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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현대 문화와 성도, 그리고 목회적 돌봄에 대하여
- 2017년 9월호

1997년 당시 필자는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 중이었다. 당시 수강 과목 중 하나였던 목회 현장 실습의 일환으로 한 학기 동안 도심에서 떨어진 작은 타운의 중심가에 위치한 감리교회를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오랜 세월 지역교회에 몸담아 온 백발의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이었다. 교우들 대다수가 그의 리더십에 만족해하는 은혜 넘치는 분위기의 교회 목회자였다. 나는 한국 교회와는 다른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교우 심방은 한국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달랐다. 담임목사는 성경책과 찬송가도 없이 빈손으로 예정된 가정을 방문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차를 마시며 성도의 개인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 방문하는 가정마다 서로 다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경우, 부부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 일터의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 등 다양했다. 목회를 하다가 중단한 상태에 있던 목회자 가정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한참 동안 대화가 이어진 후 담임목사의 인도로 함께 기도하고 집을 나왔다. 심방 횟수가 거듭될수록 지역과 문화는 달라도 삶 가운데서 겪고 있는 문제들은 유사하며, 목회자의 인격에 기초된 목회자에 대한 성도의 신뢰가 심방을 통한 목회 돌봄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 중심의 심방에 익숙한 필자는 마치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분위기의 심방 같지 않은(?) 심방에 당황했다. 거기에는 예배 형식도, 찬송 소리도, 심방 대원들도 없었다. 하지만 심방을 하면 할수록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신뢰와 격려의 교감, 즉 자연스런 목회 돌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폭발적인 교회 성장의 신화를 뒤로하고 이제 한국 교회는 급성장의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다. 교회 성장 시대에 교우들은 너도나도 목회자의 심방을 원했다. 특히 규모가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심방을 요청하거나 원하는 교우들의 수가 급감했다. 이제는 일부 노년층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목회자가 적극적으로 심방을 가려고 해도 성도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피하기 일쑤다. 오늘날 성도들은 왜 더 이상 목회자의 심방을 원치 않게 되었을까? 이는 단순히 성도들의 믿음이 식었다거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거나,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는 등의 이유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맥락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 IMF를 극복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인해 빈부 간 격차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오늘날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 경향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동안 교회 사역의 상당 부분이 여성들의 주도로 이루어져 온 것을 감안하면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 진출 경향은 교회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은 단지 심방 사역의 축소뿐 아니라 구역이나 셀 모임, 성경 공부와 다양한 봉사 사역 및 수요예배나 금요기도회의 축소와도 직결된다. 아무리 목회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해도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교회의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많은 목회자가 주중 사역의 상당 부분을 폐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한편 수도권과 지방권의 격차 심화로 인해 수도권 소재 대학들의 입학 경쟁률이 더욱 높아졌고, 이런 경향은 초등학생들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기현상을 낳았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와 기업들의 고용 불안은 청년들로 하여금 더더욱 현실 문제에 집착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현상이 모두 목회 사역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영적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있는 현대 사회에서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한국 교회의 이타적인 구호는 이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상태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현실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금 수저로 태어나지 않는 한, 공부해서 남 줄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기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청년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탈근대 문화의 영향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전에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이슈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동성애와 혼전 동거 및 이혼 등에 대한 과거의 부정적 입장이 최근 들어 상당 부분 수용적인 분위기로 전환되고 있다. 한류의 영향과 글로벌 기업의 확장으로 인해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연장된 반면 안락사와 줄기세포 연구로 대표되는 생명윤리 문제와 노인 문제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이전 시대에 당연시 여겨졌던 이슈들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교인의 의무로서의 십일조의 폐지 여부, 목회자 사례비, 교회 밖 봉사를 위한 헌금 사용, 목회자의 목회활동비의 투명성, 교회 내 시설의 상업적 사용의 허용 여부 등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외에도 목회자의 이중직, 목회자의 목회지 이동, 목회자 청빙 과정과 절차에 관한 사항,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관계, 담임목사와 장로의 관계, 은퇴목사와 후임목사의 관계, 도시 교회와 농촌 교회의 상생과 협력 방안, 교회와 교단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처 방안, 교회의 정치사회적 참여에 대한 입장 등 다양한 이슈가 제기되고 있다. 목회적 점검과 재교육의 필요성 이와 같은 교회 내외에서의 맥락 변화는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즉, 현재 중진 목회자들이 신학 훈련을 받을 당시에는 대두되지 않았던 새로운 이슈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됨으로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이 곧 목회자가 정기적인 재교육을 받아야 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재교육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스스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의 경우는 더욱 그런 경향을 보인다. 신학적 평가를 통해 자신이 수행해 온 목회를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평가받지 않는 목회자의 목회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다. 