 이상으로 많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과 우정을 나누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가고 우정을 나눠야 합니다. 이민자들 중에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유럽으로 이민을 간 남미인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큰 이슈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더 깊은 남미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그곳에 보내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들 이민자들은 교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 가능하다면 다음 단계로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저 어디든 가서 이 모든 것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 필자 정보 - 찰스 벤 엥겐, 스티브 차
찰스 벤 엥겐 풀러신학대학교 교수, 스티브 차 <목회와신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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