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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하나님의 소환과 은혜에 대한 역동적 응답, 소명 오스 기니스
- 2017년 4월호

‘소명’(calling)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박사님은 소명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소명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정의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소명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오해는 소명을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회자, 선교사, 전도사와 같은 기독교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소명은 1차 소명과 2차 소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차 소명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통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첫째, 관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차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재능, 환경, 인적 자원을 주십니다. 이는 각자에게 주신 타고난 재능, 문화적 자원, 사회적 관계를 극대화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은사에 대한 강의에서는 다양한 은사의 종류와 기회에 대해서 소개하지만, 많은 경우 은사가 교회 내적인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사의 아버지 유세비우스는 기독교인을 ‘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과 ‘영적인 은사를 받지 않은 평신도’로 나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때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영적 은사를 받은 성직자만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 은사와 상관없는 평신도는 소명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타고난 재능은 소명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은사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도 중요합니다. 제 장인의 재능은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자동차를 잘 고칩니다. 못 고치는 차가 없습니다. 저는 자동차는 못 고치지만, 생각하고 말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재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장소가 하나님을 위한 장소가 될 수 있고, 어떤 일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직장 같은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직장과 교회를 오가지만 서로 단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 성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소명과 관련해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했습니다.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의 소명 의식을 일깨웠습니다. 구두 수선공이 구두를 수선하는 것을 성직자가 예배를 집례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성직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중요성을 일깨운 결과, 그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소명 의식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태도를 갖습니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인구의 2% 정도를 차지하는 유대인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칩니다. 2% 미만의 집단인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Queer)가 활발한 활동으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반면, 인구의 70-75% 이상을 차지하는 기독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주님의 소명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이 소명과 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가톨릭은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직접 관계 맺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설’입니다. 모든 성도가 소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귀족사회였던 유럽과 같은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말합니다. “만약 들판의 농부와 집에 있는 그의 아내가 자신의 일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한다면, 그 일도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자의 영적인 직무와 같이 거룩한 것이다.” 소명 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에 대한 높고 낮음,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 의식이 회복될 때, 교회는 주님께서 부르신 대로 빛과 소금으로 세워지고, 교인들의 삶을 통해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박사님께서는 미국에서 트리니티 포럼과 같은 모임을 이끌며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소명 의식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좋은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 의식을 따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트리니티 포럼에서 영국의 영웅이자 훌륭한 사회개혁가인 윌리엄 윌버포스를 소개합니다. 그는 24살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이후 목회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성직자였던 존 뉴턴은 그에게 “당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지를 다시 간구해 보라”라고 조언했습니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인 윌버포스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역사상 가장 대담한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이것은 영국뿐 아니라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두 가지 큰 과제를 주셨다. 그것은 노예 무역 폐지와 나쁜 관행의 개혁이다.” 정치가 윌버포스가 감당하기 원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결과,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기업의 경영자였던 아서 기니스는 직원들에게 좋은 서비스와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이런 기업 문화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정착시켰습니다. 직원을 배려하는 그의 경영 방식은 더블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경영자로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소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소명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직자가 행하는 영적인 일이 자신이 삶의 터전에서 행하는 세속적인 일보다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회계 장부 앞에 있어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도,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강대상 위에서 설교하는 일만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윌버포스와 같은 소명의 사람을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목회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훈련할 수 있을까요?
목회자가 성도를 소명의 사람으로 양육하려면 첫째, 소명에 관해 설교해야 합니다. 미국의 많은 설교는 영적인 부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승자에게 복이 있다’, ‘유명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설교’란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공동체를 변화시키려면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설교가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둘째, 자신이 목회하는 성도들의 소명을 다루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성도들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 가운데 몇 명이 교사이고, 주부이며, 회사원이고, 자영업자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 교회에서 가장 소외된 두 집단이 있습니다.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사업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그 누구도 그들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미국 교회 목회자들은 결혼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이와 관련된 설교를 하는 것에 능숙합니다. 결혼문제에 대한 고충을 듣고, 훌륭하게 부부 상담을 해냅니다. 또한 결혼문제에 대한 다양한 실례와 적용을 생각하며 훌륭하게 설교를 합니다. 하지만 사업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사역에 변화를 주는 목회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의 경우, 일 년에 두 차례 워싱턴 D.C를 방문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넓히고, 그들을 소명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도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들의 소명과 기독교인들의 소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일이라는 단어를 소명이란 단어로 대체하기를 좋아합니다. 힘든 일, 고된 일 또는 의미 없는 일을 할 때도 여기에 소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소명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들의 소명에는 ‘부른 이’(the Caller)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진정한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소명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직업적 소명’(vocational calling)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말입니다. 영어 calling은 앵글로색슨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고, vocational은 calling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직업적 소명(vocational calling)이라고 말하는 것은 ‘calling calling’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직업과 관련된 소명’(occupational calling)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용어를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소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혼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자신이 잘하고 원하는 일’과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과 관련해 스위트 스폿(sweet spot)을 찾으면, 100%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구나 고용이 불안한 시기에 소명에 합하는 직업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사도 바울에게 연봉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 천막을 만드는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면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사도라는 소명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직업의 유무가 소명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은퇴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은 영원합니다. 

:: 필자 정보 - 진행 스티브 차 편집장 · 정리 이민구 기자 · 사진 정화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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