새 천년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국 교회의 차세대 주자로 여겨지던 목회자들 중에서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결국 자신이 이룬 ‘목회적 성공’이라는 착각이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는 퇴보의 길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목회자가 수행하는 목회 돌봄 영역에서도 이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신학 훈련을 받을 당시 전통적 의미에서의 심방과 개인 상담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을 받고 이를 목회 현장에 적용한다. 그러므로 목회 돌봄과 관련된 이해는 주로 심방 및 개인 상담과 연관되어 있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거에 비해 심방이나 개인 상담을 요청하는 성도들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살펴본 사회적 맥락의 변화 이외에도 이 질문은 목회자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과 직결된다. 목회자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각 영역이 세분화되지 않은 이전 시대에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공적 예배를 집례하고 심방을 하는 것만으로도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었다. 사회가 분화되지 않은 시대에 성도들이 직면한 문제들은 현 시대에 비해 비교적 단순했고 목회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영역별로 매우 세분화·전문화 되어 있다. 같은 직장에서도 동료의 직무를 정확하게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런 시대에 목회자가 전문화된 각 영역의 이슈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전문화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이슈에 대해 조언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이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성적 논의보다는 절대자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 현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감성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과거 논과 밭에서 농부의 일을 함께 거들며 농사일을 하는 농부의 마음을 공유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이 시대의 변화된 목회 환경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현 시대 목회자는 성도의 상황과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공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 성도의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기도하는 매개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인다. 오늘날 일터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민과 윤리적 이슈들에 대해 이성적이고 전문적인 대화를 통해 성도의 심경을 충분히 공유하고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하는 목회자의 역할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성도의 깊은 고뇌와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목회자에게 자신의 문제와 고민을 털어놓고 진지하게 상담하려는 성도는 흔치 않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들과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다른 인간 종으로 목회자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제 목회자는 단지 신학 훈련을 받고 목사로 안수받았다는 사실, 지역 교회에서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일정 부분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사실 등의 외적 표식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일하는 성도들과 깊이 교감하며 성도들의 감정과 영적 고민을 목회자가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이 바로 오늘날 목회자가 ‘목회 돌봄’이란 차원에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지위와 권위의 변화 굳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 교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폭발적인 성장을 향유하던 시절에서 급격한 정체와 감소의 상황에 직면해 한국 교회 전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다. 급격한 성장 시대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다양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제 목사라는 타이틀 하나로 존경받고 대우받던 시대는 급격히 저물고 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목회자들로 인해 목회자는 더이상 영적 지도자가 아닌 교회라는 직장에 고용된 월급사장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이미 우리 앞에 도래해 있다.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수백 통의 지원서가 제출되는 상황은 이런 현실을 실감하게 한다. 과연 이 시대의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인가? 아니면, 성도들의 소원 성취를 도와주는 ‘영적 매개자’인가? 목회자는 누구나 영적 지도자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영적 권위가 하락할수록 목회자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는 영적 매개자의 역할 수행에 충실하게 된다.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영적 매개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리화하는 목회자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영적 권위를 상실해 가는 이 시대 한국 목회자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교회 성장 시대에 목회자의 목회 돌봄은 성도들의 사회적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목회자마다 사회 주변부에 있던 성도들이 사회의 중심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을 쏟았다. “잘 믿으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성공과 신분 상승을 획득한다!”는 논리가 교회 성장 시대의 한국 교회에 깊이 각인되었다. 우리 사회에 중산층이 급격하게 증가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회사에서 승진을 했다든지, 사업에 성공했다든지 등의 간증들이 교회마다 쏟아져 나왔고 이는 모두 목회자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성도들을 위한 목회자의 기도가 그들의 사회적 신분 상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교회 정체 및 감소 시대를 맞이한 현 시대에 완전히 바뀌었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는 급격하게 하락한 상태에 있다. 목회자의 권위가 하락하자, 장로 그룹이 지역교회의 새로운 권위자로 부상했다. 이전 시대에는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목회자의 평생 목회’를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인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위임받은 목회자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현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있다. 이런 인식은 결국 목회자의 권위 하락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던 목회자의 권위가 이제 지역교회의 장로 그룹으로 그 권위가 이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어떤 목회 돌봄을 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목회 돌봄은 목회자와 성도 간의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목회 돌봄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여건 가운데 있다. 영적 권위가 하락한 상태에서의 목회 돌봄이란 주로 성도들의 소원 성취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사사기 17장에는 미가가 한 레위인을 자기 가정의 제사장으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삿 17:13). 여기서 미가에게 제사장은 단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도구적 존재로 여겨질 따름이다. 목회자에 대한 이러한 미가의 인식은 교회 성장 시대에 습득한 한국 교회 성도들의 목회자에 대한 인식과도 유사해 보인다. 그들에게 목회자는 단지 자신들이 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도구적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목회자를 수단으로 여기는 성도들의 이런 인식은 목회자의 영적 권위가 인정받던 과거에는 목회자 의존적 신앙을 강화했지만, 목회자의 영적 권위가 하락한 현재에는 언제든지 다른 목회자로 교체할 수 있다는 성도들의 교만으로 나타난다. 한때 목회자는 성도들의 성공과 행복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영적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이제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쟁취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보조자로 규정하고 목회자를 통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급성장의 이면에 놓인 한국 교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목회적 돌봄과 역할의 변화 성직자가 신도들에게 행하는 목회 돌봄은 삶에서 직면하는 힘든 문제들에 넘어지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사역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해법과 방법론에 몰두하는 종교적 안내는 자칫 공공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상실한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상을 합리화할 수 있다. 교회 성장 시대를 거쳐 온 한국 교회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현 시점에 경험하고 있는 부작용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삶에 대한 기독교적 해법으로 개인적으로는 성공과 행복을 영위하고 있지만, 자신의 성공과 행복에 취해 공공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상실한 채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는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교회 성장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변화된 시대 정신과 문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아직도 개인의 소원 성취에만 초점을 맞춘 사역이 목회자에게 주어진 최선의 목회 돌봄이라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목회자의 헌신적인 목회 돌봄을 받은 이들 중에서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이 끊임없이 출현한다. TV뉴스에서 ‘장군 부인 갑질’ 소식이 보도되었다. 4성 장군 부인에 의해 저질러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행위와 폭언 이외에도, 불교인인 공관병에게 교회 출석을 강요했다는 소식은 장군 부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임을 짐작케 한다. 개인의 성공과 행복에만 초점을 맞춘 목회 돌봄의 한계가 이런 식의 부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지만,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사랑과 나눔과 봉사와 헌신과 용서와 정의와 자기희생이라는 성경적 가치에는 둔감한 괴물 같은 존재가 지금도 교회 안에서 활보하고 있다. 과연 누가 성도들을 이렇게 왜곡된 신앙인들로 양육했는가? 신앙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한, 그 신앙은 하나의 장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초기 한국 교회는 비윤리적 행위에 연루된 성도들에게 매우 엄격한 권징을 행사했다. 성도가 술과 담배, 축첩제도와 노름 등 당시 한국 사회의 악습에 관여될 경우 교회는 수찬 금지나 출교를 하는 등 가차 없이 권징을 행사했다. 이러한 교회의 엄격성은 교회의 권위 및 대사회적 공신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손양원·주기철 목사로 대표되는 초기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성도들의 영적 부모로 규정하고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목회를 했다. 그들에게 교회는 자신들의 인생 전부였다. 그들에게 성도들은 생명을 바쳐 돌보아야 할 양 무리였다. 그들과 성도들은 계약 관계가 아니라, 언약으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였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로 간에 말이 필요치 않았다. 서로 간에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목자도 양의 마음을 알고, 양도 목자의 마음을 아는 그런 사이였다. 그랬기에 당시 목회 돌봄은 말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 표현되었다. 목회자의 진정성 있는 인격과 삶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성도들이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좌표가 되었다. 물론 오늘날 목회자는 과거의 목회자와 다른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역할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고 계속해서 변화되고 있다. 성도들의 배경도 동질집단에서 이질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성도들의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세대, 계층, 출신, 직업, 학력에 따라 서로 다른 목회 돌봄을 희망한다. 아직도 목회자의 심방을 원하는 이들이 있지만, SNS로만 소통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목회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이들도 있지만, 외부의 전문가를 찾아 상담하는 이들도 있다. 성도들의 다양한 필요에 직면해 목회자는 어떤 목회 돌봄을 수행해야 하는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목자처럼,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전인격과 전존재를 헌신하는 목회자에게 목회 돌봄의 방법론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목회자는 많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는 목회자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현 시대 성도들을 향한 목회자의 목회 돌봄은 그들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 성취를 돕는 역할에서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및 자기희생적 자세 확립을 돕는 역할로 그 무게 추를 옮겨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 교회는 이기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다시금 ‘어둔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추는 영적 기관’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 필자 정보 - 김승호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영국 켄트대학교(Ph.D.). 저서로 《이중직 목회》, 《새로 쓰는 10년 후 한국교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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